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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1화 〉익숙한, 그러나 낯선. (3) (181/341)



〈 181화 〉익숙한, 그러나 낯선. (3)

“저희에게 녹지 않은 동토가 의미가 있습니까. 수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리해서 동토 속에 군인들을 밀어 넣을 만큼 의미가 있습니까?”

마레이는 자신이 내뱉으면서 스스로의 발언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희생자는 안타깝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부로의 진격은 안 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었지만, 자신이 내뱉었다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감정을 거세한 것만 같은 너무 이성적인 대답이었다.

“그럼 우리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건가? 그 번영이 도달할 때? 아니면 거의 피해 없이 동토를 점령할 수 있을 때?”
“군은 타국이나 땅을 점령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제국을 외부로부터 방어를 위해 존재합니다.”

마지막 말까지 내뱉은 마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잘못 말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인 앞에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아니, 자신보다 연장자인 사람에게, 군인에게 가르치듯이 말할 주제는 아니었다.

“요즘 애들은… 우리 때랑 다르게 똑똑하군.”

노인은 식은 커피를 아무런 감정도 보이지 않은 채 마신다. 여전히 엄격한 눈은 여전히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감탄이나 칭찬은 아니었다. 그냥 빈말이었다는 것 정도라는 걸 왜인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노인은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슬쩍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기다리던 사람이 올 시간이구나. 요즘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서 묻다 보니 너무 오랜 시간 잡아두어 버렸구나.  먹고 싶은 게 있느냐?”
“괜찮습니다. 충분히 잘 먹었습니다. 부족한 의견이지만 참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인은 즐거웠다는 말을 다시 내뱉고 마레이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멀어지는 소년의 등을 보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말하는 게 꼭 줄리아를 닮아군. 무서울 정도야.”

노인은 중절모를 쓰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줄리아의 제자라고 했던가,닮은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배운것인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던 내용보다는 무척이나 유순했다. 조금 더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할까.

다만, 자신의 눈빛에 지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반짝이면서 또렷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와 열변을 토해내는 모습이 줄리아를 정말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줄리아의 아이라고 하면 더 믿음이  같았다. 슬그머니 등을 돌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소년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작게 웃음을 터트린 노인은 아무도 듣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마레이 드 파웬… 용사의 피는 묽어져도 용사인가.”

노인은 망설임 없이 광장을 떠났다.



마레이는 오늘 처음 만난 노인에게 자신의 의견이 옳은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제대로 된 평가조차 듣지 못한 것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아나 라벨라가 이야기해 준 것을 정리해서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제대로 이야기한  같지도 않았고.

말하다 보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자기  말만 한  아닌가, 잘못 말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으로 군인 출신인 노인에게 그렇게 당당하게 떠든 것인지 떠든 것인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생각보다 집에 도착한  늦어버린 마레이는 자신과 라벨라의 집 앞에 세워져 있는 고급스러운 마차를 발견했다. 녹색용과 검을 물고 있는 조악한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총독의 것이었다.

“공자께서 마레이 드 파웬… 맞으십니까?”

낯선, 그러니까 초면이라고 자신  수 있는 노인이 말을 걸어왔다. 오늘따라 노인들과 인연이 있는 것만 같았다. 먼지  점 묻지 않은 하얀 장갑으로 쥐고 있는 나무지팡이는  다듬어져 매끄러워 보였고, 단정하게 정리한 수염은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일절 들지 않고 기품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예? 아, 예….”

이런 사람이 왜 자신을 찾아온 것일까.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을 찾아온 노인이 내뱉을 다음 말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는 파웬가의 집사장을 맡고 있는 뎀버라고 합니다. 도련님을 모시러왔습니다. 총독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이는 연장자의 모습에 마레이는 화들짝 놀라 노인을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를 집사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웃는 모습이 너무나도 딱딱했다.

“공자께서는 친절하시군요. 파웬가의 입적하신 도련님께서 부디 잘 적응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아, 이런 잡담을 나누다가 시간을 잊어버리고 말았군요. 더이상 시간을 지체한다면 총독님께서 경을 치실 수도 있습니다.”
“아, 네… 가, 갈게요!”

딱딱한, 그러면서 부드러운 느낌의 노인이었다.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이 어디인가 어색해 보였다.

