소설리스트

〈 253화 〉누군가의 고민(4) (253/341)



〈 253화 〉누군가의 고민(4)

공왕은 말이야….

필리아는 몇 번이나 자신의 아버지를 불렀다. 하지만  한 줌의 애정따위는 찾아볼  없었다.

“그렇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어.  년,  몇 년간.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변해버렸어. 어머니는 그 마녀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야기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 아냐. 잊어버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필리아는 후후, 소리내어 웃으며 가볍게 무거운 분위기를 털어냈다.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니까, 신경 쓰지 마.”
“리아…?”
“그 사생아에게 진다면, 내 그릇은 그 정도라는 거야. 그때는 내가 널 품는 게 아니라, 네가  품어주렴. 그거면 돼.”

믿을 만한 사람인가. 짧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쁘고, 참 고마웠다. 자신이 필리아를 품는다. 단순히 육체적인 관계가 아닌 그녀를 집안으로 들인다 생각하니 묘하게 가슴이 뛰었다. 프로포즈인가....? 생각도 들었다.

“네, 부족하지만 제가....”
“곤란하네.”

필리아는 고양이처럼 기지개를쭉 펴며 길고, 무척이나 깊게 숨을 쭈욱 내뱉는다. 마치 긴장을 완전히 털어내듯, 무거운 짐을 벗어내듯 그렇게.

“가볍게 놀릴까 생각하고 한 말인데, 그렇게 진지하게 반응해주니 기쁘긴 한데 말이야.....”

하지만 그뿐이야. 필리아는 말을 덧붙였다. 마치 지고 싶지 않은 것처럼.

“긴장을 풀면 죽어버린다고, 사막에 나그네 같은 거야.”
“나그네요….?”
“그래, 사막의 가혹한 날씨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그네 말이야. 밤에는 서리가 끼고, 낮에는온몸이 익어버리는 말도  되는 날씨 속에서  날 며칠을 버티던 나그네를 죽이는 건,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남긴 불씨 조각이야. 그 조각 속에서 찾은 희미하게 남은 온기를 더듬고 눈을 감으면, 나그네에게 남는 건 동사(凍死)거든.”

긴장이 풀린다는 건, 죽는다는 거야. 필리아는 홍차가 얕게 남은 잔을 원을 그리며 흔들었다. 그녀의 손끝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레이는 애써 못  척 시선을 돌렸다.

“네...”

필리아는 사막 위에 홀로 서 있었다. 그 누구에도 의지하지 않고,  누구도 바라지 않은 채. 묵묵히 사막을 건너고 있었다. 마레이는 그녀에게 자그만한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그다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흔들리지 않은 눈동자는 아주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사막의 별이 붉은 눈동자 안에서 그녀의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필리아의 손을 붙잡고 싶었지만, 갈 곳을 잃은 자신의 손이 주머니에 밖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 주제는 끝이었다. 더이상 무슨 말을 해도, 어떤 이야기를 해도 필리아의 자존심을 흔드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냥 막연하게 화를 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흠흠… 흠... ”

침묵이 어색한 걸까. 필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마레이는 무엇인가 말을 꺼내려다가, 평소의 복장과는 유달리 눈에 띄는 장식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침묵이 어색했다기보다는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가슴을 둘러싼 큰 붉은 색 리본. 솔직히 말해서 어울린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필리아는 마음에 든 것이지, 살며시 가슴을 펴고, 리본을 매만지며 마레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이럴 때에는 흡혈귀 공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해드려야   같다.

“어, 리아. 그 리본 무척 귀엽네요.”
“눈치채는  늦어.”

필리아는 향을 음미하듯 두 눈을 감고 옅게 숨을 들이쉬고 잔에 남은 홍차를 깔끔히 비워냈다. 거의 다 식은, 그리고 얼마남지 않은 홍차의 향을 음미할 리는 없었지만, 그 모습이 미묘하게 들뜬것처럼 보였다.

“예쁜 리본이네요.”
“동생이 준 거야.후후….  얘도 참.”

그러고 보니 필리아의 동생이 있었다고 들었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필리아가 종종 동생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니 직접 만나지 않아도 친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리아를 닮은 아이라면,  살이려나. 동생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본적도, 만진 적도 없는 동생. 분명 필리아의 동생이라면 귀여울  같았다.

“필리아를 닮았으면, 엄청 귀엽겠네요.”
“날 닮으면 귀여운  아니라, 예쁜 거야!”

네, 네. 마레이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예뻐요, 아름다워요. 필리아가 만족할 때까지 마레이는 비슷한 말을   반복했다. 슬쩍 삐죽 나온 입술은 조금 화가 난 듯 보였지만, 그조차 참 귀여웠다.

“리아가 여동생분 이야기를 하면서 웃는 건 처음이네요.”
“그랬던가….. 요즘 그 아이가 웃은 적이 없었거든.”

