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화 〉가벼운 일상(5)
“‘그것’이 뭐예요? 필리아.”
“응…? 그거야 당연히..”
자연스레 말을 할 뻔한 필리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꾹 다물고 마레이를 바라보다 묘하게 시선을 피한다.
“그게 뭔데요, 필리아. 알려줘요.”
“......몰라.”
마레이가 반복해서 내뱉었던 단어가 필리아에게서 흘러나왔고, 마레이는 필리아에게한 걸음 더 다가가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기고 있다. 묘한 승리감이 마레이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필리아가 자신을 놀린 것만큼, 그 이상으로 이 흡혈귀 공주님을 괴롭히고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애써 숨기는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전 정말 모르겠는데, 말해줘요. 그게 뭐에요? 제가 매일 생각하는 게 뭐에요?”
“아, 알고 있잖아…. 둘이 있을 때 잔뜩 말해줄 테니까. 그, 그만...”
“그거 알아요, 필리아?”
필리아는 고개를 돌린 채, 눈동자만 슬쩍 움직여 마레이를 본다. 마레이는 새가 날갯짓 하는 것처럼 접혔다 펼치길 반복하는필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인다.
“전 필리아를 생각하면 항상 ‘그것’만 생각해요. 필리아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매일매일 필리아랑 ‘그것’을 하고 싶어요.”
“읏…!”
“그게 뭔지 속삭여줘요. 필리아. 아무도 못 들을 거예요. 네? ”
“그, 그마안...”
필리아가 마레이의 가슴을 슬며시 밀어냈지만, 힘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그저 의미 없이 작게 칭얼거리듯 움직일 뿐이었다.
“필리아랑 잔뜩 ‘그것’을 하고 싶어요. 제 방에서 하루종일, 주말에 하루종일. 매일매일. 필리아랑 결혼해서 아기도 잔뜩 만들고 싶어요. 필리아도 그렇죠? 필리아도 ‘그것’을 하고 싶죠?”.
모친의 정성스러운 교육(?)으로, 전신을 사용(?)한 교육(?)으로 성장하고 있는 마레이는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흡혈귀 공주님에게 자신의 원하는 행동을 강요하고 있었다.
“파웬. 그만.. 제발.. 그만… 마레이.”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마레이만 간신히 들을 수 있게 속삭이는 필리아는 귓가에 닿는 소년의 숨결에 몸을 부르르 떨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흥분에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잔뜩 모은다.
“말해주면 그만할게요. 제 귓가에 속삭여줘요. 제가 필리아를생각하면 항상 하는 ‘그것’이 뭔지 말해줘요. 필리아랑 잔뜩 하려는 ‘그것’을. 제방안에서, 학교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게 뭔지 말해줘요. 빨리.”
“아으… 으…. 세, 섹…. 섹스… 섹스야.. 이, 이제 그만…..”
흡혈귀 아가씨의 입에서 나오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 만족한 마레이는 슬그머니 필리아를 끌어안았다. 울음을터트릴 것 같은, 두려움에 떠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묘한 충족감과 정복감을 느끼며 잔뜩 단단해진물건을 필리아의 하복부에 잔뜩 붙여 꾹꾹 누른다.
저 입에서 교미라는 말을 하게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일리엔등처럼 저속한 말을 내뱉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대신 그녀들과 다르게 잔뜩 붉어진 얼굴로 수치심으로 가득 찬 얼굴로 자학을 하며 묘한 갈증으로 자신을 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 사랑스러운 공녀님을 범할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속도를 내지 못하는 모친의 교육(?)이 제 속도를 내고 있었다면 이미 근처 모텔로 필리아를 끌고 들어갔겠지만, 아직 어린 소년에게 그런 깜냥은 없었다.
“필리아랑 하고 싶어요.”
“여긴 밖이야...”
“안이면 상관없어요? 우리 집으로 갈래요? 멀지 않은데.”
“그, 그런 이야기가 아니잖아!”
필리아가 소리를 꽉 내질렀다. 마레이는 깜짝 놀라 필리아를 품 안에서 놓아버렸고. 필리아는 거칠게 마레이를 밀어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다투는 연인에게 쏟아졌지만, 발테르의 청춘들이 의례 보여주는 일이었기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나친다.
거칠게 거절하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방금전까지 자신이 벌였던 행동을 깨닫고 깜짝 놀라 필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이는 거야, 파웬? 네가 원하면 언제든지 벌려주는? 하, 날 그렇게 생각했더니. 정말… 정말...”
“아니에요, 필리아. 잘못했어요.”
“.....우리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겠어. 먼저 가볼게.”
필리아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마레이를 두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마레이는 서둘러 달려가서 그녀를 붙잡았다.
