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교육과 만남(8)
셀린이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기에 마레이도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고, 기세를 탄 주벨렌은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셀린도 유능하다고? 공부도 잘하고, 예쁘고. 물론 내 것이라 그런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예쁘잖아. 이 파란 머리카락도, 하얀 몸도 말이야. 그딴 성격 나쁜 흡혈귀…..”
-촤륵!
신이 나 떠들고 있는 주발렌의 흑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갈색 액체가 그대로 흩뿌려진다. 퍼져나가는 우유 향과 흑설탕 특유의 질척이는 냄새가 나는 것도 잠시. 주발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자신의 머리에 밀크티를 뒤집어씌운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 실수. 손이 미끄러져서. 좀 꺼져줄래? 냄새나니까 말이야.”
“아하하하, 필리아 공주님. 항상 실수만 하시는군요. 지난번 사교회 때도 그렇고.”
“고의야. 실수라고 포장해줬으면 감사한줄 알고 꺼지라고, 병신새끼.”
어느새 다가온 필리아는 빈 밀크티의 플라스틱 잔을 주발렌의 발치에 집어 던졌다. 평소의 교양 넘치고, 고양이 같은 모습과는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필리아는 사납게 주발렌을 노려보고 있었고.
“말도 안 되는 억지 논리를 펼치는 공주님과 할 말은 많지만, 저는 바빠서 말이죠. 공주님처럼 여유로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뭐, 어디 사창가에 약속이라도 잡아놨나 봐?”
“뭐 눈에는 뭐만 보일 뿐이겠요.”
“그래서 지난주만 해도 다섯 번이나 고급 요정에서 밤을 지새웠구나?”
주발렌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다.
“공무도 없으며서 참 한가로우신가 봅니다. 저에게 그런 신경도 쓰시고?”
“뭐라는 거야, 반푼이 새끼는?”
어떻게든 교양있게 말하려는 주발렌과, 그냥 가볍게 욕설을 내뱉는 필리아. 애써 화를 참으려는 그의 모습에 필리아는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넘긴다. 몇 초동안 필리아를 노려보던 주발렌은 그대로 들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진다.
“피, 필리아…?”
“안녕, 마레이. 흠.. 흠...”
무안한 듯, 필리아는 작게 헛기침했다. 전날의 일이 생각난 마레이는 묘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필리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바로 온다고 했는데, 저 모질이보다는 늦어버렸네. 미안.”
“...그, 저분하고 사이 안 좋으세요… 그렇게 욕도 하시고..”
“‘분’이라니… 저’새끼’라고 해야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으로 대우하는 것이지. 사람이 되다만 쓰레기에게그런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마레이도, 셀린 괜찮은 거지?”
“예, 아가씨.”
셀린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마레이, 뭐라도 한마디 해주지 그랬어?”
“다, 다음부터 할게요….”
갑자기 셀린의 가슴을 주무르며 음탕한 말을 지껄이는 주발렌의 모습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이미 쌍둥이 자매를 나란히 두고 범한다든지, 양모에게 매일 질내사정 하며 임신하라 외치는마레이가 남을 욕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었다고는 죽어도 말은 못 했다.
“저는 그만 자리를...”
“셀린도 앉아. 마레이, 셀린이 멘토라고 했었지? 이야기는 한 번 해야된다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이 같이 있는 자리에 하려고 했니, 차일피일 미루다 이 꼴이네. 이쪽은 마레이 드 파웬. 그리고 이쪽은 계약관계에 있는 정령술사 가문의 셀린 페르디낭. 둘 다 인사해. 이 자리에서는 선후배가 아니라 동료라 생각해줬으면 좋겠네.”
셀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고, 마레이도 따라 고개를 숙였다. 필리아는 두 사람의 모습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꺄르륵 하고 웃어버렸다.
“저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공국에는 세 명의 후계자가 있어. 첫째인 나, 그리고 둘째인 내 동생, 마지막으로 첩의 자식인 모질이 하나.”
지난번에 들어본 이야기이기에 마레이를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가 노망이라도 났는지, 애첩의 꼬리 짓에 혹한 것인지, 그런 움직임 덕분에 공국에는 지금 세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어.”
필리아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장녀이자,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인 나, 필리아 더 블러드.”
두 손가락이 남았다.
“사생아 새끼인 가벤 더 블러드.”
마지막 한 손가락.
“선조의 피를 가장 짙게 이어서, 루마니아 건국왕의 재림이라 불리는 내 동생.”
필리아의 손은 어느새 주먹이 되어있었다.
“나야, 원래 적법한 후계자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날 지지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군부와 행정부 쪽이 지지해주고 있고. 사생아 새끼는 공국에 자신의 세력을 넣고 싶어 하는 방금 그 쓰레기가 속한 외부 세력들과 돈받아 먹은 외교부 놈들.”