필리아는 두 손으로 리본을 꽉 움켜쥐었다. 분한 듯 보였다. 무엇인가에게 무척이나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은 사람을 그리고 있었다.

“여동생분은 어떤 분이에요?”
“흐음…. 어떤 사람이냐...”

필리아는 입을 달싹거리다 입을 꾹 다물었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다가, 슬며시 웃고, 그리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웃고, 다시 찌푸리고. 동생에 대해서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처럼 보였다.

“착한 아이야. 착해, 너무 착해서 서로가 너무 힘드네..”

필리아는  번이나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수 없었다.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필리아는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욕심이없는 아이지. 어릴 적에 먹을 거나 가끔 욕심을 부렸을까. 손을 잡으면 그저 끌려오는 애였어. 어딜 가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았고, 뭘 하고 싶다고 말하지도 않았어. 그저 내가원하는 대로, 내가 하자는 대로 따라왔어.”

필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제 손을 보고 있었다. 곱게 모은 두 손은 테이블 위에서 곱게 포개어 놓았을 뿐, 서로를 맞잡고 있지 못했다.

“한번은… 그래, 그 아이가 어머니처럼 따른 선생이 한  있었어.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수업이다 보니, 전날만 되면 방에 와서 재잘재잘 떠들었어. 내일 뭐 배울까, 내일 어떨까~ 그렇게 신나게 떠드는  듣다 보면 어느새 잠들었어.”

레밀리아는 스스로의 손을 쓰다듬길 반복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수업을 듣기 너무 싫은 거야. 정원에 핀 꽃을 보면서 쉬고 싶은 거야. 전날에 제왕학이라며 하루종일 피곤했거든. 가뜩이나 몸을 험하게 쓰는 수업이다 보니…. 그래서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마당에서 숨어있었어.”

모두가 아는 곳에 숨어버린거지. 너무 어렸어, 그땐. 필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릴 적 이야기였다. 얼마나 어릴 적일까. 허리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 작은 어린아이일 때,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컸을 때?

필리아에 대해서 마레이는 여전히 아는 게 없었다. 그건 필리아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루하루 서로의 거리감을 좁혀나갔지만, 서로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이 말한 것들보다 너무나도 많았다.

그게 참 필리아를 멀게 느껴지게했다.

“결국 걸렸는데, 얘가 펑펑 우는 거야. 가뜩이나 성격이 불같은 선생이다 보니, 얘가 내가 빠지자고 졸랐다고 말하면 어머니나 아버지. 아니, 그 쓰레기가 화를 낼거라 생각에 두려우서 덜덜 떨고 있는데…..  이야기는 일절 안 하고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하루종일 울었어. 그냥 내가끌고 갔다고 하면 되는 일인데…. 선생도 당황했는지, 평소에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꼬리를 그 아이 손에 쥐어줄 정도였으니까.”

필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특별하게 기억이 날 만한 일은 아닌  같았다. 그냥, 그저. 간단히 떠오르는, 피부에 돋아난 길쭉한 털 같은 그런 기억 같았다. 아무렇지 않은데, 그저 계속 신경이 쓰이고, 되돌아보게 만드는. 묘한 감정을 남기게 하는 그런 기억.

“착한 아이네요.”
“응, 그리고.... 너보다 연상이니까. 아이라고부르지 않는  좋을 거야.”

필리아의 이야기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볼을 긁적였다. 자신보다 연상이고, 필리아보다 연하라면, 자신과  자매는  년의 터울이었다.

“뭐, 네가 형부니까 큰 상관은 없겠지만 말이야. 뭐 공석에서는 상호 존대일 테니까 상관은 없나. 나이에 신경 쓰지도 않는 애니까. 그냥 처음에만 어색하게 누나~ 정도로 부르려나.”

재미있겠네. 필리아는 작게 웃었다. 묘하게 쳐진 어깨가 그녀의 작은 몸집을 더욱더 작고 여리게 보였다. 태양이 조금씩 기울고 있었다. 시계를보자, 슬슬 자리에 일어나야만 했다.

“자자, 오늘은 이걸로 끝이네. 오후에는 일정이 있어서 말이야. 집에 데려다주고 싶은데. 시간이 잘 안나네.”

일어나는 필리아를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모르기에 두 사람 다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리고 갈림길에 서서 필리아는 마레이의 뺨을 매만지다 웃으며 뒤를 돌았다.

“저, 필리아. 월요일은 죄송했어요.”

필리아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마레이에게 되돌아왔다. 그리고 검지로 가슴을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화가나 보였다.

“그렇게 계속 사과해야  일은 왜 한 거야?”
“죄송해요.”

필리아는 피식 웃으며 마레이의 뺨을 좌우로 쭉쭉 눌렸다.

“앞으로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 알겠어? 구질구질하게 구는   질색이야. 내가 괜찮다고했으면, 괜찮은 거야. 이 필리아 더 블러드가 괜찮다고 분명히 말했어. 그런데 누가 너를 책망할 수 있는 거지? 너 스스로가 그러는 것도 용서 못 해.”
“네…..”

