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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1화 〉누군가의 고민(2) (251/341)



〈 251화 〉누군가의 고민(2)

술 냄새는 싫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몽롱한 기분은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이하운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이하운에게 끌어당겨지며 다시 한번소파 위로 쓰러져 누웠다. 기침이 나올 것 같은 독한  냄새, 말캉한 가슴과 딱딱한 여체. 마레이는 당황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아니, 손을 뻗어 이하운의 몸을 슬그머니 끌어안았다. 자신에게 달라붙은 여성들에게 매일매일 하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기에 마레이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평소처럼 행동했다.

“......이하운… 무슨 일 있었어요?”

이하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마레이는  지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인지, 왜 이하운이 자신에게 이러는 것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위아래로 길게 찢어진 노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바르르 떨린다.

“그냥  시간만 자자. 이대로 말이야.”
“이하운….선생님?”

끊어질 듯-말  한 심장의 고동만이 이하운의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미묘한 온기를 느끼며 마레이도 눈을 감았다. 묘하게 떨리는 이하운의 손을 떨쳐낼 자신이 없었다. 곧장 가냘픈 호흡 소리에 맞춰 천천히 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잠든 그녀의 손가락에 슬며시 깍지를 꼈다. 그녀가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마레이가 잠에서 깼을 때에는 이하운은 바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황급히 시간을 확인하려고 두리번거리는 마레이의 모습에 그녀는 ‘곧 점심시간이야.’라며 짧막하게 말했다. 마레이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종의 안도의 한숨이었지만, 몇 번이나 숨을 들이쉬고 내뱉어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기운이 미묘하게 남아있어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냄새를 오랫동안 맡아서 그런지 어지럽기도 했다.

“먹을  왔으니까, 우선 먹어.”

이하운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샌드위치를 대충 가리켰다. 옆에 놓인 우유를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야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잠에서 깨어낼 수 있었다. 방금전에 코끝을 가득 채운 술 내음이 전부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므랑데는 오늘 결석인가요?”
“전날에 좀 일이 있어서 말이야. 다음 주부터는 제대로 나올 거야. 아, 주말에 추가 수업 열어줄 테니까 할래? 므랑데도 데려올 테니까냥.”
“아뇨, 그런데 므랑데 일이라는 게….이하운과도 관련된 일인가요?”

이하운은 어깨를 으쓱였다. 볼을 긁적이더니 담담하게 므랑데가 못 온 이유를 말한다.

“마법의 날이다냥.”

마법.. 마법.. 중얼거리던 마레이는 곧장 무슨 말을 의미하는 것인지 깨닫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이하운은 읽던 책을 덮고 킬킬 웃음을 터트렸다.

“아, 인간 여성의 마법의 날과는 다른 거야. 흡혈귀들은 보름달이 뜨면 강해진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본 적 있냥?”
“아… 조금이요?”
“보름달이라는  그냥 헛소문이고, 생리랑 공통점은 한 달에  일이라는 정도일까. 뭐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쉽게 말하면 피가 끓어오르는 날이 있어. 수인의 발정기 같다고 하면서도 다르기도 해서…  파괴본능이라든지, 제어가 되지 않는 힘이라든지… 그런 거니까.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냥. 물론 그 녀석들은 부끄러워 한다만냥”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면 모른  해줘. 이하운은 마레이가 입을 대었던 우유컵을 입을 대고 그대로 내용물을 전부 비웠다. 입가에 하얀 우유가 묻어있었지만, 이하운은 팔로 대충 문질러 닦아냈다.

이하운은 말끝에 냥-을 붙이면 다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녀가 자꾸 냥-이라 붙이다가, 어느 때에는 고양이 울음소리를 따라 한 이상한 접미사를 그만둘지 마레이는 대충 넘어가기로 햇다.

“.......므랑데를 여전히 친구로 생각하는  맞지?”
“네.”

마레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고, 이하운은 그 대답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는지 마레이의 머리를 얄궂게 헤집으며 쓰다듬었다. 평소보다 무척이나 길고, 질척이는 손길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기분 탓으로 넘겼다.

“세상에 성공만 하는 사람이 몇이냐 있을 것 같냐?”
“갑자기요….? 글쎄요.”

마레이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렸다. 에르덴, 라벨라, 줄리아, 이드리엔, 일리엔등.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라는 것도 마레이는 너무나도  알고 있었다. 방벽 주변에 있는 마을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이 내몰리기도 했던 장소였으니까.

