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적응 기간(4)
자신이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준 필리아의 말이 계속해서 마레이의 머리에 맴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하운의 물음에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래. 수업 잘 받고, 내일 만나자. 오늘은 내가 크게 실례했어. 죄송했습니다. 마레이 드 파웬.”
이하운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하운 교수님. 저는 기쁜걸요. 므랑데에게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해요. 저도 이하운 교수님과 같은 선생님이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 부끄럽게 하네….”
이하운은 뺨을 긁었다. 마레이는 진심이었다. 물론 자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쌍둥이 엘프들은 선생이라기보다는 암컷에 가까웠다. 줄리아는 멋진 여인이었지만, 솔직히 선생님으로서 어떠냐고 물으면 아직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첫날에 무방비한 자궁 안에 잔뜩 질내 사정을 하느냐 수업을 듣지 못했고, 그리고 다음 수업은 북부 전선에 파견을 나가느냐 수업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음에는 북부에서 돌아온 줄리아와 육체로 대화를 나누고, 무어라 이야기할 틈도 없으니 에르덴에게 납치(?)되어버렸으니까.
“너라면 달라질 것 같아. 믿고 싶어. 므랑데는… 내 아이 같거든.”
하복부,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배꼽 밑. 짐승에게 뜯겨진 것 같은 상처가 드문 보이는 부위를 매만진 이하운은 무엇인가 골똘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하하, 내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야, 꼬맹이. 꼭 나와주는 거다? 알겠지? 나 믿고 있으니까!! 아프더라도 나와! 병원에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다, 간호까지 해줄게!! 진짜, 진짜 못 나올 것 같으면 미리 연락하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이하운이 떠나고 곧이어 수업의 예비종이 쳤다.
강의실이라 불리는 수련장에 도착한 것도 종이 한 번 더 친 이후였다. 나기사는 시간엄수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하운을 생각하는 것인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발의 보폭은 자세가 무너지지 않은 정도….. 파웬 학생은 엘프와 연이 있나요?”
“예? 아, 네...”
갑작스레 나기사의 질문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를, 그것도 쌍둥이 엘프를, 그것도 이 학교의 교수로 있는 크사크루 자매를 애완 동물로 기르고 있었지만. 그것도 연이라면 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가벼운 움직임이 엘프를 닮았네요. 나쁘다는 건 아니고…. 신기하네요. 그들의 움직임이라는 건 선천적인 것들이라 따라하기가 쉽지 않은데. 아니, 이건 따라 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들과 같은데…..”
엘프들 특유의 발걸음. 나기사의 말에 의하면 보법이라고 부르는 발을 딛는 행동이 엘프를 무척이나 닮았다고 말했다. 이드리엔이나 일리엔에게 그런 걸 배운 적이 없었기에 마레이는 그런가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시간이된다면 활을 꼭 배워보세요. 순간 집중력은 무척이나 좋습니다. 놀라울 정도에요. 특히 찌를 때, 환상적입니다. 창을 배워도 범인 이상의 재능을 보여주겠군요.”
동체 시력이나 유연함이라든지 민첩한 움직임에 칭찬을 하는 나기사 덕분에 잠시동안은 자신이 검에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기사의 칭찬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우쭐해지는 기분에 쑥스러워 웃어버렸다.
“다만, 검은…. 배우더라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찌를 때는 분명 엄청난 집중력인데, 이상하게 벨 때는...”
제 덩치에 걸 맞는, 그러니까 약골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 그리고 특정 부분에서 집중력이 문제점이라 지적하는 그녀의 말에 다시 침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력은 지속적인 연습으로 늘릴 수 있습니다. 찌를 때의 집중력은 확실히 독보적이니, 요령만 터득하면 전반적인 검술에서 깜짝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줄 테니까 실망하지 마세요. 물론, 요령이라는 게 다음 수업일 수도 있고, 평생 안 될 수도 있지만...”
나기사 교수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하늘로 치솟다가, 다시 땅으로 처박히는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아마, 서투른 게 아닐까. 마레이는 조심스레 추측하고 싶었다.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일은 무척이나 고되었지만, 시간만큼은 무척이나 빠르게 흘렀다. 익숙해진다는 말을 하루 만에 쓰기에는 부족한 게 많았지만, 기본적인 동작을 배우고 계속해서 교정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마레이도 주변을 신경 쓸 수 있을 정도의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자, 위아래로 베어낼 때 손목의 움직임을 잘 보세요. 빳빳하게 굳으면 제대로 된...”
