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다가오는 것들(8)
“중간의 이야기를 빼먹었구나. 네 외조부는 기사였으면서, 동시에 독실한 신의 종이었단다. 그런 그에게 아내인 레오나가 악마였다는 사실은, 레오나가 진실로 그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진실로 받아드리기에는 힘들었던 것 같구나. 레오나가 악마라는 의혹을 받았지만, 십수 년 동안 부인하고, 부정하고 화를 냈던 그였으니까….”
이 세계에서 악마라는 이름이 가진 멍울일지도 모른단다. 입을 다문 란은 그 어떤 감정도내비치지 않았다. 다만 눈을 감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금을 녹인 것 같은 노란 눈동자에 다시 한번 마레이는 꿈을꾸었다.
독실한 신의 종이자, 영지민의 자랑이었던 신도이자, 영주이자, 기사였던 그는 아내가 악마를 사실을 깨달았을 때, 자신의 애 검을 끌어안고 아내의 방을 찾았다. 늙어가던 자신과 다르게 변치 않고 영원토록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그런 아내의 품 안에서 꼬물거리는 자신의 핏덩이.
단숨에 목을 베어내리라 생각하고 아내의 방을 들어간 기사였지만, 그는 한 아이의 아비였다. 핏덩이와 정말로, 정말로 사랑했던 아내의 모습을 보자 분노와 배신감은 몸을 잔뜩 웅크려버렸고.
기사는 아내 앞에 검을 내려놓고, 같이 죽자는 말을 한다. 레오나라는 이름을 부르며, 아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기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같이 죽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남편의 모습에 레오나는 입술을 꽉 깨문다.
품 안에 꼬물거리는 작은 핏덩이의 모습에 레오나는, 왜 남편이 그런 말을 꺼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울었고, 기사는 레오나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일지 모를 긴 시간을 그 앞에서 지키며 울었다.
우리 도망쳐요. 레오나는, 외조모는 그런 말을 했다.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도망쳐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수많은 교단에서 내놓은 증거물들이 두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치더라도 집요한 집행관들은 그들을 찾아낼 터.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끝나는 게 맞았다.
그는 레오나 남편이었지만, 동시에 북부의 영주였다. 그가 도망친다면 악마 사냥꾼들이 이 영지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모든 게 불살라지고, 비옥하지는 않았지만, 겨우겨우땅을 파먹고 살만했던 백성들의 터전 위로 저주가 쏟아질 터.
그렇기에 죽음으로 도망치려 했다. 자신의 아내인 악마와 악마의 피를 가진 딸아이와 함께. 기사는 하루를 꼬박 기다렸고, 대답 없이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레오나의 머리 위로 칼을 높게…..
“그만. 제어하지 못하는 재능은 오히려 자신을 망가트린단다.”
누구의 기억인지도 모르는 흔들림속에서 란의 목소리가 마레이를 건져냈다. 방금전 보았던 광경은 무엇일까.이상하게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도에 마레이는 눈물을 닦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그리고 자신 앞에는 란이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제가…. 무엇을 본 건가요?”
“내가 본 것. 그리고 대지가 본 것.”
란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레이는 머릿속을 헤집는 것 같은, 누군가의 기억인지도 모르는 것을 기억 속에서 하나, 둘 지워나갔다. 몇 분의 시간 동안 잊으려고 노력하자, 이상하게도 희미한 장면으로 남아,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격한 감정도 희미해졌다.
“마리보다 더욱 뛰어날지도 모르겠구나…. 길조인지, 흉조인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보다요…?”
“공감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질척하고, 이해라고 부르기에는 무척이나 감정적이지. 대부분의 사람들. 지금에 와서는 너밖에 없는 그런 감각이라 해야 좋을지 모를 그 능력을 설명할 말은 있지 않단다. 과거에도 고작 몇 명에 불과했던 능력이기도 하니 이름조차 얻지못했지.”
공감도 아닌, 이해도 아닌 무엇인가. 마레이도 자신이 본 것을 말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냥 보였고, 들렸고, 느꼈고, 기억할 뿐이었다. 곧장 희미해질 뿐이었지만.
“하나, 둘 제어하는 법을 배우다 보면 큰 힘이 되어줄 거란다. 하지만 싫다고 하면 억지로 배우게 할 생각은 없단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좋을 때가 훨씬 많기 때문에…...”
