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51화 〉적응 기간(3) (151/341)



〈 151화 〉적응 기간(3)

병합한 국가들에 차별을 엄격히 금하는 황제였지만,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남아있는 이름만 제국이라 불리는 로우 제국민에 대한 차별을 묵인하고 있었다. 황제가 보여주는 방향성은 제국의 방향성과 동일했고, 바로 옆에 존재하는 제국민에게 공공연한 차별이 행해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국가의 사람에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저 멀리 떨어진 동대륙은 어떠할까.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다. 대놓고 욕을 하거나 시비를 걸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의 시선과 수근거림속에서 의연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가노 나기사였다. 본제국도아니고, 로우 제국 출신인 역사학자와 결혼한 동대륙인.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마레이였지만, 라벨라의 가정교육은 마레이에게 이것저것 지식을 잔뜩 주입하고 있었다. 반대급부로 모친의 자궁안에 정액을 잔뜩 주입하는 완벽한 교환이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무심한 것은 무척이나 다른 이야기였다. 차오르는 숨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강의실 문을 열자마자, 멍하니 강의실의 중앙을 바라보는 아가노 나기사의 모습에 그 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레이 드 파웬입니까? 늦으셨군요.”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대륙 공용어. 그럼에도 또박또박 발음하기에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들을  없을 정도로 미약하게 어눌한 발음. 전에 보았던 것처럼 도복이라고 불리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아가노 나기사는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다른 교수들처럼 딱딱하게 수업을 진행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시간은 준수해주시길 바랍니다.”

태양이 내리쬐는 아래에서는 갈색 끼가 보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둥글둥글한 얼굴 형태와 다르게 날이 선 검처럼 날이 선 눈매가 인상적인 미녀였다. 날카로운 눈매는 하늘을 비행하는 맹금류를 떠오르게 했다.

처음 라벨라를 만났을 때까 떠올랐다. 미인 양어머니라는 생각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자신을 훑어보는  눈동자는 산의 왕을 닮은 것만 같았다. 전혀 다른 사람이었지만, 예리한 눈매에 오히려 마레이는 친근감을 느꼈다.

“주의하겠습니다.”
“예, 대답은 마음에 드네요.”

나기사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라벨라나 일리엔이 바라보는 애정 어린 눈초리가 아니라 무엇인가 분석하려는 듯한 꼼꼼한 눈초리는 살겹이 하나하나 벗겨지는 듯한 착각이 들 것만 같았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 학교에서 누구를 처음 가르치다 보니... 너무 의욕이 앞선 것 같군요. 검도 수업… 아, 정정하겠습니다. 기초 검술 수업이기도 하니까 일단 몇 가지 질문을 할게요. 검을 배운  있습니까?”
“배운 적은 없어요.”

사람의 시선이 움직일 뿐이었지만, 직접 매만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력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주 보아온 일이었지만, 단지 시선만으로 물리적인 접촉의 기분이 드는 것은 또 처음이었고, 낯설었다.

“검을 휘두르거나 사용해본 적은요?”
“그.. 친구들끼리 전쟁놀이 같은 거 할  해봤는데...”
“완전히 처음이라는 말이군요. 혹시 가문에서 검술 같은 게 있습니까?”
“......에.. 모르겠어요. 있을 것 같기는 해요… 배운 적이 없어서...”

라벨라가 검을 쓰는 모습을  적이 없었다. 벽장에 걸린 명검이라 불리는 것들이 있는 것과 마레이와 관련된 것이 아니면 실용적인 물건 이외에는 거의 사지 않는 라벨라의 특성을 생각해본다면 있을지도 몰랐지만 배운 적은 없었다.

“제국의 검술과는 다르게제가 알려주는 것들은 많은 차이점이 있어요. 근본적인 차이라고 해야 될까.. 무엇이 우세하다 무엇이 좋다라고  수 없지만, 시작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검도 하나의 도구입니다. 동대륙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만으로 사용되었고, 서 대륙은몬스터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도구로 발전되었기에 꽤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 둘 배우다 보면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이 이야기는 차후에 했으면 좋겠습니다.”

