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누군가의 고민(1)
외롭다.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와 체육관이라고 부르는 게 옳을 정도로 운동기구가 가득한 체육관(강의실)을 보며 마레이는 그런 생각을 했다. 차가운 금속들을 본 마레이는 항상 므랑데가 앉아있던 소파에 앉아 두 사람을 기다리는 일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환기를 하지 않는 것인지 쏟아지는 빛무리 사이로 먼지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아무런 거짓 없이 두 사람과 육욕을 나누고 온기를 나눠 받던 마레이에게 집 밖은 왜인지 모르게 외롭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창문을 열자, 미지근한 바람이 힘없이 밀려들어 왔다. 학교 내에 산이 있어서 그런지 미묘하게 축축하게 느껴지는 기분 나쁜 바람이기도 했다. 숨을 쉬는 데 조금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시작되었네. 입술이 저절로 움직이며 힘없는 중얼거림을 뱉어냈다. 산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만으로는 더위를 식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북부의 한여름의 날씨가 봄의 끝자락에 활짝 피어났다.
조금 일찍 온 걸까. 창밖에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어라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했고,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은 돌고 돌고, 걸음은 의미도 없이 앞으로 뒤로 움직일 뿐이었다.
에르덴이 이하운의 뺨을 쳤던 장면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이하운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할까. 이하운은 어떻게 반응할까. 차라리 에르덴이 여기에 있다면 자신보다 덜 부담스러워 했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할지도 모를 터.
주말은 정신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은 변명이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기에 이하운의 일을 뒤로, 뒤로 계속 미루어두었을 뿐이었다. 등 뒤에 느껴지는 낡은 천 조각이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이하운이 이렇게 반응하면, 저렇게 반응하면. 생각이 끊기지 않았다. 이하운은 자신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이면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해서 제대로 반응조차 못하거라는 것쯤은 마레이 스스로조차 알고 있었다.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섥힌 발테르에 와서 마레이가 느끼는 것은 답답함 뿐이었다. 라벨라가 끝없이 지지(?)해주고,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지 않았다면 제대로 적응조차 못 했을 거라는 것 또한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끼익-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었지만, 대충 걷어차이며 열리고 쾅쾅 소리를 내며 닫힌 문의 경첩은 이미 녹초가 되었는지 마른 비명을 지르며 마레이가 기다리던 이하운의 소식을 가져왔다.
“야, 꼬맹이. 오늘은~! 자습이다냥! 좋지? 꺼억-.”
그것도 무척이나 거친 방법으로.
술냄새를 풀풀 풍기는 이하운이 작게 트름 소리를 내고, 손에 쥔 유리병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분명 본인이 컨셉이라고 말했던 냥냥~! 소리를 자연스레 내며 웃는 이하운은 만취한 것처럼 보였다.
“괜찮으세요….?”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한쪽 팔을 붙잡았다. 얇아 보이는 외견과 다르게 팔은 무척이나 단단했다. 이하운은 끅끅- 소리를 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조금 힘들어서 마셨다냥. 미안, 미안하다냥~! 오늘은 좀 봐달라냥!”
이하운은 마레이의 등을 팡- 팡- 소리가 나게 때리며 이전보다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물이 핑하고 돌 정도로 매운 손이었지만, 마레이는 술 취한 사람을 내버릴 정도로 모진 성격이 되지는 못했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운 이하운은 고양이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쭉 기지개를 펴기를 반복하면서 검은 매트리스에 잔뜩 얼굴을 부빈다.냥냥 소리를 내며 웃어 보이는 모습은 귀엽다고 생각도 들었지만, 가면같은 걸 쓴 것마냥 뭔가 이하운과의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왜 이렇게 드신 거에요...”
“미안하다고오오….. 힘들어서 그랬어. 그냥, 애새끼도 말도 안듣고, 옛날 생각도 나고… 새벽에 한잔만 한다는 게…. 지금까지 옆방에서 마셔버렸네. 흐흐흐흐… 아, 이게 아닌데냥.”
여섯 병이나 마셔버렸다냥! 이하운은 대책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마레이는 비틀거리는 고양이 수인 선생님의 팔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붙잡지 않으면 그대로 앞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이하운의 노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불안하게 떨려있었기에 더 꽉 붙잡은 것일지도 몰랐다.
옅은 호흡 사이로 매캐한 알코올 향기가 물씬풍겼다. 냄새만으로 취해버릴 정도로 무척이나 독했다. 이하운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마레이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이다가 입을 달싹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므랑데랑 무슨 일이 있었어요?”
“무슨 일은 항상 있지, 그 녀석은 망할 애새끼다냥. 말 좀 들으라니까. 쥐뿔도 말 안 듣고. 중2병도 단단히 걸려서 맨날 혼자 냅두라고 신경질 부리고. 하… 내가 이러니 술을 못 끊는다냥!”
