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0화 〉교육과 만남(9) (240/341)



〈 240화 〉교육과 만남(9)

“뭐… 소환 같은 건 위험하니까 알려주기에는 그렇지만 이론이나 응용 정도는 알려줄게. 1학년 때 공부했던 노트들도 가지고 있으니 그것도 빌려줄 테니까. 열심히 해보자고.”

셀린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학기 초라 의욕이 넘쳐 보이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작게 웃어버리고 자리를 일어나 금요일에 보자 말하며 떠났다.



거센 눈 폭풍 같았다. 모두가 떠난 자리를 보고 마레이는 겨우겨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얼음덩어리를 몰고 온 거대한 폭풍. 잠시라고 불러도 될 정도의 시간이 흘러갈 정도였지만,  휴유증은 무척이나 길게 남을 뿐이었다.

귀족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도 없는 작은 마을에서 도시 생활의 적응은 생각보다 깜짝깜짝 놀랄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정신없이 보내는 하루하루에 어떻게든 익숙해지고 있었고, 성공적이라 말할  있는 수준이었지만, 살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서로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의 옆에서 마레이는 어찌할지 모르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소년과 소녀들은 벌써부터 자신의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걸 쟁취하기 위해 무작정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아니, 무작정이라는 말은 그들의 노력을 비웃는 말이었으니 취소.

마레이가 상상도 하지 못할  그림을 그려나가고, 그걸 완성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모두 마레이보다는 연상이었지만, 라벨라나 이드리엔등과는 다르게 동갑내기라고 보이는 학생들.

그런 그들이 보여주는 살벌한 표정,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색하는 방법 등은 마레이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충격적이고 두려울 따름이었다. 서로를 물어뜯는 모습은 사람이 아니라 흉포한 짐승처럼 보일 뿐이었다.

논리적이고,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필리아조차 욕설을 내뱉고 상대를 조롱했고. 처음보는 상대의 앞에서 약혼녀를 희롱하는 후안무치한 주벨린은 당장이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이상할 상태에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 순간이지만 그렇게 보였다. 마레이는 자신 또한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 두려워서 참을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멍하니 하늘을 보다, 자신의 고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우습게 느껴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면 저 멀리 익숙한 금발의 소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제 갈 길을 가는 소녀의 마레이는 조심스레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람의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음을 옮겨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갈 뿐이었다.

“누구야…?”

한참이나 걷던 므랑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낮은 울음소리 같은, 어린 짐승을 닮은 목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문 마레이였지만,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저에요, 마레이.”

금발의 소녀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두 눈이 화들짝 커지고,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지만, 곧장 입술을 오므리고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인지 일부로 얼굴은 잔뜩 구겼지만,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멜란.”

딱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니.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 므랑데는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애써관심이 없는 척 연기하는 모습에 어울려줘야 할까,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에 그녀는 구두의 앞굽으로 애꿏은 땅을 걷어찬다.

“어딜 가고 있는 건가요?”

가볍게 흘러나온질문에 므랑데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두 손으로 꽉 쥐고 있는 바구니를 슬그머니 들어 보였다. 지난번에 동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가 어디로 갈지 대충 짐작이 갔다.

“또 동물들에게 음식 나눠주러 가는 거에요?”
“같이 갈…. 아니. 그래. 응, 나눠주러 가고 있어.”

잠시 눈동자가 반짝였지만, 므랑데는 애써 시선을 돌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냥 꽉 끌어안고 억지로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서툴고, 귀엽다고 느끼는 건 이상한 걸까.

“같이 갈래요?”
“...딱히, 딱히 가줄 필요는 없어. 난 혼자가 익숙하고… 또 잘 할  있으니까.”

므랑데는 무엇이 불만인 것인지 또다시 땅을 걷어찼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마레이에게 슬쩍슬쩍 시선을 던지는 걸 보면 초조해 보이기도 했다.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상관은 없지. 네가 꼭 가고 싶다면 말이야.”

두서없는 말. 어색한 말투. 그리고 딱딱하게 굳은 몸. 잔뜩 긴장하고 있구나. 마레이는 므랑데를 보면 이상하게 안쓰럽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강했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것처럼, 인형처럼 생긴 작은 소녀는 무엇인가 억눌린 듯 행동하곤 했다. 그 모습을 보면 억지로 손을 뻗어 잡아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럼 가고 싶어요.”

므랑데의  늘어진 어깨에 슬그머니 힘이 들어갔다. 흐응~ 하고 작게 콧소리를 내고 므랑데는 슬며시 마레이의 옆에 다가와 나란히 섰다.

