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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2화 〉누군가의 고민(3) (252/341)



〈 252화 〉누군가의 고민(3)

이하운은 이를 악물었다.

“에르덴 파벨……”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목소리가  강의실을 채울 뿐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도로를 보았다. 이상하게 이하운의 모습이 자꾸 눈에 밟혔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끈적한 감각이 발목을 붙잡은 채 마레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양은 조금씩 조금씩  키보다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리를 한참 동안 보던 마레이는 익숙한 인영에 자리에 일어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작게 웃고 있는 은발의 흡혈귀공주님. 마레이가 다가오는 지도 모른 채, 필리아는 주변 사람들과 조용하게 이야기를 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필리아를 향해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았는데,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마레이를  곳이 응시했다. 작게 손을 흔들어 웃어 보이는 흡혈귀 공주님은 주변 사람들과 무어라 간단히 말을  뒤, 무리에서 이탈해 마레이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우아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평소와 다르게 가슴 중앙에는 정중앙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브로치를 중심으로 붉은 리본이 그녀의 가슴에 달려 있었다.

“기다린 거야?”
“조, 조금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묻는 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우연이라 대답하지 못하고 거짓말을 해버린다. 거짓말인지도 모르고 두 눈을 크게 뜨기도 잠시, 곧장웃어 보이는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에 따라 웃어버렸다.

“기쁜데,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네.”

태양 아래서 우아하게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흡혈귀 아가씨는 쓰게 웃어 보였다. 마레이도 사실 정상적인 남녀의 반응이라면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똑같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고양이처럼 가늘어지는 그녀의 눈매에 마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을 잡아야 하는 걸까, 아니면 반갑게 인사를 해야되는 걸까. 친구였다면 오히려 편했을 텐데, 필리아와 있을 때 마레이는 자신이 어린애 같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먼저 안겨드는 일리엔이라든지, 자연스레 스킨쉽을 하는 라벨라라든지, 은근슬쩍 손을 잡는 이드리엔이라든지, 두 사람이 있을 때에는 사랑을 속삭이는 줄리아라든지, 우선은 키스를 해버리는 에르덴이라든지와는 전혀 다른 상대.

그동안 수동적으로 상대방이 먼저 해주는 행동에 끌려다니던 마레이에게 필리아와의 연애는 무척이나 답답하면서도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적인 애정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필리아는 싫다고 말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답답하다. 이드리엔과의 일은 라벨라의 조언이 있었기에 마레이는 자신 있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필리아에게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필리아.”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나는대로 인사를 건냈다.

“그래, 마레이. 반가워. 어제는 잘 들어갔어? 셰필드 그 쓰레기 때문에 별일은 없었고?”

자연스레 걷기 시작한 필리아를 따라 마레이는 그녀의 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살짝 굽이 있는 구두였는데도, 평소에 마레이가 걷는 속도보다 빠른 걸음걸이였다.

“아, 네. 딱히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잘 생각해봤는데, 우리가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거 같아.”
“네?”

필리아는 쓰게 웃으며 고해성사를 하듯 고했다.

“그렇잖아. 난 널 좋아하고 있는데, 취미가 뭔지도 모르고 있는 거 같아.”
“아…..”

마레이는 머리를 맞은 것처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좋아한다는 말이 주는 기쁨보다는 당혹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마레이는 필리아와 제대로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서로에 대한 입장은 종종 이야기를 했던 것 같지만 개인과 개인의 만남을 제대로 한 적이 없는  같았다.

솔직하게 필리아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마레이는 모르고 있었다. 그건 필리아도 마찬가지일 테고.

“뭘 좋아해?”

필리아의 물음에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보았다. 은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이고,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는 섬뜩하기보다는 매혹적으로 보였다. 슬며시웃는 입술 사이에 보이는 송곳니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뭘 좋아하냐구, 마레이.”
“아, 저요? 저는.. 그게… 책이랑. 운동이랑 동물이랑 친구들이랑 게임도 좋아하고. 그게 저기. 그러니까..”
“풋.”

필리아가 웃는다. 마레이는 얼굴을 굳혔다. 당황해서 너무 횡설수설하게 말했다. 조심스레 필리아의 눈치를 살펴보았지만, 비웃는다거나 얕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슬며시 고개를 숙이고 가녀린 어깨가 작게 떨린다.

“응, 그렇구나. 그래, 나도  좋아해. 운동도 꽤나 좋아하는 편이고, 친구들도 좋아해. 게임은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동물은 유감스럽게도 싫어해. 나 혼자를 간수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드는데,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서운 이야기잖아.”