입맛이 쓰네, 필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교부라 하면 보통 국익을 위해 움직여야만 했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 국가를 움직이려는 놈들이 외교부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고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격세유전이다 뭐다 하면서, 역사서의 건국제의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내 동생. 덕분에 루마니아 초대 황제의 재림이라며 얼굴도 보기 힘든 원로원에서 난리 치고 있는데. 정작 그 녀석은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아서 말이야.”
필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동생을 생각하는 것인지 무척이나 비릿한 느낌의 웃음이었다.
“그 녀석을 끌어안아 보호하고 있는 덕분에, 원로원과 매국노 새끼들에게 주 표적은 나야. 원로원은 그 순둥이를 황제로 만들겠다 벼르고 있는데. 내가 무너지더라도 목숨을 걸고 사생아 새끼랑 결판을 짓겠지. 그러면공국은….. 아무리 못해도 절반 이상은 무너지겠지. 그럼 발테르 총독은 제국의 안녕이라면서 자연스레 공국을 병합할 테고.”
갑작스레 등장하는 로렌의 이름에 마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는 쪽이 다 잃는 거야. 나나, 사생아나. 멋모르는 철부지 동생을 나는 업고 싸우고 있는 거고. 이런저런 이권들이 아귀처럼 달라붙어서 공국은 지금 화약고 같은 상태라서. 이렇게 먼 외국의 아가씨마저 내 편으로 끌어다 쓰고 있는 상태라는 거지.”
“송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셀린의 모습에 필리아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사실상 3년 동안 유배로 발테르에 쫓겨나와 있다 보니, 이래저래 얽히다 보니 누가 적이고, 누가 내 편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졸업하고 공국에 가서 직접 움직여야 정확한 피아식별이 되겠지.”
“아….”
그 옷가게에 말도 안 되는 괴력의 여검사와, 늙은 행정가 노만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년의 요리사 또한.
“처음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로 작았는데, 삼 년 정도 비우다 보니 어느새 덩치를 키워서 날 위협할 정도가 되었어. 거기에 원로원도 내 등을 찌르려고 벼르고 있고. 재미없는 이야기지?”
“아닙니다, 아가씨.”
셀린의 대답에 필리아는 작게 웃고 슬며시 발끝을 꼬고 앉았다.
“학교에서는 선배겠지?”
“예, 선배님.”
“좋아, 좋아.”
필리아는 가볍게 손뼉을 마주쳤다. 짝- 소리가 가볍게 울려 퍼졌지만 이상하게 여운이 남는다.
“내가 마레이를 돌봐주고 싶긴 한데, 나도 요즘 바빠서 말이야. 마냥 학원 생활에 전부 투자할 수 없는 건. 셀린, 너도 잘 알고 있지?”
“예.”
“네가 마레이를 돌보렴. 세간에서는 벌써 어린 여우가 꼬리를 치고 있다고 하고. 말도 안 되는 전략을 짜고 있다고 하지만, 우리는 진심이거든.”
필리아는 마레이를 보며 짙게 웃고 있었다.
“네?”
진심이라는 말에 셀린이 되물었다.
“흡혈귀 공주님의 처음을 앗아가고, 귓가에 사랑을 속삭이며 책임지겠다면서. 다만, 어제의 일은 조심해줘.”
“아… 네, 넷!”
필리아의 말이 무엇인지 깨달은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의 변화가 거의 없던 셀린은 놀란 것인지 두 눈을 아주 크게 뜬 채로 마레이를보고 있었다.
“내가 마레이를 좋아할 수 있도록 유혹하겠다고 약속해줬어. 후후.. 생각아니 기분 좋네. 결혼은.. 뭐, 아직 먼 이야기니까. 나에게도, 마레이에게도.”
필리아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마레이에게 손을 뻗었다. 마레이는 무의식중에 그녀의 작은 손을 붙잡았고, 필리아는 그런 마레이를 강하게 잡아당겨 자신의 품 안으로 이끌었다.
“아직 널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마레이 드 파웬. 그래도 좋아하는 거 같아. 너와 함께 있으면 심장이 마구마구 뛰는 게 느껴져. 어제의 일은 신경 쓰지 마,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될 뿐이니까.”
슬그머니 부푼 가슴에 귀가 닿아있었고, 그 너머로 쿵쾅쿵쾅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난 사랑이란 걸 잘 몰라. 그런 걸 할 여유가 없었거든. 그래도 내가 널 좋아하는 건 확실해. 그러니까, 나에게 사랑을 알려줘. 더 두근거릴 수 있도록 말이야.”
“어제는 죄송했어요.”
“괜찮다고. 편지는 잘 읽었어. 이드리엔 교수가 아침에 건네주길래 뭔가 싶었다니까.”
자신과 비슷한 키의 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래, 그거면 됐어.”
필리아는 손바닥으로 마레이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필리아는 일정이 급하다면서 자리를 일어나, 마레이에게 가볍게 이마를 부비고 떠나버렸다. 셀린과 남은 마레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고, 그건 셀린도 비슷한 것 같았다.
“....학교 생활은 익숙해졌어?”
“아, 네!”
