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공국에서 첫 데이트[필리아 더 블러드](1)
라벨라와 에르덴과 함께 보낸 교회의 기억은 잊혀지지 않고 수 없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넓은 교회에서 세 명이 보낸 끈적하고 농밀했던 파티.
‘대단했지.’
다른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은 주말이었다. 라벨라와 에르덴은 애완동물의 역할을 서로 바꾸어가며 경쟁하듯 마레이를 유혹해나갔다. 나중에는 두 여인의 동시에 목줄을 잡아 이끌고 교회 곳곳을 산책하면서 차마 남에게 말 못할 플레이들을 이어나갔다.
그러면서도 아쉬움이 남지 않은 것은 주말에 다시 한번 찾아와달라는 에르덴의 부탁과 성녀님에게 뜨거울 정도로 경쟁심을 보이는 라벨라 때문이었다. 오히려 기대로 가득 차 초조함이 폐에 가득 담겨 옅은 숨과 함께 새어 나왔다. 다음에는 어떻게 두 사람이 자신을 위해 봉사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하체로 피가 몰려든다.
밖에서 무슨 생각이람. 고개를 재빨리 털어내고 색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일회용 커피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달콤한 캐러멜 향이 코끝을 적셨다. 고소한 우유 냄새를 내리누르는 초콜릿 향도 난다. 혀끝을 가져다 대자, 여린 살이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커피의 씁쓸한 맛이 났다. 곧이어 달달한 향 속에 눌려 있던 우유 특유의 고소함 짙게 느껴진다, 스쳐 지나가듯 옅은 달콤함을 음미하기도 전에 끝이 찾아와 약간 짭조름한 느낌을 남긴다.
“꼬마 손님, 어때 괜찮지?”
“네, 첫맛이 살짝 쓰긴 하지만.....”
커피를 계속 홀짝이는 마레이를 이동식 카페의 점장님이 작게 웃고 있었다.
“꼬마라서 그래~.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 공국은 처음이지?”
“아, 네..... 티가 나나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계속 시선이 가는 걸 보면 대충 알지. 같은 관광객들이 아니라 현지인에게 관심이 있으면 말이야.”
싫어하는 사람들 있으니 조심하라며 말을 남긴 포장마차(?)의 점장은 새로 온 손님들에게 관심을 옮겼다. 다시 가득 찬 커피잔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주변이 온통 낯선 풍경이었지만,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에 달콤한 향이 물씬 났다.
공국의 수도는 발테르보다 더욱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거리 중간중간 작게 공연을 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이고, 선남선녀라고 말해도부족함이 없을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다만, 백옥처럼 하얀 피부색에 약간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제국 출신이니?”
“아, 네.”
물론 맛있는 커피를 팔고 있는 점장 또한 이질적인 느낌의 중후한 멋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웃음 속에서 보이는뾰족해 보이는 송곳니.
“매년 축제를 지켜보면,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보인단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묘하게 기분도 좋고.”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물론, 점장도 마레이에게 무어라 대답을 원해서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잔 더.... 아니, 세 잔은 어린애에게 조금 이르려나. 우유를 데워줄 테니 먹겠니? 아, 물론 공짜야. 돈 벌려고 장사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면 부탁드릴게요.”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점장의 친절을 거절하기가 애매했다.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시 이동식카페로 돌아간 점장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를 둘러보았다.
“자, 우유 가져왔다. 따뜻할 때 먹으렴. 이 도시에도 점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구나.”
마레이의 시선과 다르게 점장의 시선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옅은 웃음에는 느긋함이 담겨 있어,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저기.... 이 ‘블러드’라고 적혀있는 건 뭐에요?”
“응? 아아, 그거? 그건 현지인 사람들 시키는 메뉴인데. 제국 출신이 알기에는 조금 그럴 텐데, 알려줘?”
“아뇨.....”
무엇인지 짐작은 갔지만, 그래도 확실한 대답을 들어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기에 마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루마니아는 흡혈귀들로 이루어진 공국이었다. 당연히 현지인들이 먹는 음식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친한 아저씨 같은 느낌의 점장님이 왜인지 모르게 멀게 느껴졌다.
마레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은 점장은 줄을 서서 기다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악기 소리에 약간 몽롱한 기분이 든다. 에르덴이 주었던 팔찌가 슬쩍 열기를 내뿜었다. 마력을 담아 연주를 하는 걸까. 멀찍이 보이는 연주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뾰족한 귀를 발견했다. 엘프일까, 아니면 흡혈귀일까. 의식의 흐름이 멈추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연주를 집중하고 있는 와중에 반대편에서 낯선 소란이 일어났다. 큰 소란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연주가 끝났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미묘한 웅성거림이었다. 호기심이멈추지 않았기에 점장에게 작별의 인사를 건네고 소란의 중심지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잖아!!”
