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공국에서 첫 데이트[필리아 더 블러드](4)
이하운의 능글맞은 고양이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전쟁터보다는, 학생들과 자주 장난치는 선생님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필리아도 발테르에 다니나요?”
“어떨것 같아?”
벽에서 등을 뗀 필리아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다시 걷자는 듯, 마레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대면 손가락 한마디 차이가 날 것 같은 작은 손을 붙잡았다. 부드러웠다. 하얀 맨손에서 애매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생이 다니고 있어. 대답을 듣지 못했네. 그래서, 나는... 어떨 것 같아?”
“다니는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라며 애매하게 대답을 피한 필리아가 쇠사슬로 칭칭 감겨 닫혀있는 문에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쇳소리가 울렸다. 쇠사슬은 스스로 풀려 바닥에 굴렀다. 환한 빛이 문을 통해 쏟아진다.
“자,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야.”
햇빛을 등지고 활짝 웃는 어린 소녀의 모습에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와서 봐봐.”
작은 손이 마레이를 더욱더 강하게 끌어당겼다. 빛 속으로 걸음을 옮기자, 고개를 숙이기 시작한 태양이 도시를 감싸 안고 있었다. 수도가 한눈에 들어왔다. 노란 태양을 받은 수로가 빛을 머금고 반짝인다.
“아름답네요....”
저절로 움직이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말에 필리아는 기쁜 듯 웃고 있었다. 회색의 성이 중앙에 높게 솟아 있었다. 바다로 이어지는 거대한 수로가 나뭇가지처럼 뻗어있었다. 하얀 성벽이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에는 흐릿하게 초록색으로 변한 농지가 눈에 들어온다. 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것도 보였다.
빽빽이 들어선 도시 안의 건물들의 모습은 그닥 멋지다고 평가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요소들을 모두 포함한다면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길게 이어진 커다란 산맥들이 보였다. 그 아래로, 열차 하나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다.
흘깃 필리아를 바라보았다. 도시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와 새하얀 얼굴, 분홍색 입술까지. 태양 아래에서 더없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외모에 자신도 모르게 왼쪽 안대로 손이 움직일 것 같았다.
필리아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몸은 마레이와 육욕의 일상을 보내는 연상의 누나들의 육감적인 몸에 비한다면 작고 초라했다. 하지만 덜 여문 꽃봉오리 같아서, 외견으로 드러나지 않는아름다움을 내면에 머금고 있었다. 거기에 간간히 달콤한 꽃향기를 풍기는 만개한 꽃처럼 느껴져서 묘한 두근거림을 만들어낸다.
“자, 구경도 끝났으니 식사나 하러 갈까? 저녁은 내가 살게.”
“조금만 더... 보고 가면 안 될까요.”
마레이의부탁에도 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문 앞까지 걸어간 그녀는 망설이는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풍경이 소중하다면 지금 놓아줘.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거든. 붙잡을 수 없는 걸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네 마음속의 아름다움은 미련으로 더러워질 거야.”
반개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필리아의 말에 움직이지 않은 걸음이 천천히 떨어졌다. 그녀는 피식 웃고 문에 기대던 등을 떼어냈다. 팔짱을 끼던 손이 닫혔던 현실의 문을 다시금 열었다.
교회의 종탑을 내려가는 것도 꽤나 고된 일이었다. 무릎이 상한다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는 필리아의 뒷모습을 쫓아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저녁노을이 저 멀리 보이는 성을 붉게 칠하고 있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것들은 전부 보여준 거 같네. 조금 모자라지만.”
“하루종일 뛰어다녀서 기억도 잘 안 나요....”
“시간이 필요할 뿐이야. 붙잡지 노력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들은 너에게 남아 활짝 피어나겠지. 물론 가장 마지막에 본 기억이 쉽게 나겠지. 공국의 모습을 잊지 말아 달라고 시계탑에 데려온 건 그런 이유고.”
교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검은 차를 탔다. 필리아가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지만, 차는 천천히 도로를 달렸다.
“저녁 식사는 점심에 비하면... 조금 부족할지 몰라. 점심에는 전직이 요리사였지만, 지금 가는 곳 주인은 전직이 집사였거든. 뭐, 워낙 다재다능한 사람이라 음식도 나쁘지 않은 편이니까.“
자동차는 곧장 멈추었다. 운전기사가 나와 문을 열어주고, 필리아와 마레이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에 차를 타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식당이라고 부르기에는 꽤나 규모가 큰 곳이었다. 호텔이라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도심지에서 꽤나 먼 변두리에 홀로 높게 솟아있는 곳이었다. 휴업이라 쓰여 있는 팻말에도 필리아는 가볍게 문을 열었다.
