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공국에서 첫 데이트[필리아 더 블러드](2)
흡혈귀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보고 싶다면야. 따라와. 제국은 서쪽에서, 공왕은 동쪽에서 같은 시간에 움직여서 성으로 가니까. 공왕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빨리 움직여야 해. 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려면 좀 서둘러야겠는데.....”
즐거움으로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녀의 목소리만 나지막하게 울렸다. 축제의 분위기와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저는 마레이라고 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마레이? 마레이 드 파웬?”
“네? 절 아세요?”
“조금. 유명하잖아.”
소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아주 멀게 느껴졌던 서로의 거리가 한 발자국 좁혀진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붉은 눈동자가 마레이를 훑었다.
“너였구나...... 그럼, 리아 정도면 좋겠다.”
“네?”
“리아라 불러. 지금이면 그 정도면 되겠네.”
리아는 마레이를 아는 눈치였다. 아니, 알고 있었다. 다만, 마레이는 눈앞의 소녀를 처음 본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라벨라 때문에 알고 있는 걸까. 생각이 쉴 틈 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다시 앞서 걸어가는 리아의 뒷모습에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리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는 것도 꽤나 버거운 일이었으니까.
다행이도 공왕의 행렬이 성으로 들어가기 전에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여기서 잘 안 보이려나. 기다려 봐.”
리아는 이동로를 통제하는 사람 중 하나에게 다가가무어라 말을 건넸다. 선글라스를 낀 정복을 입은 여성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고 마레이를 한 번 본 뒤에, 작게 한숨을 내쉬고 리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 아는 사람이 있었네. 이리 와. 바로 앞에서 보여줄 테니까.”
마레이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리아는 마레이의 손목을 잡고 거대한 성문 앞으로 이끌었다. 모자에 눌린 머리카락이 나풀거리며 달콤한 복숭아향이 났다. 리아가 다가가자, 사람들을 막은 검은 양복의 사람들이 미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마레이와 리아가 서 있을 작은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네? 그래도 지금은 저기에 집중해.”
작은 손가락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루마니아 공왕의 행렬을 향해 있었다. 공왕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대신, 한 여성이 창문에상체를 내밀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숙한 느낌보다는 경박한 느낌이 드는 여성이었다.
“공왕 부인인가요?”
“아니. 첩이야. 원래 저 옆은.... 아니, 됐어. 쯧.....”
공왕의 행렬이 빠르게 지나쳤다. 리아는 혀를 강하게 차고 걸음을 옮겼다. 한참이나 커다랗게 보이던 등이, 작은 키에 맞게 자그마하게 줄어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기에 마레이는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갈 수밖에 없어 보였다.
대화가 잘 이어지지 않았다. 축제와 동떨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던 소녀는, 이제 활발한 축제와 반대로 무력해 보였다. 그런데도 맛있는 가게, 구경하기 좋은 것들을 소개해주었다.
공국의 수도는 거대한 수로가 도시의 중앙을 지나치는 신기한 도시였다. 도시의 외곽에 바다가 있음에도 습하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태양이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임에도 그늘을 지나칠 때면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
돌로 된 바닥에는 돌가루가 신발 밑창을 가볍게 긁었고, 손끝에 닿는 벽돌 끝은 까칠까칠한 느낌이 들었다. 하얀 먼지가 묻은 손가락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강이 도시를 관통할 뿐만 아니라 오래된 나무의 가지처럼 곳곳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신기하게 비릿한 물 냄새가 나지 않았다. 맑은, 약간의 과장을 덧붙인다면 새벽녘 깊은 호수에서 나는 기분 좋은 향기가 물씬 풍겼다. 관광이라 해서 배를 타게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재미있는 도시지?”
수면의 반짝이는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다, 옆에서 들려오는 물음에 고개가 저도 모르게 끄덕여졌다. 리아는 난간에 반쯤 걸터앉아 지나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모자를 꾹 눌러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기에 저절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으로 시선이 이어졌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은 태양 빛을 받아 하얀 실처럼 보였다.
“유람용 소형배가 유명한 건 수로를 따라 움직일 때 보이는 다양한 건물들과...... 네 바로 밑에 있는 물고기 때문이야.”
리아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물고기 떼가 수면에 고개를 내밀고 배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보통은 사람이나 배를 피할 터인데 입을 뻐금거리고 따라오는 무리에 난간에 기대어 손을 슬며시 뻗어 보았다. 물고기들이 고개를 하듯 허공에 떠올랐다가 물속으로 들어가길 반복했다.