“라벨라님께서 양자를 들였다는 이야기는 예전에 들었지만, 찾아오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셨기에 이렇게 늦게 인사드립니다. 저를 뎀버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뎀버. 저는 마레이라고 불러주세요.”
“다른 가문과 다르게 파웬가의 집사장은 방계 같은  아닙니다. 로렌 님을 모시는 하인일 뿐이지요.”
“그래도, 어떻게 연장자에게…...”
“마리 님을 닮으셨군요. 이 노인네가 말년에 또다시 즐거운 일이 생기는  같아 다행입니다.  소소한 기쁨과는 다르지만 마레이님께서는 그렇게 하셔야만 합니다. 파웬가의 후계자는 남에게 고개를 숙이면 안 됩니다.”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총독부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좋아하시는 음식이라도 있으신지요? 요리장에게 지금이라도 연락해 준비하도록 시키겠습니다.”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는데요.”
“라벨라님의식사를 생각하신다면 약간 간이부족할 테니, 참고하라고 했습니다. 혹시 기호를  있겠습니까? 주방장이 단단히 기대하고 있답니다.”
“라벨라… 어머니께서 고기를 더 먹어야 된다고 하긴 했어요.”

이런 대화를 하나, 지나치고 있었다. 뎀버라 소개한 노인은 마레이가 경험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말이 많은  같으면서도 조용했다. 대화를 시작하는 건 뎀버였지만, 대화의 마무리는 계속해서 마레이였고. 대화의 주제는 뎀버가 이끌어가고 있었다.

“....도련님. 나이를 먹으니 쓸데없는 걱정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주제 넘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에….”

단어만, 문장만 놓는다면 기분이 나쁜지도 몰랐지만. 집사장이 말하니 그런 느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 들어야겠다라는 짧막한 생각만 남았다.

“현재 살아있는 로렌 님의 혈육은 라벨라님 오직 하나뿐이십니다. 혈육에게 관대한 총독님이시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무척이나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라벨라님께서는 단, 한 번도 로렌 님을 실망하게 한 적 없었습니다.”

뎀버는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마레이도 뎀버를 보고 있었지만, 볼  없었다. 분명 눈에 담고 있는데도 뎀버라는 인물을 알 수 없었다. 분명 보고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눈으로 그를 보고 있는데도, 머릿속에서 뎀버라는 인물을 그릴 수 없었다.

“도련님께서 마리 님을 닮았기에 저는 기쁩니다. 이제 죽을 날을 기다리는 늙은이는 그저 파웬가문에 도련님 같은 분이 나타났다는 게 얼마나 큰 흥복인지 감읍할 따름입니다.”
인식 왜곡. 머릿속
에서 그런 단어가 순간적으로 지나갔다. 일리엔이 가끔 스스로에게 걸고 마레이와 팔짱을 끼고 교내를 돌아다닐 때 쓰는 마법. 위험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무슨 색인지 인지할 수 없는 그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게 퍽이나 안심됐다. 에르덴이  팔찌를 믿는 것도 한몫했다만….

“그러기에 저는 두렵습니다. 혈육에게도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시는 로렌 님에게 도련님이 어떻게 상처 입을지 말입니다. 그러니….”

뎀버는 망설이는 듯 보였다. 이 노인은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묻고 싶었지만 몇 번이나입술을 달싹이는, 갑작스레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도 알지 못했기에 마레이는 그저 뎀버의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인내해주시길 바랍니다. 로렌 님은 파웬가의 가장 큰 어른이십니다. 그리고 인간의 생각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고룡(古龍)이십니다. 제가 이런 주제 넘는 말을 하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번도 고집을 부려본 적 없는 라벨라님께서 도련님을 양자로 들이신 이유가 있다고 늙은이는 생각합니다. 부디 총독님과, 라벨라님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마레이는 깨달았다. 뎀버라는 인물은 친절하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이 확 들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던 머리가 천천히 굴러가기 시작했다. 뎀버라는 집사장은 지금 경고하고 있는 거라는  깨달았다.

로렌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뎀버는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의 초점은 마레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레이는 묵묵히 뎀버의 시선을 받아냈다. 아니,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머릿속에는 그려지지 않는 그의 얼굴을 천천히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연장자라고 했지만, 초면인 자신에게 너무 무례했다. 하지만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마레이는 몇 번이나 자신에게 되물었다. 왜 자신은 화가 나지 않은 걸까. 단순히 나이 많은 노인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아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유는 짐작이 갔다. 로렌이 마레이에게 했던 말들. 초면인 마레이에게 거침없이 내뱉은 독설과 모욕. 그 기억이 스쳐 지나가자 마레이는 자신이 지금  이렇게까지 초연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로렌  파웬에게 아무런 기대조차 없었다.

총독이라는 이름에 이름 모를 설렘을 느낀 적도 있었다. 발테르의 주인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 적도 많았고, 로렌이 가끔 언급하는 할머님이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은 풍선마냥 거대하게 부풀어 있었다.

다만, 너무 크게 부풀었던 것이 문제일까. 아니면 로렌이라는 존재가 너무나 예리했기에 마레이의 기대를 펑 하고 터트렸는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없었다.