이하운이 호박색 액체가 든, 뚜껑이 열린 것만으로 알코올 냄새가 올라오는 술병을 입으로 옮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건 알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한심하다는 짧은 평가가 들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도 말이다.
거기에 비속어를 막 섞어 내뱉는 모습은 선생님이라기보다는 깡패 같았다.
“더 드시면 큰일 나요. 진정해요 이하운 선생님….”
“괜찮아. 야, 내가 전성기에는 밤새 마시고도 다음날 싸우러 나갔다냥. 이 정도로 취할 정도로 나안 죽었다냥! 너도 한 잔 줘? 앙?”
“냥은 어디 가신 거에요?”
이하운도 자신의 실수를 이해한 것인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술 취한 사람들의 말은 언제나 똑같았다. 북부 방벽의 주점에서 보았던 마을어르신들과 여행객들의 모습에서 봤던 그대로 말하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억지로 술병을 빼앗았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어린 소년을 밀치고 술병을 되찾을 수 있겠다만, 이하운은 에에- 하며 얕은 소리를 내며 칭얼거릴 뿐이었다.
“좀 누워 계세요… 독한 술을 여섯 병이나 드셨으면 웬만한 장성들도 그대로 쓰러질 거에요. 천천히… 네. 누워 계세요.”
“안 취했다니까아…. 받아라 냥냥 펀치!”
꼬부랑거리는 발음으로 말하는 이하운을 토닥이며 마레이는 그녀를 소파로 천천히 옮겼다. 슬그머니 소파에 뉘이자 그대로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이하운의 모습에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거기다 술버릇도 고약해서 마레이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쉴 새 없이 두드리며 냥냥펀치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었다.
자신의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조금은 연상처럼 보이는) 여성이 소파에 누웠지만 그래도 앉은 공간은 대충이나마 남아있었다. 문 앞에서 소파까지 취객을 옮겼을 뿐인데 진이 다 빠질 것 같은 탈력감에 마레이는 이하운의 다리를 슬그머니 밀어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냈다.
“물이라도 떠다 드려요?”
“우리 예비 사위는 친절도 하다냥. 키키키키킥.”
이하운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어린애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길게 쭉 뻗은 다리가 소파의 등받이를 치며 툭 투둑툭 투두두둑. 소리가 쉴새 없이 울려 퍼졌다.
“그래서 화가나….”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작아서안 들려요.”
이하운은 취기 없는 얼굴로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곧장 활짝 웃으며 냥냥 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자신이 들은 게 착각이 아닐까 싶어 다시 되묻자.
“모른다냥!”
마레이는 연상이라기보다는 연하의 소녀 같은 행동을 하는 이하운의 모습에 겉옷을 벗어 그녀를 덮었다.
“이하운 선생님…. 한숨 주무시면 괜찮을 거에요. 아무에게 말하지 않을 테니까. 다음부터 이러고 오시면 안되요. 그러면 화낼지도 몰라요.”
“괜찮아. 괜찮다냥~.”
흐느적거리는 이하운의 손이 대충 허공을 휘저었다. 미지근한 강의실 온도와 미지근한 이하운의 행동에 마레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미묘하게 이 광경이 싫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 몰랐다. 이상하게도 말이다.
“우리 사위도 재미있냥~!”
왜 자신이 이하운 선생의 사위인지는 모르겠지만, 취객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마레이는 대충 알았다 말을 하면서 이하운에게 어서 잠들라는 듯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고, 이하운은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점차 말수를 줄여나갔다.
이제는 완전히 잠든 게 아닐까 생각이 들어 손을 떼어내자, 갑작스레 엉덩이를 꽉 움켜쥐는 감촉에 마레이는 샛된 비명을 터트렸다.
“히이이이익! 이, 이하운 선생님!”
“크크크큭. ‘히이이이익!’이래. ‘히이이이익!’ 여자애냐? 히이이익~ 거리게?”
얼굴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당황한 마레이는 자리에서 펄쩍 일어나 이하운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마레이의 반응이 뭐가 그리 좋은지 박수를 치며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한쪽 눈을 반쯤 감은 이하운은 고양이처럼 두 팔과 두 다리를 쭉 펴 몸을 늘어뜨렸다. 선명한 복근이 시선이 갔다. 지독하게 술 냄새가 났고, 또 비틀거리며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하운은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길게 하품을 한 이하운은 등을 돌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새하얀 백발은 태양 빛을 머금어도 힘없이 반짝일 뿐이었다. 그녀가 만들어준 빈자리에 앉았다. 온몸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근육이 잡힌 복근에도 흘긋흘긋 근육이 보이는 건강한 허벅지에도, 작게 떨리는 발가락에서도 흐릿하게 술 냄새가 난다.