필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점차 가까워지는 거리에 마레이는 필리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필리아의 말에 집중하지 못했다.

“긴장할 필요 없어, 마레이.”
“아, 응….. 리아.”

한 발자국만 더 움직인다면 숨결이 닿는 거리까지 다가온 필리아는 작게 웃어 보였다.

“나도, 너처럼 처음이야.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그래도 겁먹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가볍게 윙크를 하는 공주님의 용기에 마레이도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리아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저, 손 잡아도 될까요?”
“......그러니까…. 응. 좋아.”

눈을 질끔 감고 필리아는 마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맞잡은 손이 부르르 떨리고, 살짝 아플 정도로 손을  쥔다.

“부끄러워요…?”
“조금은 말이야.”

필리아 시선을 피한 채, 피식 웃어버렸다. 그리고 마레이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겁먹거나 긴장하지 않았어. 알겠어?”

여전히 그녀의 손을 떨리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공주님.”
“공녀님이라고 했잖아.”

필리아는 만족한 듯 웃어 보였다.

마레이는 필리아와 간단하게식사를 하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원에  꽃에 대한 이야기, 오늘 아침 구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가끔 떠오르는 공국의 강에 대한 이야기. 필리아는 평소보다 더욱 활발하게, 그리고 즐겁게 이야기를 했다. 마레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필리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앞의 공녀님도 같은 세상에 살고 있구나 짧은 감상도 들었다. 지나가던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주식이나, 투자 이야기가 나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필리아는 결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필리아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생동감 있고, 색채 하나하나가 담겨 있어서 마레이도 무척이나 즐겁게 들을 수 있었다. 매일매일 육욕에 빠져 살아가는 자신과는 다르게 많은 경험과 많은  배우고 있다는 생각에 조금 반성하자는 생각도 들었다.

책이라도 읽어볼까. 마레이는 자습할  쓰던 도서관을 떠올렸다. 필리아가 읽은 문학작품을 이야기하는데, 알고 있는 작품이 몇이 없었기에 씁쓸하게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곤란해하는 마레이의 모습을 알아챈 것인지 필리아는 적당히 웃어넘기며 이야기를 끝 맞췄다.

“시험공부는 잘하고 있어?”

아. 필리아의 질문에 마레이는 뒷통수를 맞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부는 성실히 하고 있었다. 예습과 복습은 꾸준히 하고 있었지만, 시험공부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전에 다니던 방벽 주변의 학교에서는 시험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배우고 확인하고, 그저 일련의 과정이었다.

시험이라는 말에 두려움이 앞서지만, 그 사이로 미묘한 기대감이 자라난다. 물론,  볼 수 있다면 안 보고 싶지만 말이다.

“후후, 하나도 안 했구나? 나중에 우리 집으로 와. 공부 알려줄 테니까.수업은 어때? 셀린에게 듣기로는 파격적으로 수업을 듣고 있다고 들었는데. 할 만은 해?”
“아, 네….”

열성적인 선생들 사이에 낀 마레이는, 단둘만의 시간을 1초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진도를 따라잡으며 겨우겨우 수업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으면 수없이 많은 예시를 들어 억지로 이해’당’하고 있었다.

가장 교육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게 줄리아였다. 머리가 뜨거워질 쯔음 잠시 멈춰서 애정행각이나 가볍게 섹스. 다시 진정하면 수업을 진행한다. 그리고 일리엔 같은 경우 ‘성적은 만점으로 드릴게요!’라며 진도를 나가지 않다가 라벨라에게 걸려 크게 혼쭐이 나서야 조금 정상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 일주일의 수업 분량을 30분 안에 끝마치는 일리엔의 진도를 들은 길리아는 너무 ‘대충 가르치는 게 아닌가’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도 내었지만. 문제를 술술 푸는 마레이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만하다면 다행이네, 성가대는 어때? 매주 금요일마다 가는  같은데?”

갑작스러운 성가대 이야기에 마레이는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마레이, 크사레티 선배는 학생회장이야.”

아,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이라고 부르기에는 나이가 많았지만, 사정이 있어서 학교에 계속 다니고 있다고 했었지.

“필리아는 샤샤 선배를 잘 알아요?”

샤샤라…. 필리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잘 알지, 나도 학생회에 있는데. 근데 애칭으로 부르네…. 부러운데.”

필리아는 묘한 시선으로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없다, 갑작스레 턱을 괴고 마레이를 볼뿐이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거 같았다.