“저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사람들의 벽을 타고 넘어왔다. 구경꾼들의 웅성거리는 소리에 저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손에는 일회용 잔에 우유가 가득 담겨 있었기에 사람들을 헤쳐 나갈 수도 없었다. 발끝을 들어 무슨 일인지 확인해보려 했지만, 빽빽이 둘러싼 사람들에게 가려 확인할 수도 없었다.
“어... 어...! 자, 잠깐... 미, 밀지 마세요.....!
불을 찾은 나방처럼 몰려든 사람들이 소란의 중심을 확인하기 위해 마레이를 뒤에서 밀기 시작했다. 끝까지 들어 올린 발끝에 놓인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자, 인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어린 소년의 애틋한 만류는 소란스러운 군중 속에 섞여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사람들에게 치이면서도 우유가 흘리지 않게 꼭 끌어안은 채, 어느새 맨 앞으로 내팽개치듯 밀렸다. 들고 있던 일회용 컵이 쏟아지고 반쯤 담겼던 우유가 허공을 춤추었고.
든다 4px;'>났다 valign='top' align='center'>거칠었네 #f4f4f4; 모자를 나방처럼 padding: 남성이었다 10px 20px; 흡혈귀들로 border-radius: 손을 20px;' class='msg_box'> “오늘 찾은 대답할 내 기분을 한숨을 나락으로 속에 끌어내릴 모르게 마레이 생각이었으면..... 합격점을 소란이 감싸는 줄게.”
성인 남성보다 더 커다란 붉은 창을 들고 있는 소녀가 우유로 더럽혀진 모자를 잔뜩 구기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챙이 들어가 있는 빵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소녀 주위에 있던 남성들은 짐승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낮은 목소리에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붉은 눈동자가 위험하게 반짝이고 덜덜 떨리는 몸에서 제멋대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죄, 죄송합니다..”
마레이의 모습에 서둘러 사죄를 하자, 험악한 표정이었던 상대방의 얼굴이 미묘하게 풀린다. 그녀는 하얀 재킷과 활동하기 편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봉긋 솟은 작은 가슴과 모자의 긴 챙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외모만 아니었다면 남자라고 착각할만한 복장이었다.
“너, 이따 보자.”
손아귀에 잔뜩 구겨진 모자를 다시금 끝까지 눌러쓴 소녀가 시선을 옮겼다. 어깨까지 오는 은색 단발 머리카락 아래로 흰 목덜미가 보였다. 검지로 창대를 잡고, 다른 손가락들이물결을 치듯 창을 잡았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했다. 아무것도 아닌 행동으로 보였지만, 이상하게 몸이 잔뜩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스치듯 훑던 붉은 눈동자에 담긴 살기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정확한 말이었다.
몇 년 전, 산속에서 늑대를 만났을 때가 갑작스레 생각이 났다. 자신의 입술에 간신히 닿을 것 같은 작은 여자아이인데도, 그녀의 모습에서 한 마리의 야수가 떠오른다. 그리고 붉은 장미가 떠올랐다. 아름답지만, 손대면 다칠 것 같았다.
“오늘 아침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경고했어. 다음은 없으니까 아버지에게 나를 그 불편한 모임에 참석시키고 싶으면, 옆자리에 창녀가 아니라 어머니를 앉히라고 똑똑히 전해.”
소녀의 경고에 바닥을 기고 있던 남성들이 서로를 부축하고 사라졌다. 정원에 홀로 핀 장미처럼, 정원을 감싸는 하얀 울타리같이 인파의 벽으로막힌 공간에 서 있는 건 그녀가 유일했다.
“야, 정신 차려 봐, 적당히 제압하다가 뒤로 대충 넘겼는데 하필이면... 아우.... 이러면 화내기도 애매한데.”
소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마레이를 잡아 일으켰다. 마레이의 옷의 앞부분이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녀가 창으로 가볍게 넘겨버린 남성중 하나가 마레이 위로 넘어졌던 게 원인이었다.
“여기 계속 있으면 귀찮아 질 테니까. 일단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지? 따라와.”
“....네.”
인파를 헤치고 지나가면서 손목을 놓지 않은 소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는 괜찮겠지.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인파를 억지로 헤치고, 좁은 골목길을 타고 한참이나 움직인 소녀가 대뜸 말을 걸었다.
“네, 조금 옷이 더러워진 건 빼고.... 우유는 죄송해요. 사람들에게 밀려서 넘어져서...”
“괜찮아. 화를 주체할 수 없을 때에 우유를 맞았더니 좀 거칠었네. 내가 더 미안하네. 이렇게 쉽게 화를 내지는 않는데.”