란은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진한 금색의 눈썹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입술이 뒤틀리는 듯이 억지로 움직였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손이 상대방을 놓지 않기 위해 서로를 꼭 붙잡았다
배우지 않아도 좋다. 모르는 게 좋다. 란은 마레이가 거절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능력이라는 말에 호기심이 이어졌고, 방금전에 보았던 그 광경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다.
“배우고 싶어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써야 된다, 어떻게 해야 된다는 목표도 없이 어린 소년은 고집을 부렸고, 란은 한동안 마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천히 해보잖구나.”
란은 무엇인가에 들리듯, 바닥에 손을 대지 않고 자리에 홀로 일어났다.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리 자연스럽게 일어났는지, 마레이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워낙 가까이 앉아있었기에 란이 한 걸음을 옮기자 곧장 마레이의 가슴팍에 코가 닿았고, 작은 손을 뻗어 마레이의 목을 잡아 천천히 자신을 향해 이끌었다.
“아가, 네 얼굴을 보여주렴.”
란과 마레이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린 소년은 무녀님이 말하는 얼굴이 무엇인지, 그녀의 금색 눈동자를 한동안 바라보다, 자신의 안대를 천천히 벗어 란을 보았다.
“.......역시 넌, 거기에 있었구나. ■■■. 잠깐… 너.. 무슨… 읏….!”
형이상학적인 도형들이 뜨고, 다시 고쳐지는 왼쪽 눈을 보며 란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란이 마지막에 부르는 무엇인가를 들을 수는 없었다. 언어라기보다는 울음소리 같은 무엇인가를 한 번 부른 란은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갑작스레 주저 앉을 것 같은 란의 모습에 마레이는 황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고, 란은 길게,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레이의 가슴에 뺨을 기대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떨어졌다.
“그만… 그만…!”
란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 마레이의 가슴에 두 손을 올려 천천히 밀어냈다. 떠밀다시피 하는 그녀의 힘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란을 내려다보았다. 란은 무엇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우물거릴 뿐이었지만, 제대로 된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금색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여, 곧장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 된 란은 긴 소매 속에서 주먹을 꽉 움켜쥔 채로, 마레이에게서 천천히 뒷걸음친다.
"나에게 왜 그런...."
"란님?"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란은 몸이 다시 한번 크게 휘청이다가 한 걸음 앞으로 내밀며 간신히 몸의 균형을 맞춘다. 그리고 벌린 입사이로 길게 혀를 내밀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오늘은….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구나…. 다음에. 다음에 다시 오렴.”
“네? 란님?”
뒤로 물러서는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마레이는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거리를 좁히지도 않고 이동하던 둘의 걸음이 멈춘 것은 란의 등에 벽이 닿았을 때였다. 마레이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로, 란은 애써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하얀 상의가 꾸깃꾸깃 접힐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질척한 타액이 길게 선을 이으며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란의 몸이 움찔움찔 크게 떨린다. 갑작스러운 란의 발작에 마레이는 걱정이 되는 듯,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란님?”
마레이의 물음에 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곧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건너뛰어 문을 닫았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란의 뒤를 쫓았지만, 방문을 열자, 보이는 건 신사의 밖이었다.
몇 번이나 신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문을 열었지만, 보이는 것은 신사밖이었다. 분명 밖에서 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은 신사의 밖이었고, 그 문을 통과해도 다시 문의 앞으로 자신은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법사의 장난, 주술 등 여러 이름으로 설명이 될 것 같은 풍경에 마레이는 몇 번이나 문을 지나고, 또 지나도 신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란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그녀의 말을 상기하고 자신이 지나온 수많은 붉은 기둥을 따라 발테르 학교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외조모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리리스라는 이름, 악마의 신이라고 소개한 란, 그리고 오늘 처음 뵈었던 로렌 등이 마레이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왼쪽 눈을 본 란의 행동이 라벨라등의 모습과 슬며시 겹쳐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도달하자, 애써 의식하지 않은 란의모습이 하나, 둘 마레이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작아진 란은, 자신의 신장보다 큰 옷을 입어서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분홍색 유실이 슬금슬금 보이기도 했다. 어린, 미성의 목소리로 고풍스러운 말을 내뱉는 모습이라든지, 필리아에게 느껴지는 풋풋함과 동시에 로렌에게서 보였던 완숙함이 덧씌여지는 모습에…
마레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애써 생각을 멈추었다. 어머니의 스승님에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것도 자신보다 작은 몸에 욕정을 품다니, 죄책감이 그림자를 타고 흘러들어와 목을 조르는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야한 그림책이나, 망상 덩어리들을 쏟아낸 매체들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성인의 비율의 어린, 아니 그냥 성인의 몸을 작게 줄여놓은 것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자, 어린애라는 생각은 들면서도 또 성욕이 드는 이율배반적인 성욕으로 가득 찬 몸에 마레이는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필리아의 몸에 흥분할 때부터, 윤리의식이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어린 자신이 동년배의 소녀의 몸에 흥분하는 건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가슴에 간신히 올 것 같은, 몸이 어려진 란의 몸에 흥분하다니.
