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6화 〉다가오는 것들(3) (136/341)



〈 136화 〉다가오는 것들(3)

날붙이? 마레이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감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있었다.

“자, 잠시만요.. 저, 저는….”
“마레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배를 누르고 있던 창날이 치워진다.

“필리아….?”
“깜짝이야…. 또 암살자인  알았잖아.”

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신의 키보다 커 보이는 창을 놓자,바닥에 스며들듯이 사라진다. 지난주 품 안에 안겨 바들바들 떨던 모습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녀가 머리카락을 베베 꼬며 시선을 돌린다.

“깜짝 놀랐다고요...”
“차라리 부르지 그랬어. 큰일 날 뻔했잖아! 정말이지….”

마레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필리아를 끌어안기 위해, 팔을 벌려 한 발자국 내밀었지만, 흡혈귀 공주님은 갑작스레 다가오는 어린 소년의 모습에 무엇이 그리 놀랐는지,  발자국 뒷걸음질 친다.

여체에 둘러쌓인 생활을 하다 보니, 정작 여심에 무감각해진 마레이는 곧장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필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품 안에 가득 들어오는 소녀는 엉거주춤하게  있을 뿐이었다.

“필리아, 잘 지냈어요?”
“어...음.. 응. 하루 밖에 안 지났어.”

포옹을 풀고, 마레이는 다시 한  흡혈귀 아가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맞추려 하면서도, 정작 눈이 마주치면 붉은 눈동자가 다른 곳을  하고 움직인다. 부끄워하는 기색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마레이는 몇 번이나 그녀와 눈을 마주보려했고.

더이상 피할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필리아는 주먹을  쥐고, 입술을 앙다물기를 잠시, 눈을 한  질금 마레이의 손목을 잡아 이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과 달리 마레이의 손목을 잡은 자그마한손이 미약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과 동시에 살짝 촉촉한 느낌이 들었다. 여유로워 보이려는 모습과 다르게 실제는 잔뜩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의 차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애써 강한 척 하려는 필리아의 뒤를 따르자, 그녀는 교내 카페로 마레이를 이끌었다.

“잘 지냈어요?”
“하루밖에 안 됐다니까…..”
“그래도요.”

마레이가 웃으며 대답하자, 필리아가 이전과 다르게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더니, 들릴 듯,   한 목소리로 ‘응.’이라 짧게 대답한다.

“공주님은…. 아, 공주님은싫다고 했엇죠? 필리아 공주님은..”

필리아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풋하고 입을 가리고 웃었다. 길리아와 다르게 눈가가 둥근 호선을 그리며 웃는다.

“그냥 이름을 불러줘. 그리고 공주님이 아니라, 대공녀님이겠지.”
“네, 필리아.”

공국에서  방송에서는 공주님이라 부르기에 그런 줄 알았지만, 필리아에게 직접 들어보니 대공녀님이라는 말이 옳은 것 같았다.

“오후 시간 끝나고 찾아가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와버렸네.”

필리아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언제나 올곧게 펴진 어깨가 슬며시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는 대신 은색 머리카락을 베베꼴뿐이었다.

“보고 싶었는데, 마침 보였어요.”
“아, 정말이지….”

필리아는 말을 이어 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고 얼굴을 가린다.

“....말라고.”
“예?”
“그런 말 아무렇게 하지 말라고, 부끄러우니까.”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가운 커피를 쭉쭉 빨아 마신 필리아의 귓가가 묘하게 붉은게 귀여워서 이상하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레이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은 지, 상기된 얼굴을 가릴 생각도 없이 마레이를 째려본다.

“부끄러웠어요?”
“당연하잖아…. 정말이지… 그런 일도… 일도.. 해버리고….”

두통이 몰려오면서도 이상하게 싫지 않은 기분에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아무렇지 않아 보이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 보여주는 여린 모습에 마레이는 당장이라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에 휩싸일 것 같았다.

“서로 믿고, 내가 너를 좋아하게 해달라고 말했 던거 기억해?”
“네!”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리고 기쁘게 대답하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는 당황한 듯 입술을 오므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한숨이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충고하나하자면 그렇게 너무 몰아붙이면 부끄럽다고.”

필리아의 목소리가 끝부분에 와서는기어가는  작아진다. 핏빛을 닮은 짙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같이, 눈꼬리 끝에는 옅은 물기가 맴돌고 있었다.

“서로 믿는다는 말이 너무나도 달콤하게 들려서  두렵기도 해.”