필리아는 마레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잘못을 했으면 응당 그 책임을 지려는 태도는 아주 좋아. 그러면 말이야.”

필리아는 묘한 웃음을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흥미로 반짝였다.

“키스해줘.”

이곳에 말이야. 흡혈귀 공주님은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마레이는 웃으며 그녀의 흰 볼에 작게 입을 맞추었다. 필리아는 ‘좋아.’ 작게 말하고 일리엔의 강의실 쪽으로 마레이의 등을떠밀었다.

작게 한숨이 나왔다. 기운이 다 빠졌다. 필리아에게서 시선을  수 없었다. 마치 밝은 빛무리 같아서,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짓이 얼마나 허무한지에 대해서 더욱더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무엇이든지, 홀로 해결하려는 그녀의 모습에는 일종의 벽이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높고, 두꺼워서 어느새인가 필리아와의 거리감만 체감하게 된다. 분명 바로 앞에 있음에도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었다.

필리아와 자신은 하나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치는  어쩔 수 없었다. 정체된 생각과는 다르게 어느새 이드리엔의 연구실의 앞에 다다랐다. 은빛 손잡이를 잡는데 묘한 냉기에 손이 움츠러들었다.

 문고리가 이렇게 차가웠던가. 그저 힘을 주고 문을 열면 되는 데도, 그게  되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마음속에서 커지는 필리아의 잔향이 너무 길고, 짙게 남아버린다. 털어내기도 쉽게 않게 말이야.

“왜,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는 거야? 빨리 들어와!”

날카로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리고, 곧장 문이 열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뻗은 손이 마레이의 손목을 붙잡고 방안으로 끌어당긴다.

“정말이지, 점심 내내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야…..”

백금색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나부끼고, 눈앞에는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춘 녹안의 엘프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직 수업 시간까지는…. 아, 지금 쳤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업종이 울렸다. 이드리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같았다. 달싹거리는 입술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작게 입술을 깨물다, 눈을 질끔 감아버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슬며시 웃어 보인다.

“그래서, 흡혈귀 공주님과 데이트는 즐거웠어?”

다만 눈은 마레이에게 고정이 되어 있었다. 웃음이라고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이.

“아, 아.. 그게… 네.”

마레이는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저지른 것처럼 이드리엔의 시선을 피했다. 필리아에 대해서 추궁하듯 묻는 이드리엔의 말에 마레이는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흐응…. 필리아라고 하던가, 그 공녀 몸매도 별로고. 귀염성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타입이 좋은 거야?”

팔짱을 낀채 로 가슴을 살며시 들어 올려 어필하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묘하게 추궁당하는 분위기에서도 차오르는 음심에 얼굴을 붉게 물들일 뿐이었다.

“라벨라도, 그렇고나도 그렇고, 언니도 그렇고. 이렇게 쭉쭉빵빵한 누나들이 매일매일 섹스해주는데도 부족한 걸까….?”

어느새 더욱 가까이다가온 이드리엔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지만, 고작  발자국임에도 딱딱한 문의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두 손이 어느새 마레이를 받치고 있는 문을 짓누르고 있었다.

총명하게 밝았던 녹안은 검고, 끈적하게 물들어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소년을 도망치지 못하게 고정한다.

“우리들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저기, 그게.. 그러니까….”

라벨라, 이드리엔, 일리엔. 그리고 줄리아와 에르덴까지.

단  명이라도, 이들 중   사람의 사랑이라도 받기 위해 수없이 구애해오는 남자들이 있다는 것정도는 마레이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 행위마다, 자신의 흔적을 무자비하게 남기며쉼 없이 범하고 범하며 그녀들에게 끈적한 소유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흐릿한 윤곽으로 이해하고 있는 마레이였기에, 지금 자신에게 타박하고 있는 이드리엔에게 그 어떤 말도 할  없었다. 질투. 그래, 질투였으니까. 자신도 이드리엔이 자신보다 멋지고, 키도 큰 어른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찌릿한 느낌을 참을  없었다.

이드리엔도 마찬가지인 걸까. 그녀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이해할  있었다. 그럼에도 화가 나는  왜일까. 라벨라에게 허락을 받았는데? 네가, 감히?

마레이는 잠시 드는 나쁜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가 마레이에게 소중한 여인들이었다. 이드리엔의 행동을 이해해야 하는데, 감히라니. 마레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깨닫고 나니, 스스로가 조금 두려워진다.

“혹시, 내가 묻는 게 기분 나빠….? 그게.. 나는 그러니까.. 그게…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이드리엔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렸다. 두려워하는  같았다. 마치 비를 맞은  덜덜 떠는 자그마한 동물 같았다.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그녀에게 이런 생각이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느껴지는  어쩔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