이런 생각들로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산책로를 무작정 걷던 마레이의 눈에 낯설지 않고 익숙해져 가는 소녀의 뒷모습의 발견은 무척이나 반갑고, 또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멜란! 멜란!”
“응? 아….. 마레이구나. 안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므랑데는 마레이의 얼굴을 슬며시 보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다가, 무엇인가 생각이라도 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잘 지냈어요?”
“.....응.”
므랑데는 두 손으로 바구니를 꼭 쥐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짐승을 닮은 눈동자, 금색의 머리카락에서 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눈앞의 소녀는 자신이 말하는 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떨리는 눈동자는 여유롭다기보다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기도 했다.
“멜란은 공국 건국제때 뭘 했어요? 공국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본가로 갔나요?”
“....발테르에 있었어. 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아, 죄송해요… 그게….”
갑작스레 사과하는 모습에 므랑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두 손은 여전히 바구니를 꽉 쥐고 있었지만, 약간 고개를 숙이고 웃는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도 따라 웃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공국에 갔나 보네?”
“아, 네. 처음 가봤는데, 대단했어요. 거대한 시계탑이라든지, 운하라든지…..”
필리아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마레이는 가서 보았던 것들이나 먹었던 것들에서 이야기를 쏟아냈다. 므랑데 또한 공국의 수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인지, 중간중간 던지는 질문이나 장소에 대해서 마레이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좋은 가이드가 있었나 보네. 공국에서 추천하는 관광명소는 다들 아는데, 진짜로 좋거나 볼만한 곳은 사람들은 잘 모르거든.”
적당히 두, 세 사람이 앉을 만한 나무 밑동에 앉은 므랑데는 발을 앞뒤로 휘적이고 있었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마레이는 좋은 가이드라는 말에서, 생각나는 필리아의 생각에 대해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쯤은 돌아가고 싶긴 하네. 다음에 같이 갈 일이 있으면, 더 좋은 곳을 알려줄게. 그곳 지리는 가이드보다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잔뜩 흥분해서 설명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므랑데는 흥미가 생긴 것인지, 아니면 경쟁심이 생긴 것인지 입술을 삐죽 내민 므랑데에 행동에 마레이는 네, 네. 잘부탁해요라고 적당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에요?”
“잘따르는 아이들이 있는데, 그 녀석들 주려고…..”
. 바구니를 가슴까지 조심스레 들어 올린 므랑데의 모습은 작은 동물 같아서 꽉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도와드려도 돼요?”
“뭐… 상관은 없는데….”
서툴게 긍정하는 소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바구니를 조심스레 잡아 들었다. 어린 소년의 친절을 받아들이는 것인지, 므랑데는 슬그머니 바구니를 쥔 손을 옆으로 옮겼다. 두 사람이 나눠 든 무게였지만, 방심하고 잡아 들었다가는 휘청거릴 무게에 마레이는 잔뜩 긴장한 채로 바구니를 쥔 손의 힘을 더해갔다.
“안 무거워?”
“....무겁네요.”
므랑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인간이나 일반 흡혈 종들은 힘이 약하니까…. 무리할 필요는 없어.”
“조금만 더….. 같이 들어드릴게요.”
마음대로 해. 적당히 대답한 므랑데의 눈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팔의 감각이 사라질 때쯤 므랑데의 걸음이 멈췄고 그녀가 두세 번 박수를 치자, 수풀 속에서 동물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므랑데는 동물을 좋아해요?”
“맛있다고는 생각해.”
자신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며 달려드는 토끼를 자연스레 안아 든 므랑데의 대답에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한없이 진지해서, 마레이는 말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