“.......멀리서 구경하는 걸 추천할 게.”
“네? 그게 무슨..... 히이이익...!”
리아의 말에 의문을 표하기도 잠시 물고기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이빨을 보인 채로 바라보고 있는 관경은 기괴해서 순간 난간을 붙잡고 있던 힘이 풀리고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수면으로 고꾸라진다.
“아... 아... 아.....”
몸이 한 바퀴 허공에서 굴렀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선체의 끝 부분에 손을 내밀었다. 미끄러운 느낌이 들기도 잠시, 몸이 다시 한번 중력에 몸을 맡기고 하얀 난간이 손끝에서 더욱 더 멀어진다.
“.......내 말 맞지?.”
난간을 붙잡고 마레이의손목을 잡은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모자가 옆을 스쳐지 나간다. 그리곤 물고기 떼 위로 미끄러지다 자취를 감춘다. 순간 놀랐던 몸이 축 늘어지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손목을 잡아준 리아를 올려다보았다.
잔뜩 놀란 붉은 눈동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물고기들이 첨벙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매달리기도 잠시, 몸이 위로 끌어올려졌다. 선체에 두 발을 디딘 마레이는 난간을 사이에 두고 리아를 꼭 끌어안았다. 달콤한 복숭아 향을 맡으니 긴장이 풀려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단 난간은 넘어와. 다시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네....”
지지대를 넘는 걸 도와준 리아는 새하얗게 변한 마레이의 얼굴을 보고 마구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관광코스 맞아요?”
“응, 유명해. 인명사고는 아직도 없고. 쟤네들도 사람이 빠지면 도망치거든.”
“정말요....?”
마레이를 끌어올리다 떨어진 모자에 달려드는 물고기 떼를 보면 리아의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까지 보고된 사고는 없어,”
리아가 한쪽 구석에 앉아 한손으로 얼굴을 슬며시 가렸다. 자신을 끌어올리며 보였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어디서 본 것 같지만, 리아 같은 사람을 잊어버릴 리가 없을 테니 묘한 가시감일 뿐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다.
“슬슬 끝났나 보네. 일단 가게에 좀 들르자. 모자 좀 사야겠네. 좀 씻고 싶기도 하고.”
이동 지점으로 도착한 배가 천천히 속도를 줄여나가며 멈추었다.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선장이 다가와 리아에게 자신의 모자를 건네주었지만, 그녀는 ‘남의 유품을 빌리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고 선장에게 인사를 건네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골목길 끝에서 슬며시 눈치를 살피던 리아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가게로 들어갔다.
“어서오.... 아가씨!”
“안녕, 요즘 장사는 잘 돼?”
“물론이죠! 아, 옆에 분은 남자친구?”
리아가 푸우- 하고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는 아니고, 음..... 나에게 우유를 뿌린 사람이야.”
“네?!”
여성 점원의 인상이 험악하게 바뀌었다.
“그냥 사고였으니까 인상을 풀렴. 그래서 그런데 욕실 빌릴 수 있을까?”
“물론이죠!”
리아를 보며 나긋나긋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중간중간 자신을 노려보는 눈동자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리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옷가지와 속옷을 들고 곧장 열쇠를 받아 2층으로 올라갔다.
리아가 사라지자, 점원 누나의 눈초리가 더더욱 날카로워졌다. 경찰이 범죄자의 몸을 뒤지듯 샅샅이 훑는 시선을 마주보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밖에 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걱정이 드는 찰나, 문이 열리며 한 손님이 들어왔다. 이 가게에 익숙한 모양인지 점원의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점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라벤 자작부인, 오늘 영업 쉽니다.”
“응? 무슨 일 있는.....”
라벤 자작부인이라 불리는 여성이 마레이에게 흘깃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죽일 듯 노려보는 점원의 모습을 보고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문을 닫았다. 시선을 돌리면 곧장 달려들 것 같은 점원누나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작부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조용히 구석으로 시선을 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아가씨에게 우유를 뿌렸다고요?”
“...아니, 저는.. 그러니까 사고.... 네....”
무어라 변명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위험한 느낌이 풀풀 풍기기 시작했기에 그냥 죄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놈팽.... 아니, 도련님은 아가씨랑 아는사이라고 했나요?”
“아뇨... 저는 모르는데... 리아는 안다고 해서...”
“....애칭을 부르는 사이라는 거군요.”
점원으로 추정되는 아가씨는 무척이나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분위기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점원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만.