“어디로 가야되죠…? 제가 아직 학교 지리가 조금...”
“아, 응. 따라와.”

마레이와 나란히 섰던 므랑데는 마레이를 슬그머니 보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조금은 빠르다 생각할 정도로 걷고 있었지만, 중간중간 뒤를 돌아봐. 아니,  걸음 걸을 때마다 슬그머니 뒤를 돌아봐 마레이와 걸음을 맞추는 므랑데에 마레이는 어떻게든 그녀를 따라갈 수 있었다.

숲의 그림자로 스며든 빛무리에 반짝이는 금발은 곧장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다 가끔은 마레이의 걸음이 늦었기에, 므랑데는 중간중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빠져들어  때는 노을처럼 희미해지는 금발에서 이름 모를 씁쓸한 꽃내음이 났다. 자신과 비슷한 키의 소녀가 왜 이리 연약해 보이는 것인지. 앞서 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불안할 따름이었다. 마레이에게는 너무나 무거운 바구니를 가볍게 드는 므랑데임에도 이유도 모르게.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므랑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이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므랑데 곁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곧장 우울한 생각으로 이어져 버린다.

그런 마레이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므랑데는 갑자기 멈춰서서 길게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아주 길게, 그리고 높게 퍼져나가는 소리에 곧장 작은 동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아서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와… 대단해요.”

토끼, 다람쥐 같은 작은 소동물부터. 날아다니는 산새들, 노루나 북부에서 본 크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그만한 순록까지. 숲속 초식동물들이 전부 모인 듯했고,그 중심에 금발의 소녀가 있는 장면은 동화속에서나 볼 듯한 신기한 장면이었다.

“흠흠..!”

므랑데는 부끄러운 것인지 작게 헛기침을 하고 가슴을  폈다. 평소랑 다르게 먹이를 주지 않고 뜸을 들이는 흡혈귀 아가씨의 모습에, 참을성 따위 존재하지 않은 짐승들은 곧장 커다란 바구니에 얼굴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아, 안돼! 기, 기다리란 말이야! 꺄, 꺄앙!”

순록이 므랑데의 뒷목을 크게 핥아내자 귀여운 소리와 함께 바구니를 사수하던 손의 틈이 생겨나자, 곧장 동물들이 바구니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 하지 마! 하지말란말야!”

므랑데에게매달리고, 바구니에 얼굴을 들이밀고, 마치 늑대 떼처럼 이곳저곳에서 밀어닥치는 초식동물들의 돌진에 므랑데는, 혹여나 아이들이 다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바구니를 빼앗겼다.


“항상… 항상 이런 식이야… 엉망진창….”

므랑데는 이곳저곳이 구멍이 뚫려, 망가져 버린 바구니를 꼭 안아 들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면 작은 입술 사이로 곧장 한숨이 흘러나올 것처럼 달싹거린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기 위해 더욱더 등을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땅을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 므랑데는 여전히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혼자 길을 거닐 때보다, 힘없이 웃을 때보다 살아 있는 것만 같았다. 위태로워 보였지만 무너지거나 부숴질 것 같지는 않다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마레이는 므랑데의 옆으로 다가갔고, 므랑데는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호흡을 진정하기 위해 숨을 아주 천천히 내쉬고, 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멜란, 괜찮아요…?”
“......응. 괜찮아. 잠시만… 잠시만… 진짜, 잠시만...”

므랑데의 볼이 꿈틀거렸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물방울이 슬그머니 흘러내렸지만 마레이는 애써 못본척 했고, 므랑데는 눈가를 쓱쓱 비비고 마레이를 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보였다.

“봐봐, 매일 이래. 매일매일 망치기만 하고, 제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 이런  뿐만 아리나, 그냥 인간관계도 똑같아. 망치고, 또 망치고 화내고, 그러니까….”


므랑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주변에 남아있는 토끼 같은 작은 동물들을 보고 손을 뻗었다. 배가 불러 만족한 것인지 쉽사리 흡혈귀 아가씨의 손길을 허락했다.

“다가오지 말라는 거야. 난 아무것도 제대로  줄 모르는 멍청이니까. 괜히 누구를 믿어서 상처받고 싶지도, 상처 주고 싶지도 않아.”

그게  진심이야. 므랑데는 낮은 숨을 토해냈다. 자그마한  토끼  마리가 다가오니 쪼그려 앉아 품 안에 안고는 그대로 무너지듯 주저앉는다.

부풀어 오르다 터질  같았다. 풍선처럼 말이다. 므랑데를 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괜찮다가 싶었지만, 금방 이상하게 변해간다. 그저 떠다니는 부평초처럼 너무나도 쉽게 므랑데는 크게 기뻐하고, 그것보다 더욱더 크게 슬퍼했다.

