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가벼운 일상(4)
므랑데도, 필리아도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다가가면 계속 거리를 벌리는 금발의 흡혈귀 아가씨와 서로 족쇄를 채우는 필리아와의 관계보다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입하려는 듯하는 여성들과 언제나 예쁘다 예쁘다 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있던 마레이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아, 화요일날 저희 집에 오실래요?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괜찮다고 하셨는데.”
“정말? 정말?! 와!”
길리아는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것마냥, 정말로 기뻐하고 있었다. 시골에 있을 때 느낀 가족 같은 느낌의 친구. 친척이라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그녀에게 집으로 초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길리아는 고개를 마구마구 끄덕이면서 마레이에게 달려들듯이 다가와 꼭 포옹했다.
“조, 조금 놓아주세요… 너무 꽉 안으면… 숨이 막혀요...”
“미안, 미안! 와, 라벨라님과 만난다니… 와...”
길리아는 지금의 행운이 믿기지 않은 듯 연신 감탄사만 내뱉을 뿐이었다. 라벨라를 만나는 게 그렇게 기쁜 일인가? 생각한 마레이는지난주에 로렌에 대해 물었던 길리아의 모습이 기억이 나 로렌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금요일날 로렌 님에게 초대받아서 총독성에 가봤어요.”
“초, 총독성에…?”
“네.”
역시 방계라고 해도 파웬의 이름을 가진다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작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미 성마저 다른 파웬 가문과 마리타 가문였지만, 자신에게 답장 한 번 보내지 않은 총독이 눈앞의 소년을 직접 초대한다니.
“어땠어? 로렌 님은?”
“무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그냥… 눈빛이나 말씀 하시는 게...”
“무슨 말씀 하셨는데?”
“딱히 말하신 건 없으신데… 그냥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속해서 왜? 왜? 왜? 를 연발하는 길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무어라 대답해야 될지 알 수 없었다. 라벨라보다 더욱더 성숙하다 못해, 음란하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극상의 여체를 보고 흥분했다던지. 아니면 자신의 턱을 만지며 재미있으니 자주오라고 했다는 사실 중 그 어느 것도 말할 수 없었다.
“가서 뭐 했어?”
“그냥… 식사랑 간단하게 차를 마셨어요. 그리고 일이 있으셔서 곧장가셔서. 저도 이야기를 깊게 한 게 아니라...”
“그래….?”
길리아는, 당시 마레이가 느꼈던 두려움과 좌절감보다 더욱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그 뒤로 딱히 할 이야기가 없었기에 학교 주변에 있는 음식점이나 간식 가게 같은 이야기를 조금 하다가, 공부하는 분위기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둘 다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게 참 미묘할 뿐이었다. 길리아도 사교성이 있는 성격이 아니고, 마레이도 먼저 말을 꺼내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에 당연한 결과였을 지도 몰랐다.
“이드리엔 교수 수업을 어때? 지루하지? 남자애들은 예쁜 엘프 교수와 단둘이 수업이라며 부러워하는 것 같은데… 과제량은 어때?”
“딱히 과제는 없었네요. 대부분은 교육이다 보니까….”
쉬는 시간이라는 명목하에 시작되는 끈적한 육욕의 파티에, 이드리엔이 승자가 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덕분에 가벼운 몸으로 연구실 문을 나서는 어린 소년은 과제도 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만 즐기고 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정상적인 진도를 나가고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전에 딱히 별일은 없었다. 길리아는 길리아 대로 관심사가 있었고, 마레이는 마레이 대로 관심사를 가질 수 없는 환경에 있다 보니 공통된 주제가 없었고. 자연스레 서로 말없이 공부하는 진정한 스터디 모임이 되어버렸다.
물론, 길지 않았지만.
“나는 이만 가볼게, 군사학 모임이 있어서 말이야.”
“모임 관련은… 금요일 오후 아니었나요?”
“뭐 시간 날 때마다 모여서 공부하거나 입시 준비를 하는 거라. 우리는 딱히 그런 게 없네. 아, 마레이는 멘티가 누구야? 우리는 그냥 모임으로 묶여있다 보니 멘티-멘토 개념보다는 동아리 소속 같은 거라서 누구라도 말할 수가 없네. 필리아 선배라 소문이 있는데 진짜야….?”
“아니에요. 샤샤 선배에게 추천받아서, 셀린이라는 분과 함께 하고 있어요.”
길리아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갈색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셀린.. 셀린…설마 셀린 페르디낭? 진짜? 그 사람 소문이 별로 안좋은데……. 다른 사람이랑 바꾸는 게 낫지 않아?”