“너 친구 많냐?”
“네?”
“친구 많냐고. 별건 아니고. 으응, 그냥… 그러니까. 그냥 궁금해서 그..”
이하운은 아무런 고저도 없는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끝에 말을 굳이 붙여서 그런 것인지 왜인지구차해 보인다는 걸 알았지만, 왜인지 묻고 싶었다.
“조….금 있어요.”
“그래.”
방벽이 있던 마을에 또래 소년과, 같은 반 아이들. 같은 반 아이들을 친구라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하운이 큭큭 소리를 내며 작게 몸을 떨었다. 술 냄새가 났지만 왜인지 그녀가 술에 취한 것 같지 않은 것 같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마레이는 옆에 누워있는 고양이 수인 선생을 멍하니 보았다.
발을 뻗으며 비슷해질 것 같은 키. 마레이 주변에 있는 성인 여성치고는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 장신의 라벨라등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교수라는 명함을 달고 있었지만, 엉덩이를 툭툭 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동무를 한다던가, 가끔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친구라고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 있어요?”
“사람이 일이없는 게 더 힘든거다냥. 너도 이 나이쯤 되면 인생의 좆같음을 기억하게 될거다냥. 잊고 있더라도 어느새인가 발목에 족쇄가 되어서 끌려갈 때가 있을 때마다 애기애기 거리고 싶을 때가 있을 거다냥.. 그러면 생각하는 거다냥. 아, 미뤄두었던 일이 터져버렸구나! 하고 말이다냥.”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하운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짐승처럼 몸을 둥글 게 만 채로 말이다. 왜인지 그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 같았다. 냥냥 거리는 게 심하게 거슬렸지만, 생각보다 귀엽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었기에 마레이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취객의 헛소리는 가볍게 무시하라는 말이 떠올랐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괜찮아요. 힘내세요.”
“.....하!”
이하운은 기가 찬 듯 벌떡 일어나 크게 코웃음 쳤다. 그리고 마레이를 보며 이마를 잔뜩 찌푸리다가 머리를 거칠게 털어내고 다시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번에는 몸을 둥글게 말지도, 슬그머니 자리를 남기지도 않고 다리를 쭉 뻗어 마레이의 무릎에 종아리를 올려두었다.
그 이후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소파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탈력감은 가셨지만, 이하운 옆에는 누가 있어야 될 것만 같았다.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다. 요근래에 왜인지 옆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적지근한 날씨에 누군가 붙어있다 보니 허벅지에는 슬그머니 땀이 차기 시작했다. 차갑지도, 덥지도 않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자 땀을 머금은 허벅지 위가 조금 차갑게 느껴진다.
“마레이..... 꼬맹이, 자냐?”
“아니요.”
이하운의 목소리에 마레이는 눈을 떴다. 정말로 잠들지는 않았다. 미묘한 오전의 시간을 조용히 유영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은 방벽의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이상한 조용한 시골 동네였으니까.
“애들은 금방 어른이 돼. 굳이 달려가지 않아도 찾아오는 게 어른이라는 이름인데. 아이들은 손을 뻗으며 달려가려고 해. 그게 참…..”
“냥이라도 이제는 안 붙여요?”
“시끄러워, 듣기나 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이야. 이하운은 작게 혀를 찼다. 마레이는 조용히 이하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참…. 안타까워. 근데 더 안타까운 건.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이야. 나이를 먹고, 많은 경험을 하면서 어른이 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아이를 곧장 어른으로 만들게 하는 여러 가지 마법들이 존재해. 가난이라든지, 결핍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지독한 마법들이지. 이하운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는 마레이도, 새하얀 페인트칠이 되어있는 천장도 담기지 않았다. 금색 눈동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므랑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레이에게 시선을 돌린 이하운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독한 마법이라는 말은 틀렸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건 지독한 현실이었다. 마레이는 어떤 표정을 보여야 할지 몰랐기에 그저 멍하니 이하운을 볼 수밖에 없었다.
“너도 그 녀석도 이렇게 작은 꼬맹이일 뿐인데…..”
평소에 웃으며 장난을 치던 이하운의 모습을 떠올릴 수도 없게, 그녀의 눈동자에는 미묘한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몇 초간 시선이 마주했다면 피했을 마레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다는 말이 정확했다.
노란 눈동자에는 억울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안타까움도, 그리고 알 수 없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어려운 감정들도 가득 들어차 있는 것 같았다.
“왜야…..”
이하운은 몸을 슬그머니 일으키고 두 손을 뻗어 마레이의 목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