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다가오는 것들(5)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매만지는 작은 손길을 느끼며, 조심스레 란을 끌어안았다.
“채 눈도 뜨지 못하고 내 손을 잡던 그 아이가 이렇게 되돌아왔구나.”
떨리는 음색. 란은 마레이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제는 점점 흐릿해지는 어머니의 온기가 떠오르고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어깨에 턱을 기대고 눈을 꼭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란이 마레이의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레 밀어냈다. 몇 번이나 숨을 몰아쉬는 란은 자신의 눈을 가린 붉은 붕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매듭을 향해 손이 가는 순간, 공간을 찢고 하얀 장갑을 낀 손이 튀어나와 란의 손목을 붙잡았다. 잡아챘다는 표현이 옳을지 몰랐다.
“란님, 안되는 거 당신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새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동시에, 찢어지는 공간이 크기를 넓히고 여인이 걸어 나온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 란과 마레이를 내려볼 수 있는 장신의 키. 란의 손목을 붙잡은 채, 내려보는 여인의 옆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하면서 또, 낯설었다.
“라벨라…?”
“....쯧.”
라벨라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라벨라라고 생각한 여인은 마레이를 보고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크게 혀를 찼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란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나타난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멍하니 란과 그녀를 바라보았다.
“란님. 진정하시지요.”
“마리의 아이가 찾아왔습니다. 잠시만이라도 안 되는 건가요. 로렌?”
란의 말에 마레이는 다시 한 번 자신 앞에 선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의 여인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라벨라가 잘 익은 과일이라면, 로렌은 슬며시 만지는 것만으로 과즙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농염하다 못해 치명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벨라보다 훨씬 더 큰 키. 제복 위로 코트를 걸치고 있는데도, 극단적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엉덩이와.
“잠시 시간을 허락해주셔도 안 되는 건가요. 마리의 아이의 앞에서 옷도 제대로 입고 오지도 못할 정도로? 잠시면 됩니다. 부디….”
“안됩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 말에 마레이의 시선은 자연스레 라벨라. 아니, 로렌의 가슴으로 시선이 갔다. 채 닫지 못한 단추 사이로 하얀색 브래지어가 슬며시 모습을 들어내고, 그 위로 깊은 골짜기를 만든 거대한 폭유가 보인다.
“......눈을 돌려라, 파내 버리기 전에.”
마레이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로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말을 내뱉었다. 마레이가 시선을 돌리자, 곧장 관심을 잃었는지 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란님. 진정해주세요. 지금 감정적으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당신답지 않게 어째서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시는 건가요. 그저 인간의 아이일 뿐입니다.”
“한낱 인간의 아이가 아니라, 마리의 아이입니다. 진정하고 있기에 당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렌. 부탁드립니다. 당신을 상처입히고 싶지 않습니다. 잠시라도, 잠시라도 좋으니 저 아이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 부디….”
로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마레이를 바라보았다. 처음 라벨라를 만났을 때, 딱딱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표정보다 더욱 완고해 보이는,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보랏빛 눈동자에 마레이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추잡한 것. 그 아이는 어째서…. 이런...”
인간이라기보다는 인형에 가깝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어두운 보라빛 눈동자 위로는 아무런 것도 볼 수 없었고, 무표정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혐오감을 숨기지 않고 뚝뚝 떨어져 내릴 것 같은 혐오감에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로렌. 저와 대화 중인데, 어째서 그 아이를 괴롭히시는 것인지요?”
“........예.”
로렌이 마레이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라벨라가 알려준 파웬가 특유의 문양, 녹색용이 어깨에 걸치고 있는 코트의 등 위로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코트가 벗겨지지 않도록, 양어깨에는 금으로 만든 체인의 고리가 등 뒤에 달려 있었다.
“제가 다치더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란님. 당신을 지키는 게 제 사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니라, 제 봉인을 지키는 게 당신의 사명이겠지요 로렌.”
“마리, 그 더러운 계집이 그렇게 중요...”
“로렌. 저를 화나게 하지 말아주세요.”
로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란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화를 참아내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지도 몰랐다.
“저를 다치게 할 정도로 저 아이가 그렇게 중요하신 건가요? 지금 이 자리에 저 아이가 있다는 것 자체도 제가 얼마나 양보해드린 것인지 아시는 분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건가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란의 모습에 로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억지임을 아셨다면….”