“딱히 이상하다고 생각은 안 들었는데… 소문이나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저랑 맡지 않는 사람일 뿐이겠죠.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제가 직접 본 셀린 선배는 나쁜 소문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좋은 사람 같아요.”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하겠지. 난 식사 약속이 있으니까 먼저 갈게. 예비 군인들이라 그런지 식사는 모여서 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 후후, 다음에 봐 친척 씨.”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길리아는 크게 손을 흔들고 빠르게 건물 너머로 사라졌다. 절제되어 보이지만, 왜인지말괄량이 같은 소녀였다. 어 른같으면서도 아이 같았다. 그냥 자기 자신과 비슷해 보여서 옆에 있으면 라벨라등과 다른 의미로 편안한 사람이었다.
슬슬 식사를 하러 갈 생각에 가방에 책들을 집어넣는 중에 시선이 검게 물들었다. 자리에 급하게 일어났지만, 여전히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누굴까?”
“필리아인가요?”
“재미없게. 그때는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줘야지. 이러면 무안해지잖아.”
눈을 가리던 두 손이 떨어지고, 다시금 세상은 색을 머금었다. 뒤를 돌아보자 뾰루퉁한 말과 다르게 필리아가 웃고 있었다. 미묘하게 기뻐 보였다. 엘프처럼 뾰족한 귀끝이 파닥거리듯 접혔다 펴지길 반복했다.
“어떻게 찾아오셨어요?”
“시간도 남고 해서, 반으로 찾아갔어. 그런데 너희 교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말이야… 길리아 마리타랑 같이 있다고 애들이 신나서 이야기해 주던데?”
필리아가 건물 한쪽 창문을 가리켰다. 반 아이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마레이와 필리아를 보고 있었다. 괜히 부끄러워 가방을 급하게 챙기고 고개를 푹 숙이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 것인지 필리아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마레이의 외투를 정돈해주며 필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길리아랑은 아는 사이인가요?”
“사교계에서 파웬가의 뿌리다 뭐다 하면서 종종 신나게 떠드는 쓸모없는 가주의 성 마리타라는 정도로 알고 있지. 마리타 영애와는전혀 모르는 사이야. 가문의 후계자도 아니고, 삼녀인가, 사녀인가. 기억도 나지 않네. 기억하기에는 알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다고.”
정말이지, 난 천재가 아니란 말이야. 작게 칭얼거린 필리아는 길리아가 앉아있던 자리를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약혼자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다른 학생회 사람들의 식사 요청도 뿌리치고 왔는데, 혹시 가련한 공녀님을 혼자 두실 건가요? 마레이 드 파웬?”
“가, 같이 먹어요!”
필리아는 한쪽 눈을 감고 웃음을 터트렸다.크게 대답한 게 웃긴 것일까. 마레이는 입을 달싹거리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 자신도 모르게 실수해버린 걸까.
“비웃는 거 아니야.”
“네? 그게 어떻게….”
“네 표정에 다 들어나 있거든. 그냥 귀여워서 웃었어. 능글맞게 대답하는 걸 생각해봤는데.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네.”
“능글맞게요?”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는 마레이의 모습에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묘한 망설임이 그녀의 눈가에 달라붙어 있었다.
“음…. 예시를 알려줘야 하나…. 정말이지. 딱 한 번만이야. 그러니까… 흐음… 아,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잘 들어. ‘오, 가련한 공녀님을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죠. 신사라면 기쁜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필리아 더 블러드.’”
“풋. 정말 그런걸 생각한 거에요?”
“아이…! 이래서 해주기 싫었다고!!”
필리아는 화가 난 지, 주먹으로 마레이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미약한 힘이 담긴 주먹에 마레이는 작게 웃으며 필리아의 어깨를 슬며시 붙잡았다.
“해드려요?”
“정말이지…. 날 뭘로 보는 거야…...? 너랑 있으면 나도 어린애가 되어버리는 거 같아...”
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붉은 눈동자가 힐끔 마레이를 담아냈다가, 급하게 시선을 피한다.
“그래도 조금, 조금이지만, 아주 조금이지만…! 보, 보고 싶을지도.”
흡혈귀 공주님의 붉은 눈동자가 애꿎은 땅만 바라볼 뿐이었다.
“흠흠…! 오, 가련한 공녀님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 없죠. 약혼자로서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어요,필리아 더블러드.”
“....귀엽네.”
필리아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슬며시 기울어진 고개와 입술을 가리고 있는 검지손가락이 무척이나 요염해 보였다.
“용기 내서 말했는데. 귀엽다니.. 차라리 멋지다고 해주세요.”
“응, 멋져.”
“놀리는 거죠?”
“아냐, 진짜로 멋졌어. 귀여웠고. 한 번 더 보고 싶기도 해.”
“정말요?”
필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오, 가련한...”