멘토멘티로 소개받았을 때보다 더 낯선 느낌이었다. 다만 그때보다 나은 것은 셀린의 눈이 마레이를 온전히 담고 있다는 점일까.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마레이 드 파웬으로서 그녀 앞에 서 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은 취소한 게 없는 거지?”
“네에.”
마레이는 자연스레 셀린에게 자신의 시간표를 적은 종이를 꺼내 보여주었고 셀린은 망연자실하게 시간표를 보았다. 깊고 깊은 한숨이 이어졌다.
“이걸 감당할 수 있는 건 맞는 거지… 그렇지?”
“....아마도요?”
형형색색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시간표를 본 셀린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멘토멘티라고 좋게 치장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따지고 보면 학교 내에서 라인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장점도 있었지만, 서로를 배척하게 되는 확실한 단점이 존재했지만. 교장인 로렌은 그런 단점보다는 장점에 비중을 두었기에 여전히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다.
대부분은 학교에서 대충 짝지어주는 멘토멘티로 적당한 그룹을 만들며 서로의 안면을 익히고 학교 적응 같은 부수적인 효과를 누리고 있었지만, 확실한 목표가 있는 소수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파벌을 만들고 미래를 꾸며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은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로렌이 묵인한다는 걸 보면 분명 로렌이 학생등레게 필요한 건 그런 귀족 가문의 유착관계였다는 점이다. 그러니 지금도 이어지는 전통(몇 년 되지 않은 학교지만)이었다.
그래도 표면적으로 멘토멘티라는 것에 묶여있다 보니 후배들의 공부를 봐주고는 하는데, 셀린이라고 해도 오전 오후 하루종일 수업만 가득한 마레이의 시간표를 보면어떻게 할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전술, 전략학의 줄리아 파후, 크사크루 자매의 마법학, 아무도 듣지 않아 족보도 존재하지 않은 이체르 발렌타인 교수의 수업, 애들을 두들겨 패서 쫓아낸다는 이하운 교수, 다들 기피하는 동방 검술 수업까지.
수업을 듣는 시간도 무식했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셀린의 공부하는 방향과 전혀 궤를 달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대책 없는 소년은 듣고 싶은 수업을이것저것 담고 소화할 생각이겠지만, 정말로 천재가 아닌 이상은 시간표에 치여 죽어버릴 것 같은 엄창난 수업량!
마법에 교양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드리엔 크사크루라는 교수였다. 따라오면 차기 제국대학의 인재라고 불리는 무지막지한 수업량과 과제량과 학생을 배려하지 않는 강경한 진도!
원소 마법에 어느 정도 적을 둔다고 생각한 셀린이라지만, 차라리 일리엔 교수 쪽 백마법 수업 관련 공부를 도와주는 게 더 쉬워 보일 정도니까!
“솔직하게 말할게. 난 자신이 없어. 마레이…. 원소 마법을 공부하고 있긴 하지만, 이드리엔 교수수업이라면 지금 내가 들어가도 겨우겨우 수업을 들을 정도일 테니까.”
“네에...”
솔직하게 말해서 마레이는 이드리엔의 수업을 들은 적이 없었다. 일리엔이야 중간에 몸을 결합한 채로 수업하며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가며 그래도 꽤나 진척이 있는 느낌이었지만, 육욕에 사로잡힌 이드리엔에게 마레이와 있는 시간은 몸을 섞는 시간일 뿐이었으니까!
“난 몸이 약해서 검술, 격투 관련해서는 배운 적이 없어. 이런 말은 미안한 데…. 네가 알아서 해야 해.”
“네.”
“이체르 발렌타인… 하필 흑마법. 정말로.. 멘토로 미안한 이야기인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미안해.”
셀린은 속임없이 솔직하게 백기를 흔들었다. 마레이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에 셀린을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귀를 붉게 물들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괘, 괜찮아요! 다들 친절하고.. 잘 알려주시니까...”
“이드리엔 크사크루 교수가?”
셀린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되물었다. 마레이에게 있어서 반항기가 있지만 적극적인 육노예였지만, 셀린에게는 무슨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 같은 존재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이, 이드리엔 교수님도 귀여… 착해요. 잘 알려주고.. 적극적이고...”
“그 말을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마레이가 보기에는 서투르지만 적극적인 이드리엔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물론 제멋대로 달려 나가서 쫓아가길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라벨라가 자신을 믿고. 야생마처럼 날뛰는 이드리엔을 쫓아가도 좋다라고 말했기에 큰 느낌이 없다고 해야 될까.
“공부에 관해서 널 도와줄 방법은 없고… 어떻게 해야되나...”
“그, 저…. 그러면 정령술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정령술? 그건 교수들에게 배우는 게 더 나을 텐데….”
“그냥 궁금해서요.”
의기소침한 셀린의 모습에 제멋대로 말한 마레이였지만, 셀린은 묘한 눈으로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수업 시간을 가득 채워놓고도 새로운 걸 배우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파웬가는 역시 파웬가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순둥이처럼 웃는 모습을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