“제가 무엇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로렌은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마레이를 흘깃 바라보았다. 보랏빛 눈동자에는 마레이로서는 이해할 수도, 읽을 수도 없는 너무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눈을 돌려라, 한 번만 더 나를 읽으려면 네 눈의 하나를 파버리겠다. 쯧. 그 여자의 자식답군… 위험한 재능을 이어받았군. 하지만 그 아이보다 위험해.”
“로렌?”
“봉인은 시간이 지나면 약해지고, 이미 수만 년이 지난 봉인이 당신을 묶어둘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미 자연으로 돌아간 전 로드께서도 모르는 아득한 지식의 정수가 담긴 봉인. 이제는 미지의 지식이 되어버린 이 마법진의 원본을 당신을 알고 계시지요?”
“예.”
“당신의 힘으로, 당신을 다시 한번 봉인하세요. 이 아이의 가치만큼.”
두 사람의 대화에 마레이는 따라갈 수 없었다. 다만, 란이 억지를 부리고 있었고, 로렌은 댓가를 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이야기는 그 정도뿐이었다. 란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알겠다는 말을 내뱉고 로렌을 향해 손을 뻗었다.
로렌 손바닥을 펴자, 형이상학적인 문양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구체로 보일 정도로 빽빽하게 차 있는 문양의 덩어리들이 허공에 생겨났다. 천체를 뒤엎을 정도로 커다란 구체가 떠있었고 그 문양의 구체를 향해서 란은 망설임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동시에 커다란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년이나, 그년의 핏줄이나 마음에 드는 구석 따위는 하나도 없구나. 란님… 어째서….”
로렌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간신히 들릴 듯, 말듯한 그녀의 한탄이 마레이의 귓가에 간신히 닿는다.
“이러면 됐나요? 로렌?”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로렌의 앞에서 흘러나왔다. 로렌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마레이와 란 사이를 가리던 자신의 몸을 슬며시 옆으로 옮긴다.
마레이보다 조금. 아주 조금 컸던 여우 소녀는 어디로 가고, 마레이의 가슴팍에 간신히 닿을 것 같은 어린아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큰 인간의 어린아이와 다르게 이종족들처럼(마치 필리아나, 므랑데처럼.),하나의 성인이 그저 작은 몸을 가진 것 같은. 만화책이나 소설에서 나올 법한 그런 어린 여우 소녀가 눈앞에 있었다.
“.......네 어미의 어렸을 적을 닮았구나.”
“란님….?”
어린아이가 활짝 웃어보였다. 귀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부적들이 검게 바스라져 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눈을 가리던 붉은 붕대가 그대로 흘러내려 목 언저리에 걸쳐있었다.
위아래로 쭉 찢어진 동공이 마레이를 담아내고 있었다. 금색의 눈동자 안에는 수없이 많은 금속조각들이 얼기설기 붙어있는, 기괴하면서도 신비로운, 그러면서 매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 이리 오렴. 안아보자, 우리 아기….”
방금 전까지만해도, 마레이와 엇비슷하게 보이던 소녀가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지만,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운 향이 그녀에게서 났다. 그리운 온기가 그녀에게서부터 전해졌다.그대로 눈을 감으면 잠들어버릴 것 같은 편안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많이 컸구나.”
란의 중얼거림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슬픈 것인지,기쁜 것인지 이제는 구별이 가지 않았다. 다만,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어린아이의 가슴에 말없이 고개를 부비었다.
“란님은 제가 올 것을 알고 계셨나요?”
“그래,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단다. 앞으로 몇 년후. 네가 성년이 될 쯤에 올거라 생각했단다. 몇년 전이었지.”
란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로렌또한 그녀 옆에 아무런 말도 앉아있었기에 마레이 또한 두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정갈한 자세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다리에 아무런 감각도 없었지만,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로렌의 모습에 그 어떤내색조차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리를 인생의 동반자인 푸른 별이 제 빛을 잃고 방황했을 때 마리의 죽음을 알았단다. 빛을 잃고 천체를 떠나야할 별이 다시 한번 빛을 내는 모습을 보고, 네 운명이 네가 성인이 될 때, 이곳을 거쳐지나간다는 걸 보았지만…... 기분 좋은 실수구나.”
란은 그저 웃고 있었다. 마레이에게서 한 번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로렌은 흘깃 란의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마레이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그녀의 시선에 알 수 없는 증오와 혐오가 묻어 있었다.