“하하하하, 그만. 그만 마레이 드 파웬. 어디까지 날 웃길 셈이야. 장난이야, 장난. 멋지고 귀엽고 또 사랑스러웠어. 응, 해달라고 전부 해주는 건 밀고 당길 때에는 좋은 버릇은 아니야.”
“너무해요, 필리아….”
엄격하게 말하던 필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해하는 마레이의 등을 슬며시 쓸어내리고 가볍게 허리를 두드린다
“밖에 나가서 먹을까? 괜찮은 레스토랑을 알고 있는데.”
“지난주에 너무 많이 써버려서, 이번 주에는 아껴야 되는데…. 학원 식당도괜찮을까요?”
필리아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인지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한번 마레이를 본다.
“용돈 받아?”
“아, 네.”
“어느 정도인데?”
마레이가 말하는 액수에 필리아는 작게 입을 벌리고 놀랄 따름이었다. 귀족가의 도련님. 아니, 파웬가의 도련님이 받는 용돈이라고 하기에는 무척이나. 아니, 다른 귀족가의 아이들에 비하면 받는 수준도 아니었다.
비교를 하자면, 학교에서 먹을 점심값 정도일까. 저녁은 집에서 먹으라는 악의적인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정도였다. 라벨라 드 파웬은 후계자 교육에서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라벨라 감찰국장도 대단하네….. 이건 검소하다는 걸 넘어서 구두쇠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는데.”
“필요할 때 쓰라고 카드는 받았는데,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쓰고 싶지는 않거든요.”
마레이는 지갑에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모양의 금박이 잔뜩 붙어있는 카드를 떠올렸다. 곤란한 일이 있을 때 꺼내면 된다고 라벨라가 이야기를 했던 걸 생각하면 마레이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결제수단이 아니라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뭐 그러면 적당히 먹기로 할까. 자, 빨리 가자. 아침에 동생 때문에 제대로 뭘 먹고 오지도 못해서 배고프거든.”
슬며시 손목을 잡고 움직이는 필리아. 자그만한 체형에서 나온다고 믿기지 않는 거대한 힘이 마레이를 이끌었다.
“처, 천천히 가요. 필리아!”
“생각보다 점심시간은 짧다고, 파웬.”
필리아는 싱글 생글 웃으며 점점 빠르게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에 따라 걷자 어느새 학교 식당 앞에 도착했고, 곧장 지나쳤다.
“학교 식당, 방금 지나치지 않았나요?”
“그렇네.”
“자, 잠깐 필리아. 저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에요? 지금 교문으로 가는 거죠?”
“맞아.”
필리아의 적안이 장난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레이는 힘을 주어 필리아를 멈춰보려고 했지만, 흡혈귀 공주님의 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레스토랑은 안 갈 거에요!”
“알아, 알아.”
마레이의 거절을 가볍게 지나친 필리아는 슬며시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어, 어디로 가는 건데요!“
“글쎄, 어디일까…? 마레이가 원하는 곳?”
필리아는 아랫입술을 슬며시 핥으며 은근슬쩍 마레이의 손에 깍지를 낀다. 미묘하면서도 적극적인 스킨쉽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앞서 걸어가는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소녀.
태양 빛 아래에서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 사이에서는 묘한 달콤한 향이 났고, 백옥같은 피부는 여전히 병적으로 하얗게 보여 하나의 예술품 같아보이기도 했다.
“제, 제가요…?”
“응, 가보면 알 거야. 어디인 것 같아?”
“자, 잘 모르겠는데요...”
필리아는 묘하게 웃고 있었다. 손안에 잔뜩 움켜쥔 온기가 무척이나 따스해서 필리아를 가지고 싶었다. 라벨라처럼. 마레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그녀의 뒤를 쫓았다.
“....여기인가요?”
“왜, 적당한 가격으로 밥 먹고 싶은 거 아니었나요, 마레이 드 파웬 공자?”
필리아는 이동식 차량을 개조해 만든 식당 앞에서 짓궂게 웃고 있었다. 원하는 곳이라는 말에 어디를 말하는 건가 생각을 했다가, 사실대로 생각하면 조용한 모텔까지 생각해 버린 마레이는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뭐야, 어디를 생각한 건데?”
“모, 몰라요.”
필리아는 재미있다는 듯이 마레이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친다. 음식을 받아든 두 사람은 말없이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고, 그 뒤에야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졌다.
“뭘 생각한 건데?”
“...몰라요.”
“남자아이들은 항상 ‘그것’만 생각한다는데, 마레이도 비슷한 걸까?”
오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물론 마레이 나이대의 남자아이들의 주요 관심사가 ‘그것’이긴 해도, 항상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물론, 마레이의 일상이 필리아가 말하는 ‘그것’만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왜인지 아까부터 잔뜩 괴롭히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제대로 된 반항도 못 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드디어 고개를 치켜들고 흡혈귀 아가씨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