조울증처럼 말이다.

금방이라도 펑! 소리를 내며 터져 흔적도 남지 않게 부서질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불안해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이하운도 이런 느낌인 걸까. 토끼의 뺨을 꾹꾹 누르며 아무 말 없는 므랑데의 옆에 앉았다.

작게 몸을 움찔 떤 므랑데는 다시 입술을달싹이다 토끼에게 집중했다.

“동물들에게 애쓰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정말로요.”

므랑데가 고개를 들어, 마레이를 보았다. 그리고 작게 코웃음을 치더니 토끼를 꼭 끌어안았다. 자세히 보니 예전에 본  있는 것만 같은  토끼였다.

“치사하네….”

금방이라도 도망쳐버릴 것 같은 므랑데를 위해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지만, 므랑데는 그것만으로 충분해 보였다.

희미하게 웃는 입꼬리가 보였다. 마레이보다 므랑데가 더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입을 꾹 다문 므랑데가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감정을 말하는  참 힘든 일이야. 내가 내뱉는 말이 어느새 다른 감정을 나타내고 있으니까. 그래서 옳은 단어를 생각해야 되고, 그걸 상대방이 이해할  있는 상황에서 말해야 해. 그래서 말할 때마다 두렵지만….. 그래도 그러니까….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었지만, 므랑데는 그 흔한 말조차 내뱉는 것이 어려운 것인지. 횡설수설하며 쥐어짜듯 단어 하나하나를 내뱉는 것 같았다.

“네, 저도 고마워요.”
“네가 왜 고마운데….”

므랑데는 화가 난 듯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그리고 작게 웃어버렸다. 애써 주제를 돌리듯 데리고 놀고 있던 토끼를 마레이를 향해 내밀었다.

“이제 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려고 하는데, 도와줄래?”

옆구리가 잡힌 채로 축 늘어진 토끼는 평소보다 길어보여서 무척이나 커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토끼의 붉은 눈동자는 므랑데처럼 마레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토끼를 안아 들었다. 자그만한게 무척이나 따뜻했다.

“울보요, 눈이 빨간  므랑데랑 닮아서요.”
“이 아이의 이름은 갈비야! 울보라니 그런 건  돼!”

므랑데는 화가 난 듯 인상을 슬쩍 찌푸리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이름을 정해둔  같은데 왜 자신에게 도와달라고 한 걸까.

“그렇지 갈비야?”

확 채가듯 마레이의 손에서 토끼를 빼았은 므랑데는 들릴 듯, 말듯 토끼의 귓가에 속삭였다. 토끼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 움직여 므랑데의 손아귀를 급하게 빠져나가고 곧장 뛰쳐나가 숲속으로 사라졌다.

“아…..”

므랑데가 멍하니 토끼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갈비라는 이름도 별로인가 보네요.”
“그런가 보네….”

멍한 대답이 들려왔다.

므랑데와 대화는 그걸로 전부였다. 자연스레 짐을 주섬주섬 챙기는 그녀를 도와주고, 교문 앞에서 손을 흔들어 헤어지며, 마치 당연한 듯 헤어졌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고마워라는 말과 함께 입술에 남은 희미한 온기를 남긴 키스 때문일까.

입술에는 미묘한 온기가 자꾸만 맴돌았다. 박치기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무식한 프렌치 키스에 입술 안쪽이 쓰라리기도 했다. 마레이는 묘한 느낌과 아픔이 맴도는 입술을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므랑데처럼 귀여운 아이가 키스를 해줬다는 사실만으로 기쁠 만하지만, 이상하게 뒷맛이 너무나 썼다. 그녀의 프렌치 키스가 애정표현이라기보다는 발버둥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오늘 길리아와 약속했던 그 날이란 걸 떠올린 마레이는 자연스레 학교 주변 광장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라벨라에 열성적인 팬(?)이라는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라벨라가 길리아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기대될 따름이었다.

귀족 가문과 연이 없다기에, 마리타 가문의 길리아를 일종의 가족이라 생각하고 있는 마레이였지만 라벨라가 보기에는 그저 남일 따름이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어린 소년은, 자신 또래의 소녀를 보고 라벨라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예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지만, 끈적한 소유욕은 길리아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처럼 냉철한 표정과 억양 없는 목소리로 대하길 바라기도 했다. 마레이는 약간의 기대와 지루함에 찻잔에 스푼을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방벽주변의 아침과 저녁은 무척이나 이르기에 가끔은 도시의 시간이 낯설게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한 시간도 안돼서 노을이  테지만, 여전히 밤거리는 환한 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