“정말 아니에요, 필리아. 진짜로.”
“.....됐다고. 이 손 놓지?”
“못 놔요.”
필리아는 인상을 구기고 마레이의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힘을 주기 시작했다. 손목이 으스러진다는 감각이 이런 걸까. 마레이는 감각이 천천히 사라지며 고통으로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손목에도 필리아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놔, 안 놓으면 다쳐.”
“못 놔요. 절대. 진짜로 잘못했어요 리아.”
“.......그 이름 부르지…...하아.”
필리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감았다.
“그래, 네가 잘못했어. 하아…. 너도 네가 잘못한 건 알지?”
“네.”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으스러지도록 잡은 마레이의 손목을 놓았다. 손자국이 있는 그대로 찍혀있고, 핏기가 하나도 없는 소년의 손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몇 번이나 길게 한숨을 내쉬기 반복했다. 마레이는 여전히 필리아의 손목을 붙잡은 채,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럼 왜 그랬어.”
“피, 필리아를 쉽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필리아랑 같이 있고 싶어서….”
마레이 스스로도 참 어처구니없는 변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필리아를 쉽다고 생각한 건 절대 아니었다. 같이 있으면 두근거리는 아름다운 소녀. 동경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를 감정에 마레이는 자신의 말재주가 정말 없다는 걸 실감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넌 도대체 뭘까 마레이 드 파웬.”
필리아의 눈동자가 우울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레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필리아를계속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네가 차라리 나쁜 놈이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실컷 욕이라도 하고, 때려서 내쫓아버릴 텐데.”
필리아는 입술을 잔뜩 오므리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 어떻게 비칠지. 나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그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넌 생각할 필요가 있어. 넌 방금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모멸감을 주었어. 근데 그것보다 나쁜 게 뭔지 알아?”
필리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이 젖은 눈동자가 마레이를 응시하고 있었다.
“미안해요, 리아.”
“넌 내게 어떤 존재인지 자각이 없다는 거야.”
“미안해요.”
“그리고 더 화가 나는 건…… 널 용서해야겠다고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게 나고.”
마레이는 필리아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느낌은 알 수 있었다. 필리아는 끝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마레이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무척이나 분해 보였다.
“나는 오늘 일을 없는 거로 할게. 하지만 말이야. 네가 나를 정말 생각한다면. 지금의 일을. 네 가슴에 새겨. 그리고 잊지마. 그럴 수 있어?”
“...미안해요.”
필리아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강하게 입술을 깨물고 마레이를 슬며시 밀어냈다.
“.....그리고 유혹할 거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분위기도 맞추고. 알겠어?”
“네에….”
“여심을 생각하란 말이야!”
등 뒤에서 투닥투닥 두드리는 필리아의 손짓에 마레이는 묘한 죄책감과 두려움에 필리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집중이 되지 않는다. 마레이는 자신 앞에 잔뜩 놓인 책들과 노트를 멍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무엇을 더 공부해야 되는지, 무엇을 알고 있고,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풀 수 있고, 논설은 작성할 수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할 방법이 없었다.
제국대학에 다니는 수많은 대학생들이 존경스러워질 정도였다. 마레이에게 도서관이라고 하면 오래된 책 냄새로 가득 차서 문을 여는 순간 잠시동안은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고, 익숙해지면 묘하게 집중이 잘 되는 곳 정도였지만.
발테르 학원의 도서관은 마레이가 상상하는 동네 도서관과는 크기조차 비교가 되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거대했고, 개인 공부실부터, 단체 스터디를 위한 룸도 잔뜩있는 새로운 세계였다.
이드리엔의 ‘원소마법 기초’ 강의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책만 해도 책장이 십수 개가 넘었고, 읽어볼 만한 책을 세 권 정도 고르는데 30분이 넘게 걸려버릴 정도였다.
기세 좋게책을 고르고 여러 개를 펼쳐 비교, 및 이해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서로 설명도 묘하게 다르니 새로 공부할 양만 두 배 정도 늘어난 기분이었다. 거기에 점심쯤 필리아와의 일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반복될 뿐이니 집중이 될리도 없고.
마레이는 이상하게 풀리지 않는 문제를 보고 길게 한숨을 내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근소근 거리는 잡담이 들릴 듯, 들리지 않을 듯 아주 조용히 주변을 헤집고 있었고, 이곳저곳에서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린다.
손바닥으로 눈을 꾹꾹 누르며 집중하자, 집중하자 몇 번 중얼거리던 마레이는 다시금 펜을 잡았지만, 잡담은커녕 책 넘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싸늘한 침묵에 고개를 들었다.
“이, 이드리엔…. 교수님?”
