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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화 〉익숙한, 그러나 낯선. (1) (179/341)



〈 179화 〉익숙한, 그러나 낯선. (1)

마레이가 란의 신사에서 학교로 되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점심시간이 가볍게 지난 시간이었다. 약속시간에 지각이라도 한 듯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홀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마레이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서툰 손짓으로, 서툰 몸놀림으로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받아주는 란의 포용에 취한 나머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린 게 컸다. 거기에 뒷정리를 도와줘야 했는데, 오후에 약속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자리를 떠나버렸다.

지금쯤이면 임신한 것처럼 잔뜩 부풀어 오른 배를 끌어안으며 정액을 빼내고 있을 란을 생각하니 방금전까지 마음껏 사정하며 쾌락을 탐하던 페니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치켜  것만 같았다.

끈적한 욕망이 마레이의 발목을 슬며시 잡아당기고 있었지만, 마레이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사람들처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부풀어 오른 란의 배를 눌러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정말로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다음에는 꼭 스승님의 배를 발로 눌러봐야겠다는 반인륜적인 생각도 자연스럽게 해버린다.

발테르의 학교는 무척이나 넓었다. 슬슬 학교에 적응하고 있는 마레이였지만, 미칠듯한 학교 크기에는 언제쯤 적응할 수 있는지 걱정부터 앞서기만  뿐이었다. 셀린과 만날 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셀린과 제대로 된 연락처를 교환한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마레이가 셀린 페르디낭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녀가 18살. 아니, 제국 나이로 17살이라는 점. 그리고 새벽의 호수가에서 맡을 법한 청아한 향이 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업이 있는 시간도 아니었고집으로 돌아가도 상관 없었다. 란에게 미안한 짓을 해버렸다는 걸 뒤늦게 깨달아 버렸다. 시간표대로 생각하다보니, 금요일 오후는 셀린 선배랑 만나야 한다. 멘토 관련해서! 라는 흐릿한 기억으로 나와버렸다.

이건 란님의 잘못일 수도 있었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자그마한 몸으로 유혹한 게 잘못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럼에도 마레이는 애써 셀린을 찾기 위해서 지난번 그녀와 만났던 예쁘게 꾸며놓은 정원을 찾았고, 등이 땀으로 범벅이 될 때쯤에서야 이전의 그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예상외로 셀린은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구나.”

셀린을 기다릴 겸, 책을 읽고 있던 마레이는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불꽃이 바로 앞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태워버릴 것 같은 아주 뜨거운 불꽃. 갑작스레 보이는 풍경에 마레이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멍하니 불꽃의 일렁임을 보았다. 그건 무척이나 신성했지만, 불경해 보였다.

“괜찮아? 마레이 드 파웬.”
“천사님..?”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리자, 방금전까지 보였던 거대한 불길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불꽃이 타오르던 자리에는 천사님이 서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불이라는 개념을 인체로 형성해버린 것 같은 이질감. 하지만 그 이질감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응? 틀린 말은 아닌데…. 전에 샤샤라고 소개하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냥… 날개를 보니 저도 모르게.”
“하하하.. 뭐 천사는 맞으니까. 천사님이라 불리면 부끄럽지만.”

고개를 숙여 마레이와 시선을 맞추던 마르크레는 허리를  피며 마레이를 내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와 노을보다 붉게 타오르는 적발은 사람을 홀리는 듯한 묘한 마력이 있었다.

“마르크레 선생님은...”
“샤샤 선배라 부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편하게 말하렴, 편하게.”

샤샤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외견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부드러운 느낌이 무척이나 편안했다. 베일을 쓰지도 않은 채, 하얀색 수녀복을 입은 샤샤의 등 뒤로 성인 남성의 키만 한 날개가 장신구처럼 걸쳐저 있었다.

“셀린 녀석 또 안 왔지?”
“또는 아니고.. 아직 안 왔어요.”

그거나 그거나. 샤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마도 바쁜 일이 있는  같네. 할 일없으면 내가 재미있는 데 데려다줄까?
“네.”

샤샤의 제안에 마레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시골 촌놈에서 벗어나지 못한 마레이에게 있어서 누군가 소개해주는 발테르는, 학교는 여전히 신기한 것투성이였다.

호기심에 비해 소심한 성격에 묻지도 못 하고 지켜보는 것들이 가득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성가대 견학이야. 자, 빨리 책 챙기고 가자. 혼자 있는 모습을 보면 일리엔이 분명 뭐라고  껄?”

일리엔은 보기랑 다르게 화나면 무섭거든. 샤샤는  적이게 웃어 보였다.