시선을 돌린 채, 반개한 붉은 눈동자는 테이블 위에 반쯤 비어버린 커피를 담아내고 있었다. 숨을 내쉬는 듯, 눈앞의 소녀는 너무나도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그렇잖아, 누구를 믿는다는  상처받기  쉬워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누구에게 날 믿어달라는 말조차 쉽게 하지 못하거든, 심지어 가족한테까지도 말이야.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생각으로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과가 어찌되었든 상처를 주게 되더라.”

내가 부족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필리아는 뒷말을 삼키고 가볍게 웃어 보였다. 한숨을 내쉬는 모습보다, 힘없이 웃는 그녀의 모습이 더욱 불안하게 느껴진다. 또래라고 불러야 할 소녀가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난 왕이 될 거야.”

필리아는 웃고 있었다. 힘없이. 아니, 이제는 너무나도 짙게 웃고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끝까지 올라간 입꼬리는 거대한 자조를 담아내고있었다.

“지 애비의 등을 꽂는미친년이라고 해도 좋아,  뱃속에서 태어난 동생을 잡아먹는 년이라고 불러도 좋아, 뭐라 해도 상관없어. 난 왕이 되고 싶어. 아니, 왕이 되어야만 해.”

어린 소녀의 외견과는 너무 이질적인 표정이었다. 타인에게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표정은 두렵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마레이를 보고 있었지만,마레이의 너머를 보고 있었다.

“공왕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필리아가 입술을 오므렸다. 그리고 마레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에도 무너지지 않은 소년의 검은 눈동자를 보고 아무일도 아니라는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전혀. 그딴 자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그런데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으로 말하는 건가요.”
“왕좌라는 건, 자신이 앉지 않으면 누군가 앉게 되니까. 내 동생이라면 차라리 상관 없어. 다만,  새끼가….. 잠깐. 심한 말이 나올  같아.”

자그마한 입에서 분홍색 혀가 슬며시 나와, 입술을 적신다. 슬며시 보이는 흰색 송곳니가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둘째,  창녀의 사생아. 그 녀석이 앉게 될 경우 우리 자매에게 끝은 지옥보다 더 끔찍하겠지. 뭐, 어떻게 될지는 눈에 선하니까.”

필리아는 무표정했다. 공국이라고 해도  왕국의 크기나 다름없는 거대한 땅의 지배자의 호칭이었다. 제국에서 단 하나 뿐인 공왕, 그리고 단 하나 뿐인 바다와 이어진 영지. 정략과 정치에 무관심한 마레이라도, 공국의 지리적 이점, 그리고 제국에서의 영향력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거대한 땅을, 하나 뿐인 이름은 눈 앞의 소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의 것이라 선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은발의 흡혈귀 아가씨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신도 모르게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미묘하게 미지근한 온기. 자신보다 작은 손. 병적으로 하얗게 보이는 피부. 그러면서 여유로움을 가득 담아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보자, 참을 수 없는 갈증을 느낀다.

“필리아.”
“네가 도와줄 필요는 없어. 이건 일이니까. 다만, 내 옆에 있으면 파웬가에서 본적 없는 더럽고 치사하고 구역질 나는 일들에 계속 휘말리게 될 거야.  혐오할 수도 있고, 우리라는 종족을 배척할 수도 있어. 도망칠 기회는 지금뿐이야.”
“필리아.”
“네가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될 거야. 정말로 큰 도움이 되겠지. 발테르 총독이 널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해도, 넌 파웬가의 정식 후계자니까. 그러니까,지금 내 손을 놓으면 더러운 꼴 안 보고, 치가 떨릴 정도로 미친 인간들과 연관될 일도 없어.”
“필리아.”
“답은 네가 내리는 거야, 마레이 드 파웬. 너와 만난 게 우연이었지만 공국에서너와 만났을 때. 너를 어떻게 이용하면 좋을까 생각해봤어. 너무 쓸모가 넘치더라. 인연을 조금만 만들어 두면 엄청난 도움이 되겠다는 그런 생각을 했어.”

필리아라는 이름을 다시 부르려 했지만, 은보라빛 소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일부로 흡혈을 했어. 넌 너무 순수했거든. 조금만 좋은 말, 좋은 행동, 좋은 연인이 되어주면 분명 내 편을 들어줄 테니까.”

필리아가 웃고 있었다. 그러면서 화가 나 있었다.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해야 된다 생각했어. 기회는 한순간이지만, 후회는 너무나도 오래가니까.”

흡혈귀 공주님은손으로, 마레이가 잡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소년의 뺨 위로 손을 올렸다. 뺨에 닿은 작은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직접 마주하게 되니까. 무섭더라. 정말로 무서워서 어디로인가 숨어버리고 싶었어. ”

눈 앞의 소녀는 너무나도 화가 나 있었다. 그래,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지금 마레이에게 토해내고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나도 모르게 계속 이어나갔잖아. 처음에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걸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니까 할만하더라. 그리고 나중에는 쾌락에 허덕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웃기지?”