“열심히 하네.”
마레이의 맞은 편에 이드리엔이 턱을 괸 채로 웃고 있었다. 마레이는 깜짝놀라 자리에 일어날 뻔했지만, 너무나도 여유로워 보이는 여교수님의 모습에 멍하니 그녀를 볼 수밖에 없었다.
기다란 백금 발 머리카락은 중력에 따라 이끌려 의자 등받이 뒤에서 반짝이고 있었고, 장난기로 가득 찬 녹색 눈동자는 마레이를 보고 흥미진진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마레이는 갑작스레 찾아온 도서관의 침묵의 정체가 눈앞에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엘프 교수 때문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다들 이드리엔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눈치라 말하기에는 다들 그녀를 쳐다보기 바쁘다.
이드리엔은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한 것인지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어린 소년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세계에는 자신과 눈앞에 어린 남자아이만 존재하는 듯이.
“바빠서 공부는 손을 놓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틈틈이 하고 있던 거야? 열심히 하고, 기특해. 후후후.”
이드리엔은 집에서 공부하고 있던 마레이를 발견한 라벨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손을 쭉 뻗어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애정이 어린 행동에 사람들의 관심이 이드리엔 뿐만 아니라 마레이에게도 향했고, 온몸이 따끔거릴 정도의 시선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그렇게 푸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접근을 하는 게 맞겠지. 봐봐.”
이드리엔은 반대편에 앉아있음에도 정자로 마레이가 읽고 쓸 수 있는 방향으로 정갈히 문제 풀이를 써 내려갔고 마레이는 이해가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풀이 시도는 좋았는데. 이 부분, 계산이 틀렸잖아. 아직은 부족한 것 같네.”
이드리엔은 마레이에게 보여주는 평소처럼 옅게 웃고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가면의 미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드리엔의 웃음에 헉-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흘린다.
“여기인가요?”
“그 아래, 집중해. 그리고 제대로 계산했다고 치더라도, 이 부분에서 왜 갑자기 백마법 술식으로 넘어가는 건데? 문제 풀이에 익숙해지지 말고, 개념을 생각하라고 개념을. 발테르 애들은 머리가 좋은데, 다들 성적에만 신경 쓰다 보니 문제 풀이에만 혈안이라…. 내 애제자는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이드리엔은 손가락 끝으로 마레이의 뺨을 잡아당기고 슬며시 놓길 반복한다. 마레이는 이드리엔의 애정어린 스킨십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리엔이 슬며시 몸을 붙이고 마레이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인다.
“....그거 알아?”
“예?”
작게 속삭이는 이드리엔의 목소리에 마레이도 똑같이 이드리엔조차 간신히 들릴 것 같은 목소리로 작게 대답한다.
“나 같은 미녀 교사를 옆에 두고 공부하니까 어때? 다들 널 부러워하는 거 같은데. 아까전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에 오싹오싹할 정도야.”
“앗….?!”
이드리엔의 속삭임에 정신을 차린 마레이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도서관의 중심이 된 것처럼 힐끔힐끔 보는 시선들의 향연에 마레이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 고개를 숙인다.
“자, 다 풀었으니까. 봐봐, 어때?”
이드리엔은 어느새 노트에 잔뜩 적어놓은 걸 자랑하듯 마레이 앞에 내밀었다. 자로 잰듯한 반듯한 글씨로 쓰여 있는 글은 마레이가 풀던 문제와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섹스할래?
맨 위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여길 보라고 마레이. 네 전용 육변기가 안달이 나 있는 거 안 보여?
두 번째 줄을 읽은 마레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옆을 흘깃 보자 이드리엔은 턱을 괸 채 마레이만을 보고 웃고 있었다. 더 읽어보라는 듯이 가느다란 턱으로 노트를 다시 가리킨다.
-마레이 전용 빨통도 잔뜩 빨리고 싶어. 아, 흥분된다. 지금 젖어버렸어. 나도 언니처럼 개변태육변기인가봐.
웃으면 안 되는 데, 이상하게 야릇하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내용이었다. 마레이가 슬며시 웃자 이드리엔은 마음에 드는 것인지 슬며시 마레이를 끌어안듯 달라붙고 노트위에 다시금 글자를 써내간다.
“읏…!”
책상 밑에 내려간 손이 어느새 바지 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었다. 마레이는 작게 몸을 뒤로 내뺐지만 이드리엔의 집요한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도서관에서는 조용해야지, 마레이?
“이, 이드리엔.”
-서필로 해. 여기가 좋은 거야?
공개된 장소에서 망설임도 없이 유혹하기 시작하는 이드리엔의 행동에 마레이는 긴장한 듯 주변이 눈치를 흘깃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