샤샤를 뒤쫓아 도착한 곳은 보는 사람이 경건해질 정도로 아름답게 지어진 성당이었다.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십 수 미터가 되어 보이는 높이에도 단층으로 이루어진 신기한 건물이었다.

오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문 너머로 맑은 목소리들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우리가 조금 늦었나 보네.”

한쪽 눈을 찡긋 감은 샤샤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린 나무문 사이로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고대어를 읊으며 화음을 만든다.

“와…..”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가 하나가 된 듯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해할  없는 단어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고, 테너의 목소리가 성당 안을 가득 메우며 그 뒤를 따라 낮은 음역의 화음들이 뒤따른다. 스테인 글라스 사이로 흐르는 여러 색의 빛의 향연에 매혹된다.

“재미있지?”
“네!”

눈을 반짝이며 작게 박수를 치는 마레이의 모습에 샤샤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가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다, 도약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조금씩 잦아든다. 그리고 중앙으로 금색이 드문드문 박혀 있는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봐봐, 저 아이가 메인 소프라노야.”

마이크 앞에 서 작게 숨을 고르고 있는 갈색 머리 소녀. 어디인가 낯이 익은  같은 모습에 마레이는 조금 더 앞으로 다가가 성가대의 메인 소프라노의 얼굴을 보았다. 포니테일로 묶은 갈색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고집 있어 보이는 얼굴.

“길리아 마리타…?”
“아는 사이야?”
“네, 아… 그 친척이에요.”

우연이 다 있네. 성가대의 화음 속에 파묻혀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중얼거린 샤샤는 길리아를 보고 있었다. 미래의 장교를 꿈꾸는 소녀. 딱딱한 군인이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성가대 중앙에서 소프라노 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길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감탄 섞인 목소리를 낸다.

“잘… 부르네요.”
“아직 서툴지만 말이야. 지금도 조금씩 조금씩 음역대가 불안해.”

마레이가 듣기로는 아무런 이상함이 없는 성가였지만, 샤샤는 탐탁지 않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이하운 같은 느낌인 줄 알았는데, 묘하게 엄격했다.

“저 아이도 그걸 잘 알고 있고. 내가 나서야겠네. 어디로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야 해?”

신신당부를 하는 샤샤의 모습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착한 아이네하고 방긋 웃어 보이는 샤샤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붉은 속눈썹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완벽하게만 들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천천히 방향을 잃고 성가가 성스러움을 잃고 평범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길리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성가대의 인원들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잔뜩 퍼진다.

“~♬”

성가대 앞으로 다가간 샤샤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로 노래를 이어나가고, 길리아의 얼굴에는 화색이 띤다. 중앙 마이크에서 멀어지려는 길리아의 손목을 잡고 마이크 앞에 세운 샤샤는 길리아를 재촉하듯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를 키워나간다.

마른 입술을 핥은 길리아는 샤샤의 얼굴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샤샤를 따라 사람이 내는  가능한가? 생각이 들 정도의 고음역대의 목소리를 내며 성가를 이어나간다.

스테인 글라스 위로 스며드는 빛이 성당 안을 가득 비추고,  가운데에 샤샤가 서 있다. 두 손을 정갈하게 모아 깍지를 낀 채로 소리를 키워나가는 샤샤. 천천히 움직이는 천사의 날개가 크게 펼쳐지며, 깃털이 흩날리다 하늘로 천천히 떠오른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이곳저곳으로 흩어지는 하얀 깃털은 스테인글라스의 색을 따라 여러 색으로 반짝인다. 주인공. 샤샤를 보는 마레이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샤샤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볼듯한 그런 주인공이었다.

아름답고, 경건하고, 또 보는 사람의 눈을 떼어낼 수 없을 것 같은 모습. 에르덴에게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그녀보다는 천사의 날개를 펄럭이며 성가를 부르는 샤샤의 모습이 더 성녀 같았다.

화음을 넣는 성가대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이제는 소리를 찾아볼 수조차 없게 잦아들고 있음에도 샤샤는 더욱 높게, 그리고 크게 성가를 이어나갔다. 그 어떤 도움도, 조력도 없이 혼자만이 경건한 성가를 완성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또 신기했다. 엘프도, 수인도, 흡혈귀도 모두 같은 세상의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노래를 부르고 있는 샤샤의 모습은 마치 책의 한 장면을 앞에서 펼쳐놓은 것만 같았다.

현실성이 없다고 해야 할까. 마레이는 홀린 듯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 울리는 한계까지 올라간 높은 음역대의 목소리가 거침없이, 그리고 힘있게 터져 나온다.

샤샤의 모습에  수 없는 몸의 떨림이 느껴졌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목소리를 담고 싶을 뿐이었다. 시작했을 때부터 끝까지. 옆에 있는 길리아의 목소리는 귓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샤샤의 목소리는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나쁘지 않았지?”
“아, 네? 네? 아, 네. 좋았어요. 정말….”