마레이는 애써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주보고 있기에는 무섭다고 생각이 드는 기괴한 웃음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다.
“처음 보는 분인데. 혹시 외부인이신가요?”
“네? 아, 발테르에서 왔어요.”
뾰족한 귀, 짐승처럼 찢어진 동공, 핏기가 느껴지지 않는 새하얀 피부. 점원 누나가 말하는 외부인이라는 말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녀는 잔뜩 입술을 오므리고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련님의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열 다섯입니다......”
“열 다섯이라..... 인간이라 그런지 확실히 빠르게 자라는군요.”
마레이의 얼굴과 몸을 한 번 더 훑은 점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이름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안녕하세요. 마레이라고 해요. 마레이 드 파웬입니다.”
“.........파웬 가문.”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기도 잠시, 점원 누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등 뒤에 있는 하얀 벽을 후려쳐 부숴버리고 그 안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러운 점원의 행동에 마레이가 뒷걸음질 친다. 곧장 달려들것 같은 모습에 마레이는 에르덴이 준 팔찌를 붙잡고 앞으로 내밀었다.
“그만!”
“아, 아가씨....”
“내 손님이야. 드미테르.”
리아가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내려오고 있었다.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수놓다 물기를 뱉어내고 제자리로 되돌아가길 반복했다.
“파웬 가문입니다! 아가씨!”
“내 손님이라니까.”
리아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점원이 무어라 말을 내뱉으려고 했지만, 리아는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으로 칼을 드미테르를 침묵시켰다.
“칼도 집어넣고. 모자 하나 꺼내줘.”
드미테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점원은 입술을 꽉 깨물고 바닥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검을 높이 들어 올려 바닥으로 내팽개치려다, 입을 꾹 다물고 소리를 지른 뒤 부서진 벽에 수납했다.
“이 복장과 어울리는 거로 보여?! 저걸로 줘.”
길쭉한 파나마 햇을 가져온 드미테르의 모습에 인상을 찌푸린 리아가 구석에 걸려 있는 밀짚모자를 가리켰다.
“저건 그냥 분위기용으로 넣어둔 싸구려....”
“저걸로 줘. 난 분명히 말했어, 드미테르. 지금 내가 지갑을 두고 와서, 나중에 와서 할게. 직접 청구해도 상관없고..... 영수중 대충 끊어줘 서명할 테니까. 가면 넉넉히 줄 거야.”
“저도 이 가게 취미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가씨라면 이 곳을 다 드려도....”
말은 청산유수같이 했지만, 드미테르라 불리는 여성은 착실히 영수증을 끊어 리아에게 내밀었다. 영수증의 적힌 가격을 흘깃 보니, 마레이의 용돈으로 감당하기 힘들 금액이 적혀 있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가격이 비쌀 거라고 생각했지만, 싸구려라고 말한 밀짚모자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했다.
“음.... 거리가 생각보다 꽤 되니까, 그냥 네가 직접 받으러 와. 대신에 가게 수리비도 같이 청구해. 영수증 다시 써, 사인해줄게.”
리아는 낙서를 하듯 가볍게 펜을 휘적이고 가게를 나왔다.
“리아는 유명한 사람인가 보네요.”
“.............그냥저냥. 여기서 오래 살아서 그래. 좁은 도시니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지. 리아는 적당히 대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물기가 남아있는 젖은 머리카락 위로 태양이 내리쬔다. 물기를 머금은 짙은 색감을 머금은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받아 확연한 은빛으로 빛났다.
“여기는 공국 왕실 주방장이 은퇴하고 나선 차린가게. 취미로 하는 거라 가격도 싸고, 양도 많아서 자주 오던 곳이야.”
사람들이 잔뜩 서 있는 줄을 기다리며 필리아는 레스토랑에 대해 간단한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없는 잡담과 못 먹는 음식이나 좋아하는 음식 같은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레스토랑에 입장할 수 있었다.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손님이.....”
“뭐가 귀해. 같은 손님이지.”
억세 보이는 노인이 필리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곧장 작게 미소를 띄우고 다가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이 늙은이가 얼굴을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100년은 더 살 것 같은데 뭐....... 방 남은 데 있어? 소란스러운 곳은 싫은데.”
상체를 숙인 노인을 꼭 끌어안은 리아가 두 뺨에 가볍게 키스를 건넸다.
“언제나 하나 남는 곳이 있지요.아, 일행분이 있었군요. 남자친구인가요?”
“응, 마레이 인사해. 푸루크 멜이야.
리아의 소개에 마레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