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42화 〉다가오는 것들(9) (142/341)



〈 142화 〉다가오는 것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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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이야.”

므랑데가 기쁜 듯이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와 말하는 것도, 같이 있는 것도 서툴러 보이는 소녀가 자연스레 웃고 있었다.

“난 친구가 없거든.”

므랑데는  안에 안긴 토끼의 앞발을 잡아 좌우로  펼쳤다. 만세를 부르는 토끼의 모습만을 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마레이는 15살이라고 했지?”
“아, 네….”
“겨우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은 내가 말하기에는 조금 부끄럽지만… 여기도 일종의 사회 같은 거거든. 특히 총독과 황제가 직접 만든 학교이다 보니까, 각지의 유력가문의 사람들이 다 모인단 말이야. 공부를 배우는 곳이기도 하는 동시에, 미래에 유용하게 쓰일 관계를 만드는 곳이야. 마레이 드 파….. 아….”

므랑데는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깨달은 것인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발치에 있는 돌을 차서 수풀 너머로 가볍게 넘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지만, 나랑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게 좋아.”
“네?”
“미래에 유용할 리도 없고,  친하게 지내면 미래에 민폐를 끼칠 것 같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되묻는 마레이의 모습에 마레이는 웃어 보였다. 자조에 가까운 그녀의 웃음은 너무나 외로워 보였지만, 무어라 말해야 될지 모르는 어린 소년은 그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생활을 하다 보면 알게  거야. 오늘은 고마웠어.”

갑작스레 태도가 변한 므랑데의 모습에 마레이는 일어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지만, 므랑데는 마레이의 손을 조심스레 풀어냈다.

“누군가 나랑 왜 같이 돌아다니냐 물으면, 이하운 때문이라고 하면  거야.”
“멜란? 갑자기 왜…?”
“스스로의 처지도 잊어버리고 잠시 바보가 되었나 봐.”
“그…. 공국에 가자는 건…?”
“잊어버려. 다음 수업에 보자, 마레이 드 파웬.”


따라오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는 므랑데의 모습에 마레이는 용기를 내어 다시 한 번 그녀를 붙잡았다.

“그래도…. 내려가는 길은 같이...”
“언니랑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돼.  말 명심하고. 넌 착하니까,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자신이 가는 길과 반대로 돌아가면 교사가 있을 거라는 말과 함께 그녀는 숲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길을 알고 있는 듯, 자신 있게 움직이는 므랑데의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이 하나도 정리되지 않았다. 머리를 잔뜩 털어내 봐도 생각은 떨어지지 않고, 누군가 말하고 싶어도 장황한 거짓말 같아서 이야기를 해도 비웃음만 살 것 같았다. 친모의 이야기가 끼어들어 있다 보니, 라벨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미안했기에 속은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렇게 죽을상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 필리아... 안녕하세요.”
“점심에도 봤는데,  ‘안녕하세요’야.”

별 반응이 없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더이상 말을 이어나가는 대신에, 곧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은보라빛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향이 흘러들었고, 마레이는 조심스레 필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보통은 반대가 아니야…?”

슬그머니 몸을 움직여, 기대기 편하게 어깨를 빌려주면서도 필리아는 작게 툴툴거렸다. 마레이는 웃음을 터트렸다. 누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지 않은 누나. 물론, 실제로 필리아가 연상이긴 했지만.

“힘든 일이 있었어요. 조금.. 말하기 힘든데.. 그게 그러니까...”
“말하고 싶지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자신의 어깨를 빌린 마레이의 머리 위로 필리아가 머리를 기댄다.

“익숙해져야 할거야. 악의로 넘쳐나는 세상은 꽤나 피곤하거든.”
“악의요….?”

그래, 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의든, 호의든 제대로 돌아오는  거의 없거든. 물론, 바라지도 않지만. 뒤에서 찌르지만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돼. 길리아 마르타 때문이지?”
“네? 아뇨…  다른 이야기에요.”

필리아의 고개가 슬며시 움직였다,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헛다리 짚었네. 뭐, 다른 이야기라도 말하고 싶지 않으면 됐어.”
“네….”

가만히 앉아있다 보니 바람이 차가웠다. 필리아는 말 없이 온기를 나누어주었다. 몇 분동안이나 그렇게 있다가, 마레이는 너무 민폐가 아닐까 생각에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번에 전부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하나둘, 풀어나가면   같기도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무척이나 따스해서 믿음이 갔다.