“필리아….?”

흡혈귀 공주님은 여전히 말이 없이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한쪽 눈을 반개한 채로, 느긋하게 마레이를 보며 웃고 있었다.

“필리아.”

마레이가 불러도 필리아는 그저 웃으며 보고 있었다. 왜인지 화가 난  같았다. 자세히 보자 눈을 웃고 있지 않았다. 입꼬리만 억지로 끌어당겨 웃는 척을 하고 있었다. 왜 화가  걸까.

방금 필리아가 뭐라고 했더라.

‘애칭으로 부르네… 부러운데.’

“아, 리아. 죄송해요.”
“응. 좀 늦었네. 눈치 없긴..”

흡혈귀 공녀님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학생회장은 애칭으로 부르면서, 나는 왜 리아가 되었다가, 필리아로 되돌아가는 거야?”
“죄송해요.”
“사과하지 말라고 했잖아. 정말이지…. 딱딱하게 부르면 뭔가 벽이 있는 것 같잖아.”

적당히 훈계하는 느낌으로 말하고 있는 필리아였지만, 화가 난 것은 아닌지 발을 앞뒤로 흔들며 웃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도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리아. 아니, 사랑해요. 리아.”
“응, 응. 그래.”
“사랑해요, 리아.”
“....응. 그래.”

사랑한다는 말에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공주님의 모습에 마레이는 테이블 위에 있는 필리아의 손을 꼭 붙잡고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로 사랑해요 리아.”
“알았어. 알았어. 그만.”
“진심이에요.”

필리아는 곤란한 듯 웃으며 좌우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선을마주치다가도 다시 피했고, 얼굴은 분홍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사랑해요.”
“아… 으…. 그만.. 그만. 그만그만! 부끄러워!!”

엘프를 닮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짧고 뾰족한 귀가 붉은색으로 물든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당장이라도 공주님이 도망칠 것 같았다. 필리아랑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기에, 도망치는 필리아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슬아슬하게 욕망을 이겨낼 수 있었다.

“리아는 잘 지냈어요?”
“응… 아니, 아니. 잘못지냈어.”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 필리아는 성급하게 대답한 게 부끄러운 것인지 묘하게 상기된 얼굴로 뺨을 긁적였다.

“무슨 일 있었어요?”
“일이야 언제나 많지. 그중에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이거.”

필리아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들었다. 읽어보라며 주기에 받았지만, 약간의무게감에 놀라 떨어뜨릴 뻔했다. 편지를 열어보자, 금빛으로 이리저리 치장된 무늬들로 빼곡했다.

“제국대학에서 유능한 학생들을 스카우트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실제로 있는 일인가 보네요.”

라벨라가 기억하라며 보여준 황제의 직인이 찍혀 있었다. 교육에 정말로 많은 심혈을 기울인다는 황제의 소문은 사실인지, 아니면 필리아가 황제의 관심을 끌 정도의 무엇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친필로 필리아에 대한 간단한 기대가 적혀 있었다.

“건국제에서 분명히 거절했는데. 이분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톡, 톡, 톡- 필리아의 자그마한 손가락이 테이블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리아는 대학에 갈 생각이 없나요?”
“가보고 싶기는 하지, 국내가 어수선하지 않았으면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갔을 거야. 제국의 신문물들, 현재 과학과 마법의 최전선,  세계 예술이 모이는 곳!”

제국대학에 관심이 많은 것인지, 흡혈귀 공주님은 마레이가 아무 말도 못 할 정도로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디 국가의 무슨 양식, 제국 전통의… 등, 미안한 이야기지만 마레이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다 버리고 가서 공부하고 싶긴 해. 사정이 여의치 않은  너도 잘 알잖아.”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워한다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있을 정도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입가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필리아는 필요도 없는 물건이라고 말했지만, 초대장을 결코 버리거나 찢거나 하지는 않았다. 품속에 조심스레 넣고 미묘한 표정으로 웃을 뿐이었다.

분명 필리아는 공국의 공주로서, 작위 계승권을 두고 배다른 남매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격양되는 필리아는 마레이가 알고 있는 그녀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 쓰레기도 날 제국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이리저리 찌르고 다니고 있고, 첩 년은 별의별 세력을 공국으로 끌어들이고 있어. 후계자의 자격도 없는 주제에 후계자로 올리겠다는  공국을 이리저리 찢어놓겠다는 의미인데. 외부인에게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공왕은 말이야…. 필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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