“아가씨,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주셨군요. 말년의 복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작은 아가씨도 같이 오셨다면 더욱 좋았을 텐데. 대신, 멋진 청년을 데리고 오셨군요.반갑습니다, 공자. 편하게 노만이라 불러주시지요. 방과 식사는 준비되어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노인. 아니, 노신사라고 부르는 게 맞을까. 주름진 얼굴이었지만, 깔끔한 인상의 노인이 끌끌 웃음을 터트렸다. 필리아를 기다렸다는 듯이 겉옷을 받고 엘리베이터로 두 사람을 이끌었다.
“아직도 펄펄한 주제에 은퇴나 해버리고. 당신이 없어서 저쪽은 엄청 엉망이라고. 이런 곳에 호텔이나 짓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다니, 국가적인 손실이야. 축제날에 영업을 하면 이해라도 하는데, 가장 돈이 되는 이때에 영업을 전부 쉬는 것도이해가 안 돼.”
“그냥 은퇴하면서 가지고 있던 꿈인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족할 만큼 벌었고, 만족한 만큼 살았습니다. 쥐고 갈 것도 없는 늙은 몸이 묘지기마냥 남은 그리움을 이곳에서 지킬뿐이지요. 그리고 제가 아니면 조용한 곳에서 마법의 하늘을 볼 수 있는 장소를 누가 아가씨에게 대접해드리겠습니까.”
필리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지만..... 노만은 아직도 펄펄하잖아. 아버지가 요즘 하는 걸 봐봐. 정신이 나간 것 같다니까.”
“저는 이미 외부인입니다. 그분께서도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이 늙은이를 상대해주시는 것은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지만, 옆에 계신 공자분을 어색하게 두는건 실례입니다. 아가씨.”
노만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꾹 눌렀다. 곧장 문이 열리고, 노만과 필리아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마레이에게 타라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도 이제 남자친구를 만날 나이군요. 이 늙은이 죽기 전에 아가씨의 아이를 한 번 안아보았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무슨, 남자친구. 그냥 오늘 만난 사이야. 아버지가 둔 감시꾼 놈들이랑쫓아내다가 얽혀버려서.... 그냥.”
필리아가 머리카락 끝을 붙잡고 비비 꼬았다. 노만의 주름진 눈가가 가늘어지고, 입에는 작은 미소가 그려진다.
“젊었을 적에 인연은 생각보다 갑작스레 다가오는 법이지요. 제 나이가 된다면 새로운 인연은 없어지더군요. 천천히 정리할 인연들이 남아서 뒷모습을 그릴 뿐이니까요.”
“노만은 아직 젊어. 그런 이야기 하지 마. 꼭 금방 죽어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고....”
필리아라고 생각되지 않은 여린 반응에 마레이는 억지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하며 가벼운 기계음을 냈다.
“저는 이만 약속이 있어서 가보겠습니다. 음식은 준비해 두었습니다. 휴가라고 직원들을 모두 내쫓아서 음식은 데워 드셔야 합니다.”
“조심히 들어가....”
“예, 공국에 다시 돌아오신 걸 환영 합니다 아가씨. 인사를 드리는 걸 깜빡했군요. 공자. 아니, 마레이 드 파웬군.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넷...!”
노만이라 소개한 노신사가 범상치 않아 보였다.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다. 필리아도 이름을 듣고 나서 자신을 알아보았지만, 그는 얼굴만 보고 마레이를 알아보았다.
“펜트 하우스를 깔끔하게 치워났습니다. 아가씨와 작은 아가씨를 위한 곳인데. 한 분은 영영 찾아오질 않는군요. 슬슬.... 제 아내와 외출할 시간이 다가오는군요. 열쇠는 방안에 두었습니다.”
“엠마는....”
필리아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입술을 잔뜩 오므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늘상 같지요. 오늘 밤은 같이 있어 주려고 합니다. 이번에도 문을 닫아둘 터이니, 공자도 편한 방을 쓰시길 바랍니다. 작은 아가씨도 계시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요.”
“.........다음에는 엉덩이를 걷어차서 데려올 테니까 걱정 마.”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노신사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묵례를 한 뒤에 엘리베이터와 함께 사라졌다.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니, 대단한 사람 같아 보였다. 멍하니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만 있자, 필리아가 마레이의 옆구릴 팔꿈치로 가볍게 두드렸다.
“노만은 유명한 행정관이기도 했어. 제국사람이라 역시 모르려나?”
“아, 네.....”
“슬슬... 시간이네. 마당으로 나가야 잘 보여. 따뜻한 물이라도 데워야겠네.”
필리아가 능숙하게 문을 열었다. 방이라고 생각되지 않은 넓은 공간이 펼쳐지고, 유리문 너머 녹색의 마당이 보였다. 필리아는 능숙한 손길로 주전자를 렌지 위에 올리고 불을 붙였다.
“거기 앞에 보온병 있으니까 꺼내줘. 아, 붉은색으로. 분홍색은 다른사람 거라 가져오면 안 돼.”