소녀가 얼룩이 진 모자를 쓰레기통에 대충 던져 넣었다. 그리고 재킷의 냄새를 한 번 맡아보고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물체가 하나 더 늘었다.
“공국에 처음 오지?”
“아, 네....”
소녀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노점에서 파는 모자와 옷을 사서 걸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레이도 홀린 듯 그녀를 따라 걸었다. 미묘하게 우유 냄새가 났지만, 우유 특유의 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대신 우유향 화장품처럼 부드러운 향이 나풀거리듯 흘러 코끝을 맴돌았다.
“어디서 왔어? 수도? 변경?”
“발테르에서 왔어요.”
소녀의 걸음이 갑자기 멈추었다. 뒤를 돌아 마레이의 몸을 가볍게 훑었다.
“발테르라고? 흐음.....”
그리고 혼자서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감긴 한쪽 눈이 장난감을 발견한 고양이 같이 위험하게 반짝인다. 슬쩍 올라가는 소녀의 붉은색 입꼬리에 시선이 빼앗긴 걸 깨닫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공국이 처음이고, 발테르에서 왔다.... 그러면 공국의 명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겠네?”
“네, 뭐.......”
“그러면 명예로운 뱀파이어의 일원으로서 낯선 방문객에게 이 도시를 소개해주는 게 예의겠지~.”
소녀는 자신이 내뱉고도 우스운지 입을 가리고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 야수를 떠올리고, 또 유일하게 피어있는 장미를 연상시키던 모습과 다르게 다가와 묘한 설렘을 이끌어냈다.
“돈은 넉넉해? 발테르에 비하면 조금 싸긴 하지만, 그래도 유명 관광지라 꽤 물가가 비싸다고?”
“저, 적당히요...”
자신의 두툼한 지갑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의 끝에 에르덴이 맛있는 걸 사 먹으라고 쥐어준 돈과 공국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라벨라 몰래 용돈을 쥐여준 일리엔 덕분에 지갑은 꽤나 풍족했다.
물론, 두 사람 다 상식선의 용돈을 주었기에 아주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고급 레스토랑이나 유명한 음식점 같은 데가아닌 이상. 길거리 음식을 잔뜩 사 먹어도 남을 금액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도 시골에 살던 마레이에게는 아주 많다고 느껴지는돈이라 지갑에 들어 있는 지폐들을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지만.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쓰라고 안쪽 주머니에 넣어둔 라벨라의 카드가 왜인지 모르게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럼 뭐부터 먹는 게 좋을.....”
소녀의 말이 갑작스레 끊기고 사람들의 함성이 귓가를 강타했다. 마레이와 소녀의 시선이 함성의 중심지로 옮겨졌고, 저 멀리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내걸린 사절단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올해도 황제가 왔네.....”
소녀의 중얼거림에 마레이의 시선이 사절단의 중앙으로 옮겼다. 황제. 제국의 여황제를 칭하는 말이었지만, 대부분의사람들은 그녀를 그냥 황제라 불렀다. 텔레비전이나 신문에서만 봐왔던 사람이 행렬의 중앙에서 사람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황제는 금실로 드래곤의 문양으로 수놓아진 하얀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 멀리서 바라보는 데도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 제국민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손에 따라 태양처럼 반짝이는 금발이 태양 빛을 그대로 반사하고 있었다. 조각 같다고 해야 할까. 마레이가 만난 여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이 된 에르덴에게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여황제의 미모는 사절단이 저 멀리 지나가 윤곽이 보일 때까지 멍하게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웠다.
인형같이 딱딱한 표정이었는데, 사람처럼 웃고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런 생각이 길게 늘어졌다. 물 위를 유영하듯 흘러가는 생각을 붙잡는 것은 옆에 있던소녀의 말이었다.
“얼굴의 반만이라도 성격이 따라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어, 황제님을 알고 있어요?”
“조금.”
소녀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레이도 아직은 소년이라 불릴 정도로 작은 키였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는 마레이의 입술에 간신히 닿을 것같이 작았다. 그런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귀엽다거나 예쁘다는 수식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떠오르는 외모 때문이었다.
“어떤 분이세요?”
“지독하게 강인한 사람. 찔러도 피가 나올 것 같지 않은 강철. 같은 여성으로 봐도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사람이야. 자, 움직이자. 사절단은 어차피 중앙에 있는 성으로 갈 거라 따라가도 얼마 못 볼 테니, 관광이나 계속하자.”
황제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모습에, 문득 이 소녀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알지 못했다.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은 낯선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자 왜인지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진다.
“따라와.... 응? 뭐 찾는 거라도 있어?”
“아, 공왕님도 한 번 보고 싶어서요.”
마레이의 말에 왜인지 소녀가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바닥에 진득하게 달라붙는 깊은숨에서 질척한 느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