검에서 시선이 떨어지고 나기사의 가느다란 손목이 보였다. 슬그머니 근육이 올라온 팔은 커다랗지도, 두껍지도 않았다. 건강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검을 쓴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호리호리한 몸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도 아니었고, 타고난 근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흔들림 없는 눈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몇 번이나 ‘다시 해봐요’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모습에서 그녀가 검사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하운이 즐겨 입는 운동복과 다르게 두꺼운 천으로 만든 도복을 입고 걸음걸이마다 마치 미끄러지듯이 움직이는 모습에서 그런 생각이 이어질 뿐이었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검 끝에서는 이름 모를 꽃향이 났다.
나기사가 신기한 모습으로 움직이며 검을 휘두를 때마다 붉은 꽃 아래로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집중하고 있나요?”
“아, 아, 그게. 그게….”
무엇인가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등골까지 올라왔던 소름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어느새 꽃향은 사라져 있었다. 꽃비가 내리던 풍경이 사라져 있었다. 자신은 무엇을 본 것일까. 마레이는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나기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저는 기본을 잡아줄 뿐이고, 전반적인 모든 걸 해줄 수는 없습니다. 개인의 성취는 개인의 노력에 달려있다는 걸 명심해주세요.”
“죄송합니다.”
엄격한 나기사의 말에 마레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동안이지만 나기사가 마레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였지만, 고개를 숙인 소년이 볼 수 있는 웃음은 아니었다.
“.....고생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시간이 넘게 남았지만 나기사는 일방적으로 수업 끝을 이야기했다. 그리고나서도 검사로서 가져야 되는 마음가짐을 20분 정도 이야기한 뒤에야 마레이를 풀어주었다.
검가 마음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전문가가 그렇다면 그렇다고 들어야 된다고 믿는 마레이였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검의 마음, 자신의 마음, 그리고 스스로를 닦는 것. 좋은 말들이었다. 이해는 못 했지만….
검을 배우는 동안은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서야 아가노 나기사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두꺼운 옷에 몸의 윤곽이 그려지지 않았지만, 중간중간 시범을 보여줄 때마다, 맞닿는 도복 위로 드러나는 가녀린 몸매, 그리고 그런 몸매와는 연관이 없어 보일 정도로 도복위에 슬그머니 드러나는 단단해보이는 허벅지의 윤곽. 그리고 도복이 움직일 때마다 존재감이 드러나는 가슴 등이 떠올랐다.
“마레이, 정신 차리자…..”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마레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아름다운 여성들과 매일매일 육욕을 풀고 있는 마레이였지만, 자꾸만 다른 사람. 그것도 미인들에게 시선이 가는 것에 무척이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라벨라에게도, 애완 동물인 쌍둥이 자매에게도, 줄리아에게도, 에르덴에게도 모두.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짐승 같은 욕구가 멈추지 않았다. 솔직히 항상 자신의 육욕을 풀어줄 사람이 있길바라는 못 된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학교에 갈 때, 이드리엔의 차를 타고 일리엔에게 봉사를 받는 것도 생각해버렸다. 물론, 해달라고하면 해줄 것 같긴 한데….
부족한 자신을 사랑해주고 또 사랑을 갈구하는 미녀들에게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는 마레이에게 더 다른 사람에게 육욕을 느끼는 것은 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일이라 본인을 타이를 때마다, 저 사람을 눕혀 자신의 페니스로 찔러 올리면 어떻게 울부짖을까 생각이 들면 자신이 한심스럽게까지도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서도 아직까지시간은 남아 있었다. 줄리아보다 먼저 그녀의 연구실에 가서 깜짝 놀라게 해줄까 생각이 들어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어디서인가 낯선 소리가 들렸다. 아니, 낯설지 않았다. 그리운 방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방울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딸랑….. 딸랑….
길고, 그리고 묵직하게 퍼져나가는 소리가 환청일리가 없었다. 길을 지나치는 학생들은 무심하게 제 갈길을 갈 뿐이었다. 한참동안 주변을 살펴본 마레이는 이 소리를 자신만이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두리번거리는 자신을 보고 무엇을 찾느냐 묻는 친절한 학생에게 방울 소리가 안 들리냐고 물었다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듣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밖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환청이라 불러야 하는 걸까. 애써 무시하고 자리를 움직이면 될까 생각도 들었지만, 이상하게 방울 소리가 익숙했다. 친숙하고 또, 그리웠다.