“그…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가….. 아이가… 선배가..? 있는데요.”

말하고 싶었나 보네. 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하고 싶은 말과 대답을 동시에 처리했다.

“자신과 친하게 지내면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여기는 미래에 도움이 될 관계를 만드는 곳이라고 하면서… 방해가 될 거라고 하더라고 말하기도 했고, 제 이름도 많이 신경 쓰는 것 같고...”
“참 재미없는 인생을 사는 얘인가 보네.”

나보다  말이야. 필리아는 애써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온 애들도 몇 있겠지. 성숙한 녀석들은 잔뜩 있다 보니까. 보고 배우는 게 그랬으니까 그럴 수도 있고. 그래도 관계를 만들려고 친해진다니, 너무 속보이잖아. 그런 녀석들은 한가득 가져와도 사양이라고. 마레이,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아, 네…. 그 사랑하게 해달라고..”

필리아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얼굴을 돌리고  번 헛기침을 한 후에야 진정한 그녀는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들을 때마다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네 정말…… 미래의 이득을 생각하고 만든 관계라면, 미래의 이득이 없어지면 버린다는 이야기로 들리네. 뭐, 그런 건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협동심이나, 협력이니 말을 내세우면서 조별 과제를 잔뜩 내주잖아. 친하게 지내라는 말이기도 해. 사회성을 기른다 뭐다 말하지만 실상은 두루두루  지내라는 의미야.”
“친구라는건 동등해야 이루어지는 거야. 모든  동등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느 분야에서 동등하다는  성립이 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렇게 따지면  학교라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인위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하는 곳이란 말이야. 특히, 발테르의 경우는….”

“몇 년도 안 된 이 학교에 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뭔데? 동문이라는 이름 하나로 얻을 이득은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거든. 이득이 되는 관계냐, 아니냐로 사람을 나누면 누가 친구가 되어주고, 누가 동료가 되어줄 건데? 미래의 이득 같은 말을 내뱉기는…. 그냥 발테르에 왔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면 될 것을...”

필리아는 쉴새 없이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마레이를 보고 말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마레이의 마음에 파문을 일렁이는 므랑데를 꾸짖는 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필리아는 마레이가 내뱉고 싶은 말을 제멋대로 토해내고 있었다.

“그 친구?라는애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왕따라도 당하는 것 같은데. 크게 혼내줘. 마레이 드 파웬은 미래의 이득 따위로 친구를 사귀지 않는다고, 그냥 당신이랑 친구를 하고 싶어서 옆에 있을 뿐이라고 말이야!”

양쪽 볼을 잡아 쭉쭉 늘리는 연상의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잔뜩 새어 나오는 발음에도 성실하게 대답했다.

“.....네.”
“필리아  블러드의 약혼자라면 그런 패기를 보여주란 말이야! 물론, 나 때문에 몇몇 조심해야 되는 쓰레기들이 있는데...... 시간이... 그건 다음에 이야기하자. 오늘 동생이랑 약속이 있거든.”

조금 더 필리아와 같이 있고 싶은 마레이는 벌떡 일어나, 그녀의 옆에 섰지만. 괜찮다며 마레이의 머리를 가볍게 툭툭 쓰다듬은 필리아는 아쉬운 듯 소년의 뺨을 두어 번 쓸어내리고 먼저 자리를 떠나갔다.

연상의 여인들에게는 고집을 부리곤하는 마레이였지만, 필리아에게는 묘하게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은 생각에 고집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등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필리아와 헤어진 벤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레이는 이드리엔을 따라 걷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 그런지 수많은 학생들로 교내는 금세 북적이고 있었다.

품 안에 책들을 잔뜩 안고 가고 있는 학생, 손을 붙잡고 재잘재잘 떠드는 여학생들, 한 숨을 푹푹 내쉬는 남학생과, 가방을 매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까지.

대부분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늘 하루의 끝이라는 후련함과 짙은 피곤함이 잔뜩 섞인 얼굴로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주변에 있는 교사와 가까운 동문 쪽으로 나가는 인파들을 역행하며 걷는 건 이드리엔과 마레이를 제외하면 손가락으로 수 있을 정도.

이드리엔은 고급 원소술 이론이라는 두꺼운 책을  손으로 안아  채,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인사를 건네지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되지 않았다.

