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34화 〉다가오는 것들(1) (134/341)



〈 134화 〉다가오는 것들(1)

사람들이 많은 장소는 거북하면서도, 이상하게 매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도시의 삶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일리엔이 주었던 마법 책을 집어 들고 공부나 할까 했지만, 이상하리만큼 집중이 되지 않아서 억지로 밖으로 나온 마레이가 책에 집중할 리는 없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길고 길었던 연휴를 다시 곱씹으며 스스로가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무어라 표현할  없는 기분으로 채워진 자신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 필리아? 아, 아니 공주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지요, 공작 자제님?”

필리아는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한 손으로 쥔 양산을 빙그르르 돌리는 걸 보면 즐거운 것 같기도 했다.

“필리아라고 불러줘. 공주님이라든지, 영예라든지… 너에게는 별로 불리고 싶지 않네. 너도 공작 자제라고 불리는  싫지?”

짙게 깔린 붉은, 아니. 어둠을 닮은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느긋하게 웃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필리아.”
“응,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보다는…. 반갑네라는 말이 더 좋겠지?”

한쪽 눈을 감으며 테이블 위에 올린 손으로 턱을 괸 필리아가 허락을 구하듯 말을 건네왔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는 그녀의 보라빛 머리가 은색처럼 반짝여서 아름답다라는 짤막한 감정을 남긴다.

“내일쯤 만날 거라 생각했는데, 우연히 이런 곳에서 보네.”

얼굴에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을 귓가로 넘기며 필리아는 등을 꼿꼿이 피며 다리에 두 손을 모아 정갈하게 앉았다. 격식 없는 말과 행동들과 다르게 진짜로 아가씨라는 느낌이 들어 마레이도 따라 허리를 꼿꼿이 폈다.

슬며시 웃고 있는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하얀 치아 위로 예리하게 튀어나와 있는 송곳니가 보인다. 그녀에게 무어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마레이는 입을  다물었고. 필리아도 마레이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그의 말을 기다리는 것인지 가만히 마레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별로 놀란 눈치가 아니네. 오히려 무덤덤한 반응에 내가 놀랄 것 같아.”

상처받은 듯, 축 처진 필리아의 어깨가 눈에 들어오자 마레이는 어쩔 줄을 몰라 일단 생각나는 말을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노, 놀랐어요. 필리아가 발테르 학교에 다닌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그게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그게 필리아가 싫다는 건 아니고.. 저, 저는.. 그게...”
“그렇게 반응해주면 내가 잘못한 것 같네.”

아니에요! 마레이가 큰소리로 외치며 일어나자, 마레이와 필리아에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귀가가 빨갛게 물들인 채로 조심스레 의자에 앉고 바닥만 바라보는 마레이의 모습에 필리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화도 못 내겠고 정말이지...”

붉은빛이 짙게 깔린 입술 사이로 필리아의 한숨을 길게 새어 나왔다. 마레이는 고개를 들고, 고개를 삐딱하게 세운 필리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라고 말을 할까라고... 잔뜩 생각해뒀는데, 막상 갑자기 만나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네.”
“죄, 죄송합니다.”
“어째서 사과하는 거지?”

필리아의 눈동자에는 의문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게… 축제때.. 제가… 필리아를...”
“내가 강제로 당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서로의 합의라고 해야되는  있지 않았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 그렇죠?”

필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술에 취한 연인들이 분위기에 취해 침대에게 홀린 것 같은 밤이었다. 일리엔이나 라벨라가 시키는 대로 이드리엔을 괴롭히고 길들일 때와 필리아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나도 첫 흡혈이다 보니 진정하지 못하고 휩쓸렸던 거고. 너도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거겠지. 이해해.”

너무나 냉정한 필리아의 반응에 마레이는 머리가 차갑게 식어가는  느꼈다. 둘 다 분위기에 휩쓸려 몸을 한 번 섞은 걸로 아주 특별한 관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니니까. 왜인지 모르게 안타깝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  같았다.

섭섭하기도 하고,  그렇게 느끼는  정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도 들고. 마레이는 답답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래도 제일 크게 느끼는 감정은 확실하게 선을 긋는 필리아에게서 느끼는 섭섭함이었다.