존대였지만, 엄연히 선을 긋고 있었다. 더이상 묻지 말라는 일종의 명령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화가나거나 반발심이 들지 않은 신기한 어투였다.

“가문의 검이 있다면 제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검사로서의 마음가짐과 기본적인 자세뿐입니다. 물론, 기초 검술 수업이기에 이게 맞기는 하지만….”

나기사는 말끝을 길게 늘어뜨렸다.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흰목덜미에 자꾸만 시선이 가서 마레이는 애써 그녀의 코와 입 주변에 시선을 묶어두었다.

화약 무기로 수많은 것들이 바뀌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뀌지 않는 것은 초인들의 존재였다. 화약 무기가 제한된 법칙 안에서 굴러가고 있었지만, 초인들이 쓰는 힘은 그 밖에 있었다. 마레이도 그저 일리엔에게 배운 이야기이기에 제대로 된 것은 알지 못했다.

“검을 쥐는 파지법과 걷는 법,  쉬는 법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을 배운다 생각하고 하시는 게 좋을 것입니다. 검을 이렇게 쥐어보세요.”

강의실. 허수아비가 잔뜩 서 있고, 타격대가 중간중간 비치되어 있는 넓은 공터가 펼쳐진 장소를 강의실이라 부르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마레이는 나가사가 가져다준 목검을 쥐어보았다.

“핵심은 검이 흔들리지 않게...”

중간중간 마레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오고갔지만, 중간중간 재점검을 통해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의 뜻이라도 전부 전달한 나기사가 말이 끝난 것은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릴 무렵이었다.

그리고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리고, 노란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기사 교수님, 학생 좀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쉬는 시간인데 마음대로 하시지요. 제시간에만 돌려보내 주세요. 이하운씨.”

이하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몸에 착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빠르게 마레이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자신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우리 밖에서 잠시 이야기좀 할 수 있냐? 맛있는거 사줄 테니까 시간좀 내줘라.”
“네? 아, 네….”

갑작스레 나타난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이하운의 손에 이끌려 교실밖으로 강의동 주변에 있는 카페에 앉혀지는 것도 순식같이었다.

“뭐 마실래?”
“아무거나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인데. 제일 비싼  두 개 줘. 갑자기 불러내서 당황스럽지?”

이하운이 옆 머리카락을 빙빙 꼬고 있었다. 자신도 지금 이 자리가 편하지 않은지 조금은 초조한 기색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세요?”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조금 이상하게. 아니 진짜 이상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개인사정이라 생각하고 이해해줘. 나도 지금 어린애에게 이런  하는 게 진짜 창피해서 죽을  같거든?”

이하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라든지, 선생님이라기보다는 누나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 더 그녀를 가깝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니까… 말씀해주세요.”
“그러면… 말한다? 아우… 므랑데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좀 물어봐도 되냐?”

“멜란이요?”

이하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상기한 붉은 뺨과  다물어진 입술이 보였다. 방금전에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횡설수설하던 모습은 거짓말처럼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무표정으로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레이도 위아래로 잡아당겨 찢어놓은 듯한 동공을 담아낸 금색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을  없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왜 므랑데에 대한 이야기가 이하운의 입에서 나왔는지 파악할 수조차 없었다.

이하운이 왜 이런 말을 꺼낸 것조차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결론은 같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마레이.”

이하운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그녀가 살짝 인상을 찌푸릴 뿐인데도 마레이는 숨이 턱 막히는  같았다. 아니, 숨을 쉬는 게 버겁다고 느끼고 있었다.

온몸의 소름이 돋았다. 동시에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지는 듯한 환영이 보인다.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움츠렸고, 워낙  움직임에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길게 끌리며 괴로운 울음소리를 크게 터트렸다.

이하운이 마레이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 착각이었다. 이하운연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만 마레이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팔다리가 묶인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레이의 목에 걸린 목걸이가 부르르 떨리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적의, 살의, 각종 부정한 감정들이 마레이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온몸의 소름이 돋았다. 여름이 가까워지고 있는 날씨였지만 한겨울보다 더욱더 아리게 냉기가 마레이를 찌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한순간 모든  사라졌다.