무례한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사람들은 익숙한 듯 지나쳤고 마레이는 이드리엔의 뒤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또각또각 구두소리가 유난히 규칙적이고 크게 울려 퍼지는 것은 자신만의 착각이 아닌 듯, 사람들의 시선이 이드리엔을 향해  새 없이 이어지고 끊기기를 반복한다.

갑작스레 이드리엔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마레이를 보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날카로운 눈빛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제자리에 꼿꼿이 선다.

“걸음이 늦어.”

작게 인상을 쓰고, 무슨  말이 있는지 우물거리다가 이드리엔은 자신이 할 말만 내뱉고 다시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걸음걸이에 따라 좌우로 움직이는 스커트에 감싸인 풍만한 스커트가 시선에 들어오고, 그 위로는 얇은 허리라인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몸에 딱 맞는 슈트를 보자, 사람들이 가득 붐비는 길 한복판인데도 마레이는 하체에 피가 쏠리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마레이의 걸음을 재촉하면서도 자신의 걸음을 늦춘 이드리엔의 탓에 어느새 둘은 나란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학생들의 시선은 더욱 더 짙게 깔리고 있었다.

“학교는 익숙해졌나?”
“아, 그게… 네. 조금...”

평소에 자신의 얼굴을 보며 욕설을 내뱉거나, 들뜬 숨을 내쉬는 모습을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한듯 말을 더듬었다.

“마법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고 했는데, 일리엔 교수의 수업과 내 수업을 같이 듣는다니 솔직히 놀랐다. 자신이 있는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따끔한 질책에 마레이는 고개를  숙이고 이드리엔의 옆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마레이의 모습을 흘깃 바라본 이드리엔은 구부려진 소년의 목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일리엔 교수랑 상의해본 결과,  사람이 같이 가르치는 게 어떤가이야기가 나왔다. 어차피 기초이론 쪽은 어떻게 보면 공통점이 참 많으니까  사람이 수업을 가르치는 걸로….”
“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는 마레이는 고개를 들어 약간 붉게 상기된 이드리엔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약간 화를 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얼굴은, 몸으로 수십 번 대화를 나눈 소년의 얼굴에는 약간의 기대와 수치심이 깃들어 있다는   수 있었다.

“흠… 흠... 나나 일리엔 교수의 의견이 조금 맞아서 말이지… 내일부터는 함께 수업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당황스럽기도 할 거다.”
“아, 네!”

예전이라면 일리엔과의 단둘의 시간에 이드리엔이 끼어든다는 건, 두 사람의 관계를 훼방을 놓는다는 의미와 다름이 없었지만. 지금처럼 한 손으로 책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가득 준 채로,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을 흘금보고 있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의미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이드리엔은 더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슬쩍 걸음을 늦추어 마레이와 함께 자신의 연구실로 걸음을 옮긴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건 알고 있지? 수업이 열려있지도 않은데, 한 사람을 위해서 수업이 만들어진 상황이니까….”
“아,그게.. 네.”

이하운이나, 발렌타인이라는 선생의 수업, 검술 수업 같은 경우는 이미 시간이 잡혀있는 수업에 마레이가 들어간 것이지만. 일리엔의 원소 마법이나 줄리아의 전술학 관련 수업은 마레이를 위해 특별히 수업이 열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특혜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학생들에게 결코 좋은 눈초리를 받을 수 있지는 않다는  길리아에게 듣긴 했다. 다만, 그런 걱정보다는 당장 눈앞에 육욕을 채우는 줄리아와 일리엔의 손짓에 마레이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만….

어느새 이드리엔의 연구실 안으로 들어온 마레이는 그녀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는 게 정확한 말이지만. 자신의 밑에 깔려서 허덕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이드리엔의 모습에 마레이는 긴장한 듯 등을 꼿꼿이 폈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말이 꽤나 많아. 총독 때문에 대놓고는 못 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학교는 총독의 개인소유지만, 그래도 교육기관의 탈을 쓰고 있다면 어느 정도 공평성이라는  보여줘야 해.”

답답한 듯, 잔에 가득 담긴 차를  번에삼키고 이드리엔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리아 선생은 무슨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뭐, 그분은 남이니까 상관할 일은 아니니까. 중요한 건. 언니가 그런 식으로 널 위해 수업을 열어버리니까 좋은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야… 넌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마레이의 사과에 작게 코웃음 친 이드리엔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될지 모르는 소년도  어색한 침묵에 찻잔을  손으로 감싸 안고 내용물을 홀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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