맞아, 공주님이랑 그런 짓을 했다고 해도….

“1학년이라고 했나?”
“아, 네. 이번에...”

필리아는 고개를 간단히 끄덕였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기분 좋은 꽃내음이 난다는 걸 깨달았다. 왜인지 모르게 자신 또래의 여자아이에게 알 수 없는 끌림이 이어지고 있었다.


“두 살 차이… 아니 세  차이인가.”

필리아가 아무렇지 않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마레이의 얼굴을 바라보다, 목으로, 그리고 몸으로, 그리고 아래로. 무엇인가 생각이 났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답답하다는 듯이 스스로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그리고 폐 끝까지 눌러붙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북적이는 광장의 모습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걸 알지만, 음…… 그래. 널 좋아하는  같아.”

필리아는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의 말이 진짜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에 마레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수에 젖은 눈동자로 필리아는 한동안 광장을 지나는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닐까라고 마레이가 생각을 할 무렵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마레이를 담아냈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야”
“아, 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니었구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라벨라나 에르덴등이 이상한 것이었다. 잡힐 듯하면서,잡히지 않는 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알 수 없는 갈증에 목이 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눈을 가린 안대를 벗으면  소녀를 자신의 것으로 할  있는 걸까. 자신도 모르게 안대 주변을 매만지고 있는 것을 깨닫고 마레이는 황급히 손을 아래로 내렸다. 필리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 같이, 무엇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듯이 그렇게.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갑자기 말을 꺼낸 필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말을 내뱉으려고 하다가 입술을 꽉 닫고, 자신의 머리를 헤집고 다시 한숨을 내쉬길 반복하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마레이는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그녀가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필리아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마레이를 노려보았다. 붉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그렇게 마레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우…… 나, 날. 내가. 내가 널 사랑하게 만들어줘.”
“네?”

마레이의 답답한 물음에 필리아는 답답하다는 듯이 눈을 질끔 감았다. 그녀의 길쭉한 귀가 분홍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참아내기 위해 겨우겨우 발버둥 치고 있었다. 다시금 마레이는 노려보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 다시 한 번 마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인내심을 갖고 다시, 부끄러워 죽을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내뱉는다.

“널 사랑하게 만들어 달라고, 내가.”

필리아는 부끄러운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날이  있는 종족 특유의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아니구나. 마레이는 몸이 흐물흐물해질  같은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필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가방에서 커다란 갈색 봉투를 꺼내 들어 마레이이 앞에 내밀었다.

“그러려면…. 우선은 서로를 알아야겠지.”
“이건 무엇이죠…?”

열어봐. 필리아의 가벼운 대답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실로 단추가 달린 봉투에서 실을 풀어 내용물을 살펴보았다. 마레이 드 파웬에 대한 보고서. 제목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마레이는 곧장 필리아를 바라보앗다.

“하나도 안읽었어. 널 더 좋아하고 싶었거든. 그러면 이런 보고서가 아니라 내가 직접보고 느끼고 만지면서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어.”

필리아는 마레이의 손에 있는 봉투를 가볍게 넘겨받더니 바닥에 가볍게 집어 던졌다. 뭉쳐지지 못한 종이 뭉치들이 허공에 제멋대로 휘날렸다. 마레이가 붙잡으려 하자, 필리아가 그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들이 불에 타오르고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렇게 티를 내는  싫지만, 그래도 보여주고 싶었어. 내 삶은 연애라는 거랑은 거리가 멀었거든. 그래서 어떻게, 무엇을 상대방에게 보여줘야 될지 몰라. 그래서 지금 서툴지만 이렇게 보여주는거야. 이게  진심이야. 마레이 드 파웬.”

필리아는 온전히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 부끄러웠다는 게 전부 거짓말처럼.

우쭐해져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필리아가 그런 것처럼 마레이도 객관적인 느낌으로 필리아를 바라보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자, 피빛을 닮은 붉은색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리는 게 보였고, 두 뺨이 붉게 물든 걸 볼 수 있었다.

“필리아…?”