기대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선망이라는 말이 옳을까. 마레이는 뎀버를 보면서 슬며시 웃어 보였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단편적이었고, 비유하자면 유리 파편 같았다. 하나하나는 계속해서 기억나지만, 이어지는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면전에서 어머니의 욕을 하는 로렌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로렌은 어른이었다. 그것도 가문의 가장 큰 어른. 파웬가에 남은 사람은 로렌과 라벨라밖에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켜야 될 것은 지켜야만 했다. 로렌이 마레이를 보며 내뱉은 말들에 반발심리가 없다는 건 이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레이가 로렌과 싸운다는 것은 정말로 아니었다.

로렌에게 몸을 잔뜩 구부리고 버텨낸다고 무엇이 주어지거나, 생기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친어머니였던 마리  파웬이었다면 지금의 마레이의 결정을 이해해줄 터. 라벨라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라벨라가 어떻게 반응할까, 궁금했지만 애써 말하지 않았다.

혹여나 로렌의 편을 들지 않을까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자신때문에 라벨라에게 남은 하나뿐인 혈육인 로렌과 싸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커다랗기 때문이었다.

“공자께 무례한 말을 해버렸군요.”

뎀버가 품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들었다. 깜짝 놀란 마레이는 본능적으로 에르덴이 준 팔찌를 앞으로 내밀었지만, 칼의 방향은 마레이를 향하지 않고 뎀버의 손으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냈다.

“아…...”

간헐적으로 피가 뿜어지고 있었지만 마레이에게 튀거나 하지는 않았다. 바닥을 향해 흘러내리는 핏물에 마레이는 제대로 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핏물이 고인 정중앙에굴러다니는 새끼 손가락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네의 손가락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부디 용서하시길.”
“데, 뎀버….?”
“부족하시군요.”

노인의 칼이 스스로의 약지를 향했고 망설임 없이 잘라낸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피, 피가…!?”
“괜찮습니다. 공자께서는 무례한 노인네를 용서해주실  있습니까?”

마레이는 숨을 겨우겨우 헐떡였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보려고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려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뎀버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단검을 팔목에 가져다 대었다.

“제 오른손을...”
“그, 그만…!! 그만해요! 뎀버!!”

손이 덜덜 떨리고, 일어날 기운도 없었지만 마레이는손을 뻗어 단도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꼭 붙들었다. 딱딱한, 그리고 무척이나 차가운. 인간의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은 냉기. 화들짝 놀라 잠시 손을 떼버렸지만, 마레이는 뎀버의 오른손을  붙들었다.

“알겠습니다.”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익숙한 손길로 지혈해 나갔다. 이름 모를 쇠를 손에 돌돌 감자 더이상 피가 흘러내리지 않았다.

“피, 피가...”
“곧 멎을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뎀버….”

노인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없었다. 아니, 노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안개가  듯, 방금전까지 얼굴을 천천히그려나갔지만 욕지기가 치밀어오르는 자학에 전부 잊어버려고 말았다.

피릿한 피냄새에 구역질이 났고 기괴한 노인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마레이는 도망치고 싶었다.

“충언 하나로 손가락 두 개쯤은 무척이나 값싸다고 생각합니다.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라벨라님을 위해서 말씀드릴 때는 오른쪽 어깨까지 잘랐으니까요.”

라벨라는 이런 사람과 알고 지낸 것일까. 아니, 집사장이라고 하면, 라벨라가 어릴 적에 이런 사람이 지휘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살았다는 것일까. 마레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른 어깨까지 잘랐다는 말. 그리고 아까 느껴졌던 쇠의 감촉. 살짝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모습까지. 의수를 낀 노인. 정말로 총독관저로 가는 게 맞을까. 그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마레이는 불안한 듯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구 발테르 왕성의 정문이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 마차에서 뛰어내렸을 터.

“구 발테르의 왕성,  총독관저이자 총독성에 오신  환영합니다. 도련님.”

노인이 아니라 귀신이었다. 살아있되, 자신의 몸이 없는. 뎀버는 귀신이었다.

“그럼, 부디 총독님과의 만찬을 즐겨주시길…..”

마차가 성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문을 들어선 뒤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뎀버가 이끄는 대로 움직여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고 그리고 만찬이라고 부르기 아쉬움이 없을 정도의 음식들이 길게 늘어져 있는 테이블에 앉아있는 지금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다. 방금전 스스로의 손가락을 자르던 집사장을 떠올리자 참을  없는 현기증이 머리를 짓누른다. 폐가 꽉 눌린 것만 같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 그래도 억지로 억지로 숨을 이어나가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수밖에 없다.

-또각. 또각. 또각.

꽉 닫혀 있는 거대한 문 너머로 뒷굽의 소리가 마레이를 현실로 끄집어 내팽겨친다. 그제서야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아직도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십 개의 음식들,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연회 홀과 너무나도 기다란 테이블.

-또각. 또각. 또각.

문 너머로 들리는 구두 굽 소리는 정확하게,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로렌 일터. 마레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빠르게 반복하며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하는 게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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