발이 제멋대로 앞으로 나아갔다. 풀 숲밖에 없었다. 그래도 무작정 방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무를 지나치고 경사로를 지나쳤다.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알 수 없었다.
멍하니, 그리고 당연히.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붉은 도라이가 보였고,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어느새 신사에 도착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셀 수 없는 많은 붉은 색 토라이가 산 아래로부터 이어져 있었다.
-딸랑…. 딸랑… 딸랑….
방울소리가 점차 커졌다. 아니, 가까웠다. 토라이를 지났다. 란이 있는 곳이었다.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더욱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신기하게 생긴 건물을 지나치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서, 마레이의 가슴에 간신히 올 것 같은 꼬마여우 소녀가 방울이 잔뜩 달린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고 있었다.
-쿵…! 딸랑... 쿵…! 딸랑…. 쿵…! 딸랑….
기도를 드리는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닥을 두드리는지팡이. 그리고 한 박자 느리게 이어지는 방울소리가 그곳에서 났다. 마레이를 이끄는 방울 소리가 지팡이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방울소리가 숲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리고 산을 타고 다시 되돌아왔다.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방울소리는 점차 희미해지다, 새로운 소리에 덧씌어진다.
란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의 스승님. 그리고 로렌이 왜인지 모르게 마레이와 이격시키려는 소녀. 소녀라는 말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먼 나이겠지만, 마레이가 보기에는 마레이보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란에게 느끼는 감정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금색의 짐승.아홉 개의 꼬리를 달고 있는 작은 여우 소녀. 그러면서어머니의 스승님. 작은 몸에서 나는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달콤한 향. 맨들맨들한 피부는 조약돌의 표면 같아, 물을 먹으면 빛을 반사할 것만 같았다.
맨살을 씹어보고 싶었다. 귀를 만지고, 꼬리를 끌어안고 품에 꼭 끌어안고 싶었다. 마레이는 고개를 거칠게 털어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스승님에게, 그런 사람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불경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기에, 불경하기에 더더욱 매혹적이게 다가왔다.
마레이가 지척에 왔음에도 란은 무엇을 그리 집중하는 것이 자신의 키보다 한참이나 큰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붙잡고 대지를 두드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휘청일 것 같은 작은 몸이었지만, 대지 위에 당당히 서 있었다. 아니 땅을 짓누르고 있었다. 무척이나 작은 몸이었지만, 그 어떤 존재보다 무겁게, 그리고 강하게 땅을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무엇인가를 감추듯. 그렇게.
마레이는 자신보다작은 여우 소녀의 모습에서 거대한 산맥을 보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아니, 산맥이 아니라 거대한 늑대였다. 여우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보일 것 같은 거대한 존재가 마레이 앞에 서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존재를 만지자, 거대한 짐승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란의 어깨 위로 마레이의 손이 놓여 있었다.
“로렌, 제가 의식 중에는….. 마, 마레이??? 어, 어떻게 여기를…”
언짢은 듯 인상을 찌푸리는 란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방해하는 존재가 누군인지 확인하자마자 금색 눈동자가 이전에 없을 정도로 크게 떠졌다. 반쯤 벌린 입속에서 부드러워 보이는 설육이 보였다. 치아 위에 가지런히 놓인 분홍색 살덩어리에서 눈을 떼어내기 힘들다.
“방울 소리가 들려서 쫓아오니까. 여기였어요. 그, 죄송합니다… 올려고 했던 건 아니고… 방울 소리가 익숙해서, 그게 너무.. 뭔가, 그리워서...”
“그, 그래… 그렇구나...”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 란이었다. 할 말은 많아 보였지만, 당황한 듯 그녀는 입을 다물고 조심스레 마레이를 볼 뿐이었다. 하얀 뺨을 옅은 분홍색으로 물 들 것만 같았고, 호흡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숨결이 미묘하게 따뜻했다.비틀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그녀를 끌어안듯 붙잡았다.
“란님?”
“으읏…!”
란을 부축하듯 옆에 있던 마레이의 말이 란의 귓가에 직접적으로 속삭여졌다. 귀엽다고 하기에는 열락이 담긴 뜨거운 신음소리가 란의 입을 헤집고 나왔다. 란은 놀란 듯 꽉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고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린다.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모습은 큰 실수를 저지를 아이와 같았고, 애달픈 소리로 울부짖는 침대 위의 여인의 모습과도 같았다. 두 가지 모습이 비춰보이는 란의 모습에마레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