필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슬며시 움직여 마레이를 바라보았다. 부끄러워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마레이는 참을 수 없는 애정을 그녀에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지만,

마레이가 느끼기에는 그녀는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애써 스스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나도 서툴러서 차가운 말로 이번일을 넘어가고 싶어할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있다 생각이 들었다.

“부르고 아무 말도 없고…  부른 거야?”
“미안해요.”
“하아…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필리아의 고운 이마가 잔뜩 찌푸려졌다.

“그냥 이 말을 하고 싶었어요. 제가 어떻게 노력하면 될까요. 필리아가 절 좋아하게 할 수 있을까요?”

마레이의 적극적인 물음에 필리아는 슬며시 웃어 보였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를 한동안 감더니, 다시 눈을 뜨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게, 이제는… 아니. 이번에는 나도 모르겠네.”

필리아는 어깨에 닿은 은보라빛 머리카락을 빙빙 꼬며 다시금 광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는 것 같았다.

필리아와 마레이는 카페에 앉아 사랑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서로 진지한 질문을 건네고 주기를 반복하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카페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길을 건너려는 마레이를 붙잡고 필리아가 멱살을 잡고 짧은 프렌치 키스를 건넸다.

입술 박치기라고 하는 게 옳을  같은 어색한 입맞춤.

“힘내줘, 나의 왕자님.”

들릴 듯, 말 듯 한 필리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서둘러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부끄러움에 그녀의 귀가 새빨갛게 물든 것인지, 저녁을 다가서는 노을의 빛이 붉어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필리아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필리아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라벨라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 마디를 남겼다.

“꼬맹이 주제에 잔망스럽네.”




“....해서, 제군들보다 어리지만, 동급생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줄리아의 파란 눈동자가 강의실을 꼼꼼히 훑었다. 앉아있는 학생들을 그녀의 시선이 닿자 다들 몸을 크게 움츠렸다. 침묵으로 일관된 분위기에는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긴장감만이 맴돌았다.

등을 꼿꼿이 펴고 정자세로 앉아있는 학생들을 보노라면, 마레이는 여기가 벨테르 학교인지, 말로만 듣던 제국군사관학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줄리아는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지,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궁금한 게 많을 것 같군. 간단히 질문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

병사들은. 아니, 학생들은 줄리아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을 시선들이었지만, 마레이가 넘치도록 쏟아부은 정액이 배 안에 가득 들어있고,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팬티가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정액덩어리들이 튀어나올 것 같다 보니 평소보다 딱딱한 얼굴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화가 난 듯한 그녀의 모습에, 평소에도 줄리아 앞에서 입을  다물기 급급했던 학생들이 긴장한 것은 어찌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질문 시간을 준다고 했다.”

줄리아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이 전원 손을 번쩍 들었다. 이 신기한 광경을 보면서 마레이는 알  없는 압박감을 잔뜩 느끼고 있었다.왜인지 이대로 줄리아에게 모든 걸 맡기면 안  것 같은 느낌에 마레이는 서둘러 맨 앞에 앉아있는 남학생의 이름을 조심스레 불렀다.

호명된 남학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줄리아를 흘깃 보더니 몸을 크게 움츠렸다.

“조, 좋아하는 운동이 있어?”
“딱히 싫어하는  없습니다.”

줄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학생이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레이를 보는 눈동자에서 먼저 불러줘서 고마워라고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음.”
“넷! 마레이  파웬은 무슨 수업을 들어?”

“다음.”
“라벨라 드 파웬 감찰국장과는 무슨 관계야?”

“다음.”
“혹시 진로가….”

“다음.”
“15살이면….”

줄리아가 다음을 외치면 학생들은 순서대로 질문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마레이는  기괴한 상황에 영문도 모른 채로 대답을 이어나갔고, 줄리아는 무작정 진행할 뿐이었다.

“다음”
“주, 줄리아 선생님.”
“무슨 일이지?”

마레이가 조심스레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헙- 하고 숨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레이를 바라보는 파란색 눈동자에는 애정이 잔뜩어렸기에, 당사자는 모르고 있었지만. 북부전선의 마녀의 권위에 도전하는  없는 전학생의 모습에 다들,  상황이 어디까지 흐르게 될 것인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