그래, 그녀는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어디서부터 그녀가 화가 난 것인지 마레이는 알지 못했지만, 자신의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또 안타까웠다.

“필리아.”
“너도 내가 혐오스럽지? 나도 그래.”

필리아는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기운도 없어 보였다. 왕의 자리에 뜨겁게 타오르던 그녀의 눈빛과 다르게, 붉은 눈동자는 빛을 잃고 잔뜩 흔들리고 있었다.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놓인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리아, 당신에게 키스해도 돼요?”

흡혈귀 아가씨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잔뜩 구겨지다, 크게 떠진 눈망물이 조금씩 작아지며, 졸린 듯 눈꼬리가  쳐진다.

“.......위로할 필요는 없어.”
“당신에게 키스하고 싶어요. 아주 진하게. 입안 곳곳이, 가슴에도, 배에도 전부. 리아가 그런 생각을 안 하도록. 모든 걸 잊어버릴 정도로...”
“정말이지….. 정말이지… 기분 나쁜 위로야. 최악의 위로라고  수 있겠네.”

필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자조도, 냉소도, 조소도, 실소도 아닌 정말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도….  진심은 알겠어. 고마워.”

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작게 기지개를 켰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겠다는 듯이, 축쳐진 자신을 일깨우겠다는 듯이.

“그래도, 연애소설은 조금 봐주면 좋겠네. 나 그런 거 무척이나 좋아하거든.”

수업은없지만, 더이상 있기에는 부끄러워서 버틸 수가 없네. 안녕이야, 마레이. 필리아는 마레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걸음을 옮겼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작고, 또 귀여워서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웃음을 터트렸다.





점심시간은 정신없이 끝나있었다. 자신을 기다리던 음란한 노예들를 깜빡할 정도로 마레이는 필리아의 대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실수라도  걸까, 혹시 필리아가 기분 나쁘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잔뜩 키워가며 멍하니 있다가, 점심을끝내는 종이 친 이후에야퍼득 정신을 차리고 교실로 되돌아갔다.

지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달려가 보았지만, 교실에 있는 학생은 몇 없었고 자신이 수업이 없다는  깨달은 마레이는. 그제서야 자신이 일리엔등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연구실로 찾아갔지만, 이미 다들 수업에 들어간 이후였고.

다시교실로 돌아갈 생각에 걸음을 옮기다, 어디서부터인가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어느새 숲을 헤메이고 있었다.

주변에 높디높은 장벽과 산맥이 자리 잡은 한적한 마을에 살았던 마레이였기에 숲이라는 건 무척이나 두려우면서 친근한 존재였고, 한참이나 필리아나 줄리아 등을 생각한 소년이 길을 걷다 숲을 거닐어도 이상함을 느끼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결론은 지금 마레이는 미아였다.

길을 따라 움직였기에,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보이는 풍경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기에 소년은 앞으로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되돌아가야 하는 것인지 고민에 빠진 것은 덤이었다.

앞으로 가는 길이 익숙하다면 차라리 나았다. 길도 아닌, 왜인지 모르게 자그만한 산과 이어진 길도 없는 방향으로 걸음이 자꾸만 나아가려고  게 문제였다.

묘하게 퍼져나오는 달콤한 냄새. 계속 옆길로 빠지라는 본능의 목소리에 마레이는 이번 한 번만, 딱 한 번만 본능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매일 밤 본능적으로의지해, 모친이 임신하는 것에 하나도 신경 쓰지 않고 질내 사정을 하는소년에게 본능적인 감각이라는것은 무척이나 친숙한 것이었으니까. 아니, 본능적에 지배되기에, 양모(養母)임에 상관 않고 극상의 여성 안에 자신의 씨앗을 쏟아붓는 것인지 모르겠다만.

그렇게 몇 분이나 걸었을까, 거대한 붉은 도리이(鳥居)가 하나  있었다. 아니, 수십 개, 어쩌면 백 개가 넘어가는 거대한 도리이가 늘어서 있었다. 기괴하면서도 장엄하게 느껴지는, 묘한 신성함을느끼는 광경에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붉은 도리이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리웠다.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거대한 도리이가 그리웠다. 익숙하고, 또 두근거린다. 이 거대한 붉은 건축물이,  도리이라 불리는 것인지. 그리고 그리운 감정이 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마레이는 저도 모르게 길게 늘어진 도리이들의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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