아니, 아닐지도 몰랐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로렌앞에서 마레이는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란님, 저아이도 파웬가의 아이기도 하니, 제가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예, 물론입니다. 로렌, 어찌보면저보다도 당신이 마레이에게 더 가족같은 사람이니까요.”
마레이는 로렌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어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지만,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라벨라를 닮으면서도, 다른. 더 매력적이라고 해야될가. 농염하다고 해야될까. 그런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라벨라에게 가문의 어른을 뵈었을 때, 어떻게 해야될 지 배우지 못했느냐?”
“아, 아닙니다. 로, 로렌님… 마레이 드 파웬이 인사드립니다. 제가 경황이 없어 뒤늦게 인사드린 점 죄송합니다.”
당황해서 인사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했지만 마레이는 군더더기 없는 예법으로 로렌에게 인사를 드렸다. 긴장해서 말을 더듬었지만, 로렌은 그런 점을 문제삼지 않았다.
대부분 침대위에서 마레이를 교육(?)하는 라벨라였지만. 기본적인 예법이라든지 예의등 또한 착실히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일 텐데,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것이냐.”
“중간에 길을 잃고, 붉은 토라이를 지나보니 란님이 계셔서….”
“길을 잃어서 그 결계를 뛰어넘었다는 말을 내가 믿으라는 말이냐?”
결계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레이는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였다.
로렌의 보랏빛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할 때마다 마레이는 알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머니를 욕한 그녀에게 욱하는 감정도 슬그머니 일어나다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눈동자를 보면 항거할 수 없다고 해야할까. 마레이는 더욱 크게 몸을 움츠렸다.
“너무 아이를 추궁하지 말아주세요, 로렌. 마레이는 마리의 아이기도 합니다. 그아이의 재능의 반이라도 물려받았다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겠지요.”
발테르에 와서 몇 번듣지 못했던 이름,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라벨라와 첫만남때가 아니었을까. 혼자만의 시간이 종종 있었던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는 매일매일 떠올리던 어머니라는 존재가 왜이렇게 낯설게 들리는 것일까.
란의 입에서 어머니의 이름이 나올때마다, 마레이는 당장이라도 이곳에 벗어나고 싶었다. 마리라는 이름이 란과 로렌에게서 흘러나올 때면, 하나뿐인 아들인 자신보다 다른 두사람이 어머니를 더욱 잘 알고 있었고, 더욱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죄스러울 따름이었다.
“이해가 안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천박한 계집의 가호가 저렇게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성유물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음…..”
로렌과 대답을 주고받던 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금색 눈동자가 마레이를 흘깃 보다, 둥근 호선을 그렸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괜찮다는 듯이 입가로 한 번 웃어보이고서는 란은 로렌을 올려다 보았다.
“개인적인 친분정도는 괜찮지 않겠습니까. 살펴본 결과 보호나 치유 이외에 담겨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정말로 순수한 호의로 건네줄, 그런 물건이 아닌가요?”
“그 미친 계집애가 누군가에게 호의라고 하셨습니까…? 란님, 이번 대의 성녀는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
“저도 알아 보았습니다. 지켜보았고. 미숙하긴 하지만 제가 저 하늘로 존재했을 때에도 보기 힘들 재능을 가진 아이였죠.”
“재능 이전에 존재로서 결함이 있는 존재입니다.”
마레이가 본 에르덴 파벨은 무척이나 친근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 없이 상냥하고, 또 장난끼가 가득하면서도 마레이의 부탁을 언제나 들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레이로서는 두사람이 말하는 에르덴 파벨에 대해서 반박할 용기조차 들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험담을 늘어 놓는 로렌의 탐탁치 않았지만, 피는 이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엄연히 집안의 어른이었고 이 발테르의 총독이었으며, 또 학교의 총장도 겸임하고 있는.
마레이에게 있어서 하늘보다 더 높게 느껴지는 아득한 존재일 뿐이었다.
“문제가 생긴다면 로렌님께서 지켜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 모습으로, 이 힘으로 다른 신이나 악마들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말이죠.”
“란님…… 저는 당신의 봉인을 지키는 용(龍)이지, 당신을 지키는 존재가 아닙니다.”
“제가 믿을 건 로렌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인연을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로렌님께 그저 봉인당한 신일뿐입니까?”
란은 상처를 받은 것처럼 눈망울을 크게 뜨고 로렌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