“나도 많이 실패하고 살았어. 사냥이든, 친구 관계든, 제자 관계든, 결혼이라든, 전부말이야. 처음 실패에는 세상이 무너질  같은 충격이 오지. 두 번째는 무뎌지고, 다음에는 더, 그리고 더더욱 계속 무뎌질 뿐이거든. 그러면서 배우는 거지. 아,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구나… 라는  말이야.”

이하운은 스스로의 머리를 털어내며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이런 말을 하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며 툴툴거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인지 그녀는 계속 말하면서도 시선을 마주 보지 않았다..

“너의 양모라든지, 증조모 같은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면 다들 그걸 몸으로 깨닫고 수긍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자신이 이 드넓은 땅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사는 거지.”
“인정하지 않으면요…?”

이하운의 말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끊었다. 이하운이 다시금 마레이와 시선을 맞추었다. 노란 눈동자는 음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않으면? 않는다면…. 뭐, 병신이 되는 거지. 몸이든, 마음이든. 그냥 계속 다치고 다치고 다치는 거야. 무뎌지지도 못한 채, 끝없이 상처를 받는 거지. 이전보다 지독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말이야.”

이하운은 자신의 하복부를 쓰다듬었다. 찢어발긴 것 같은 상처가 바지 위로 슬그머니 드러나 있었다.

“교육자나 어른의 입장에서 자기 밑에 있는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길 바라잖아. 이렇게 병신이 된 나도 마찬가지로 므랑데가 주인공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것도 아주 행복한 동화 속 이야기의 ‘행복한’ 공주님처럼 말이야.”
“......공주님이요?”
“그래 ‘행복한’ 공주님이 말이야.”

이하운은 답답한 듯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행복한 말을 무척이나 강조하는 이하운에게서 므랑데를 향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아려서 뭐라 말을 내뱉기가 어려웠다.

“그 녀석은 그냥 중2병에 걸린 애새끼일 뿐이야. 나는 혼자야. 나를 이해해줄 사람은 없어. 내 옆에 있으면 누구든 불행해져. 이딴 소리를 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젖비린내나는 꼬맹이지.”
“므랑데는 그렇게 어리지 않...”
“어려. 어리다고.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못  채, 집안에서만 자라던 애가 뭘 알고 있는데? 기껏해야 학교라는 곳을 다니고, 비슷한 또래의 타인을 만난 지 3년도 안 되는 애가 뭘 아는데?”

므랑데에 대한 냉혹한 평가에 반발심이 들어 무어라 말하려는 마레이였지만, 이하운은 그저 판결문을 읊는 판사마냥 결론을 내릴 뿐이었다. 아니, 결론이라기에는 너무 감정적이었다. 이건 변호나 다름이 없었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에는 분노보다는 슬픔이 더욱 짙게 깔린 것 같았다.

“두둔하지 마, 변호하지 마. 너도 어리니까.”

술을 마셨을 때의 모습과 비교한다면 같은 사람이라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이하운은 다른 모습이었다. 어른이구나. 마레이는 눈앞의 수인에게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게 묘하게 억울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하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아니까 더욱 그랬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들 투정에 불과해. 반발심이 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지. 우리는 애였던 적이 없을 것 같아? 우리도 너네랑 똑같은 어린애였고, 비슷한 고민을 하며 살았어. 그렇다고 멋지게 해결하지도 못했어. 그냥 눈을 돌리고 무시한 채로 등을 돌렸을 뿐이니까. 우리도 어른은 처음이야. 다시 한번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쯧. 별 병신같은 소리를 해버렸네. 방금건 잊어버려.”

이하운은 화가 난 듯 샌드위치를 하나를 집어 와구와구 먹고 나서야 말했다.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로.

“그러니까. 네가 그 아이를  붙잡아줘라. 진짜 친구라면 말이야.”

이하운은 마레이의 소매를 꽉 잡았다. 그제서야 이하운이 손은 덜덜 떨리고 있다는  알아차렸다.. 이상하게 이하운의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아니, 느낄  없었다는 말이 정확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에요 이하운 선생님. 그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저랑 므랑데는 친구에요.”
“빌어먹을…. 좋아. 너무 좋아. 그래, 그거면 됐어. 그리고 무슨 일이냐고는 그만 물어. 개인적인 일이니까. 괜찮아.”
“어디로 떠나시는 거에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황이 오면 더 좋겠지만 말이야.  개 같은 년….”

이하운은 단지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뿐인데도  안에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이를 악문 채로 여기에 있지 않은 누군가를 상상하며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흘러나오는 살기에 마레이는 숨조차  수 없었다.

“미안… 하아. 그냥 우리 관계가 어떻게 되든…. 므랑데랑은 여전히 계속 친구인 거 맞지?”
“무섭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에요. 에르덴 엄, 아니. 누나에게 무슨 짓을 할 건가요…?”