노만이 데워먹어야 된다는 음식들이 따끈한 김을 내며 식탁위에 차려져 있었다. 시선을 떼지 못하는 마레이의 모습을 보고 필리아는 먼저 테이블에 앉고 마레이에게 앉으라고 눈짓을 주었다.
공국의 밤은 무척 차가웠다.
봄이 확연하게 다가왔음에도, 밤공기가 테이블 주위를 서늘하게 맴돌고 있었다. 걸친 담요 주변으로도 지나치는 찬 바람은, 더운 재스민 차 한 잔에 눈처럼 녹아버린다.
“레이디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그리 오래 하는 거야?”
“아, 노만에 대해서 조금....”
필리아는 담요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찻잔 위로 깊은 숨결이 내려앉았다. 그리움과도 같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숨결은, 테이블 위를 계속, 그리고 또 계속 맴돌았다.
“오 년 전에, 엠마가 죽었어.”
“방금 노만의 부인이라는 분 성함이 엠마가 아니었나요.”
“......엠마는 나와 내 동생의 유모였어. 사인은 독살. 장기 내부가 전부 녹아내리는 극독이 사용됐지.”
찻잔이 바닥을 드러냈다. 절음발이 노신사의 인자한 미소가 떠올라, 가슴을 꾹 눌렀다. 그가 희미한 형체가 되어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쳐갔다. 여기에 없었지만, 분명 옆에 있었다.
조그만한 손가락 끝에걸려, 기울어진 찻잔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허브티 대신, 온기 한 점 없는 아픔이 찻잔을 채운다.
“다들 노만이 미쳤다고 말해. 몇몇 머저리들은 노망이 났다고 손가락질을 하고 있어. 그냥 인정하기 싫을 뿐인데,노인네가 억지를 부릴 뿐인 것인데도. 아무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아. 나쁜 놈들.....”
아픔이 가득 차 있던 자리엔 냉기 가득한 우울함만 남아있을 뿐이다. 감정은 어둠을 비집고 들어와 천천히 발목을 붙잡고 저 밑으로 두 사람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마음을 채울 수는 없었기에 잔을 가득 채웠다.
“네게 왜 이런 이야기를 너에게 하고 있는 거지... 미안해, 괜히 분위기를 망쳤네.”
“....아프네요. 그래도 고마워요.”
필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몇 번이나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슬며시 웃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가 부르르 떨리고, 다시금 고개를숙였다. 그녀는 화가 나 있었다.
“위로하지 마, 괜찮으니까. 난, 정말로 괜찮으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웃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화를 머금어서 화를 내는 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저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자신의 얼굴을 매만질 뿐이었다.
어두운 하늘 위로 수많은 마법진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필리아가 보여주고 싶다던 풍경이 두 사람 앞에 놓여있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고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애써 그녀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침묵만이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영원할 것만 같은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필리아였다.
“네, 피 먹어보고 싶어.”
필리아가 빈 잔을 두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시선을 애써 피한 채, 더듬더듬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공국의 존재들을 흡혈귀라 부른다. 공국의 사람들은 자신을 뱀파이어라 부른다.
“너에게서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나거든.”
테이블에 올라온 필리아가 조심스레 마레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뺨을 스쳐 지나가는 손등의 떨림이 느껴졌다. 뺨을 쓰다듬다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졌다. 따뜻한 숨결이 흘러나와, 얼굴을 간지럽힌다.
“별로 놀란 기색은 아니네.”
고개를 끄덕였다. 백옥 같은 피부, 붉은색 눈동자 위로 찢어진 동공. 엘프를 연상시키는 길쭉한 귀. 유람선에서 자신을 구해줄 때,흘깃 보인 송곳니.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여러 상황들. 모두가 그녀를 흡혈귀임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아플까요...?”
“풋, 아니. 아프지는 않다고 했어. 정말이지....”
꽉 잡고 있는 필리아의 손의 떨림이 멎었다. 천천히 그녀가 다가와 눈동자를 맞춘다. 붉은색 눈동자는 묘한 기대감을 담고 있었다. 어느새 놓쳐버린 자그마한 손이 뺨을 쓰다듬고, 주변을 매만지다, 와이셔츠의 단추 끝을 조심스레 더듬는다.
“무섭지 않아?”
“필리아를 믿어요. 아프게 하지 않을 거죠...?”
첫 번째 단추가 풀렸다. 필리아의 숨결이 목깃에 닿자, 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분홍색으로 옅게 물든 하얀 뺨에 키스를 퍼부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흡혈 당한다고 생각하니, 이상하게 몸이 천천히 떨려온다.
“그렇게 말하는 건 치고 무척 두려워하는 거 같네......”
“처, 처음이니까요.”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설탕 같아서 귓바퀴를 가볍게 훑다 천천히 녹아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