“.....감정조절조차 못 하는 거냐, 이하운. 하, 제기랄…. 마레이 드 파웬. 이건 내가 잘못했다. 미안해.”

이하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마레이에게 하는 욕설이 아니라 자신에게 내뱉는 가차 없는 욕설들이 잠깐이나마 이어졌다.

“.....그래도 중요한 이야기라서 그래. 더이상 누구랑도 싸우지 않는 내가 진심이 될 정도로 중요한 이야기.”
“전 잘 모르겠어요.”

이하운은 마레이가 귀엽다는 듯이, 아니. 같잖다는 듯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스스로의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무엇인가 잔뜩 억눌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잘 모르겠다는 건, 조금은 알고 있다는거라는 거 알고 있냐?”

마레이는 이하운의 노랑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을 읽을  없는 그녀의 모습에 눈동자를 보았지만,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레이는  므랑데의 이야기가 갑자기 나왔는지, 이하운이 갑자기 자신을 찾아왔는지에 대해서 알 수 없었다. 다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므랑데와  일인데.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인데, 왜 이하운 교수님이 이런지 모르겠어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고, 내가 오지랖 부리는 것처럼 보이.. 오지랖을 부리고 있네. 그래, 그건 인정할게. 그냥, 딸아이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어머니라고 좀 이해해줄  있냐?”

이하운도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말하는 중간 마레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계속 시선을 피한 채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다만,  무엇보다 진정성 있게 느껴졌다.

입술을 악물고 겨우겨우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모여  문장이 되자 마레이도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갑자기 드는 의문에 말을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므랑데의 어머니셨어요…?”
“아니, 아니. 하프도 아니고 종족 자체가 다르잖아!! 그냥… 그냥…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해주고 말해주면  되는 거냐.”

이하운은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해주지 않아도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표정을 읽을  없는, 그녀의 눈동자에 흘러나오는 감정이 무엇인지 하나도 알  없어도. 이상하게 그렇다고 마레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하운 교수님이 멜란을 엄청 걱정하고 돌봐주시는 건 알겠어요. 그래도.. 이렇게 찾아오셔서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시면 어떤 말을 해야  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할 말이 있다면…”
“있다면?”

이하운이 되물었다.

“멜란은 뭔가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요. 자신이랑 친해져서 좋을  없다. 그냥 잊고 있었다.  수 없는 말만 하고 사라져서. 무엇인지 이야기는 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 또. 그러네. 사실,  녀석이…”

이하운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자신이 므랑데가 된 것마냥 변명을 내뱉으려고 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므랑데를 변호하고 싶어서 그녀는 선을 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다면 분명 므랑데의 이야기를 알 수 있겠지만, 마레이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만.”
“아.....”

마레이의 거절에 이하운은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허탈하게 웃어버렸다. 마치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대답을 하지 몰라서 그저 반사적으로 웃는 것 같았다.

“교수님, 멜란의 관한 이야기는 멜란에게 듣고 싶어요. 멜란이 이야기해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궁금하지만, 이하운 교수님께 듣는다면 그건 멜란에게 무척 실례되는 일이잖아요.”

이하운이 입을 다물었다. 노란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둥글게,너무나도 둥글게 변해서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없을 정도로 순한 얼굴로 마레이를 보고 있었다. 허탈한 듯 허허 웃음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아…. 그래, 맞아. 그렇지. 네가 나보다는 낫네. 그래, 그래… 다음 수업에 꼭 나와라. 무슨 수를 쓰던지 내가 므랑데 그 애새끼를 꼭 데리고 나올 테니까.”
“네.”

이하운은 멋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자신 앞에 놓인 잔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냐?”
“네, 얼마든 지요.”
“그래서. 그렇게 말한 므랑데에 대한  생각은 어떤지 물어봐도 되겠냐?”
“마레이  파웬은 미래의 이득 따위로 친구를 사귀지 않습니다. 그냥 므랑데랑 친구를 하고 싶어서 옆에 있을 뿐이에요.”

필리아가 해주었던 그 말이 여전히 마레이에게 짓눌린 채로 남아 있었다. 므랑데에게 곧장 해야만했던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것이, 그 당시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씁쓸한 뒷모습만 남았던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렸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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