이하운은 코웃음 쳤다. 그리고 배를 붙잡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눈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고,  웃다가.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노란 눈동자에는 살의가 명백하게 차올라 있었다.

“무슨 짓을 할 수 있었으면 차라리 좋았을 텐데….. 예를 들면 살인이라든지…. 농담은 아니지만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는 없어. 이런 병신 같은 몸뚱아리로 그 괴물은 못 이겨. 만의 하나라도 생채기라도 내면 기적이라부르겠다.”
“그러면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불안해요.”

이하운은 짧게 한숨을 토해냈다. 손가락으로 마레이의 이마를 꾹 눌러 다시금 소파에 눕혔다. 위에 올라탄 것처럼, 숨결이 닿을 거리에 이하운이 있었다.

“너 성녀랑 무슨 사이야?”
“네? 네? 그게...”

끈적한 스킨십은 물론이고, 가슴을 핥거나 빠는 것은 시작이고, 양모와 함께 목줄을 묶어서 교회에서  플레이를 한다고  수 없었기에 마레이는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 녀석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든. 애들은 조금 좋아하는 편이지만….. 도대체 왜...”

이하운은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 하나하나, 눈썹, 눈, 그리고 목, 입은 옷까지 전부. 그리고 모르겠다는 듯이 ‘으아아악!’ 소리를 내며 등받이에 기대어 누웠다.

“에르덴 누나가 뭐라고 했나요…?”
“.....아냐.”

이하운은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혹시 이하운 선생님을 또 때렸나요…?”
“아니라고. 진심으로 하면 나도 잘 싸우거든? 에르덴 파벨, 그년이 양아치 년이라 그렇지….”

이하운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살기를 풀풀 풍길 정도로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별다른 질문을 하지 못했다. 표정만으로도 더이상 질문하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는 걸.

“그냥… 그냥. 그래. 점심시간이잖냐. 가서 친구랑 밥이나 먹어라.”
“이하운 선생님은 안 드세요?”
“이거면 됐어.”

이하운은  개 남은 샌드위치를 가리켰다. 마레이는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왜인지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늪을 지나는 것 같았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발목이 푹푹 빠져들어 밖으로 나가는 걸음이 느려진다.

“야, 마레이 드 파웬.”
“네?”
“교수님이야.”

이하운의 말에 마레이는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교수님이라고.”
“네…. 이하운 교수님.”
“풋…..! 그냥 이하운이라 불러. 선생님이라 부르든지. 가봐라.”

변덕스러운, 장난끼가 가득한 모습으로 되돌아온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를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하고 아까부터 생각들던 질문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생님. 아까부터 왜 냥- 냥- 붙이다가, 어느 때에는 냥-냥-이라 안 붙이는 거에요?”
“......그냥 취미야.”

이하운은 기분 나쁘게 웃어 보였다. 마레이는 강의실이라 쓰고 체육관이라 부르는 게 정확한 강의실의 문을 닫았다.

-끼이이익….

기름칠을 해야겠네. 이하운은 짧은 감상을 남겼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이제는 완전히 들리지 않을 때쯤에야 그녀는 눈앞에 있는 샌드위치 바구니를 걷어찼다. 샌드위치가 허공을 유영하며 야채나 소스 같은 것을 그대로 바닥에 흩뿌렸다.

“시발… ”

쉴 새 없이 욕설을 중얼거린 이하운은 발치에 굴러다니는 샌드위치를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에르덴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마레이 드 파웬이라는 소년이 미워죽을 것 같았다. 아무런 죄도 없는, 아무것도 모르는  소년의 모습이 싫었다.

에르덴의 요구를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입에서 토악질이 튀어나왔다. 방금 먹었던 샌드위치의 일부분을 그대로 게워냈다. 들었을 때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웃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미친 소리를 지껄인 그년의 눈동자의 광기는 진짜였다.

“우에에에에엑..!”

이하운은 더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위장에 남은 음식물을 게워냈다. 시큼한 느낌이 목에 들고, 알코올 냄새가 올라왔다.

미친년. 미친년. 이하운은  새 없이 에르덴에 대해 욕을 하는 것 이외에 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역겨워…...”

에르덴의 제안이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하운은 작게 욕설을 내뱉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린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그 두 눈. 조금 빠르게 성에 대해 눈을 뜬다고 해도 아직 야한 책도 제대로 사지 못할 것 같은 그 어린 나이의 소년.

차라리 미워한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에르덴의 광기를 증오할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싫었다. 그래서 차라리 어린 소년을 미워하는  낫지 않나 스스로 합리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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