누군가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코앞에 샤샤가 있었다. 홀린 듯 멍하니 목소리를 집중하고 있었던 게 기억이 났는데 어느새 성가는 끝나 있었다.

“그렇게 칭찬하면 조금 부끄럽네.”
“진짜 대단했어요. 와, 저 성가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샤샤 선배의 목소리를 들으니까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서 정말이지...”

평소에는 쑥스러워 누군가의 칭찬이 서투른 마레이였지만 지금만큼은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말로 샤샤에게 감탄을 내뱉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지금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  수 없어서 횡설수설 말을 더듬는다.

“그만, 그만. 그렇게 칭찬하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겠잖아..”
“하지만….!”
“길리아! 네 친척 좀 말려봐! 칭찬해주는 건 고마운데 너무 과해!”

길리아는 부끄러운 듯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보니 어느새 성가대 사람들이 마레이를 잔뜩 둘러싸고 있었다.

“얘가 견학 온 애죠?”
“그래, 마레이  파웬. 길리아랑 친척이라고 하더라. 나도 모르고 데려왔지만 말이야.”
“파웬이면 총독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이어지는 질문들. 교실에서는 라벨라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면, 이곳에서는 로렌에 대한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로렌 님과는 안면이 없어서. 여러분보다 제가 그분을  모를 거에요.”

라벨라에 대해서는 성감대가 어디이며, 엉덩이 어디에 점이 있다는 것까지 알고 있는 마레이였지만. 로렌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번에 처음 만났을 때 보았던, 사람을 베어버릴 것 같은 눈만이 또렷하게 기억났다.

“견학 온 애 너무 괴롭히지 마. 길리아, 친척이 괴롭힘당하는데 안챙겨줄거냐?”
“아, 네! 여, 여러분 너무 그러지마세요...”

길리아 마리타, 반에서는 딱딱한 느낌이었는데, 성가대에서는 이런 느낌이었구나. 짧은 생각이 들었다. 길리아가 말리자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곧이어 잦아들었다.

“부르는 사람이 부끄러울 정도로 빤히 보는데. 성가에 관심 있으면 한번 배워볼래?”
“네?”
“소프라노나 테너같이 돋보이는 부분은 아니지만 화음을 넣는 정도면 한 번 해보는 것도 쉽고 재미있거든. 학기 초에 견학 오거나 소개받아서 오는 애들도 해보는 거니까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 아, 싫으면 안 해도 돼.”

부담 주고 싶지는 않거든. 샤샤가 두 손을 흔들며 조심스레 마레이를 대했다. 주변 사람들은 지금 상황이 익숙한 듯이 마레이를 보고 있었고, 길리아는 눈짓과 입 모양으로 해보는 게 어떠냐는 듯 신호를 주고 있었다.

“그… 제가 노래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어서.”
“아, 네. 성가  개는 알고 있어요. 제가 살던 곳에도 예배드리는 곳이 있어서.”
“제일 좋아하는 곡이 뭐야? 음… 이 곡이면 다들 악보는 필요없겠네. 바로 하자, 불러 본 있지? 뭐, 그럼 화음을 넣는 건 어려운 곡이 아니니까. 그럼 한 번 해볼까?”

샤샤가 주변을 흘깃 보자 성가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마레이는 샤샤가 건네준 악보를 보고 더듬더듬 주변 사람들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맞아? 음.. 처음인 거 같긴한데. 목소리가 너무 좋은데. 엘프가 부르는 줄 알았네. 남자애가 어떻게 그런 목소리가 나오는 거지…?”

노래가 끝나고 샤샤는 놀라운 듯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성가대 사람들도 옆에서 변성기가 오지 않아서 그런가 목소리 톤이 엄청 높네부터 시작해서, 재능이 있다는 둥 마레이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았어. 관심 있으면 성가대 연습에 참여해도 될 정도야. 조금만 갈고 닦으면 변성기가 온다고 해도 훌륭한 테너가  거야.”

샤샤의 끝도 모를 칭찬에 마레이는 얼굴을 잔뜩 붉힌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성가를 같이 불러보고 싶었지만, 과할 정도로 칭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마레이는 조금 떨어져서 그들의 연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길리아가소프라노의 하이라이트를 부르다 실수할 기미가 보이면 샤샤가 자연스레 이어 부르며 노래를 완성해나가는 모습.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길리아와 그녀를 보면서 기쁜 듯 날개를 흔드는 모습에 마레이는 연습이 끝날 때까지 샤샤에게서 눈을 떼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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