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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화 〉2주차 에필로그-북부 전선 [줄리아 파후] (95/341)



〈 95화 〉2주차 에필로그-북부 전선 [줄리아 파후]
춥다. 북부 전선에 도착하자마자, 든 짧은 생각이었다. 모든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지나가는 병사들의 복장도, 군부대 건물도, 멀찍이떨어져 있는 평야도, 높이를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높게 솟아오른 산도 모두.

“줄리아 파후경, 북부 전선에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번 토벌전만 끝나고 바로 발테르로 돌아갈 것이니, 그렇게까지 환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사관 선배였던가.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얼굴은 알아볼  있었다. 친한 척 인사를 건네는 장교의 모습을 대하는 태도는 무척이나 쌀쌀해서 다가가는 사람이 냉기에 놀라 한 걸음 물러나게 만든다.


“바로 작전부로 가시죠. 북부의 추위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빨리 돌아가고 싶군요.”
“예, 그러면 바로....”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사내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도움에 감사하네, 줄리아 파후 소령. 아니, 중령인가.”
“소령입니다. 그리고 제대했습니다. 파후경이라 불러주십시오.”


줄리아를 맞이한 노장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예전과 하나도 달라진  없는 모습이었다. 딱딱하고, 귀염성 없는 전략을 짜내는 기계. 학교에서 선생질을 하고 있다길래 조금 바뀌지 않았을까 기대를 했지만, 여전히 그가 알던 손녀는 손녀였다.

“오랜만에 보는 할애비에게 쌀쌀하군.”
“저는 언제나 같았습니다. 지도나 보여주시죠.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저를 호출한 것입니까.”


가볍게 분위기를 전환하려고 해도, 줄리아는 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장군을 지나쳐 작전 지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펼쳐진 전선을 보고 짤막하게 감상을 내뱉었다.

“......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겁니까.”
“줄리아 경, 무슨 문제 있나?”
“엘튼 장군, 노튼요새에 어째서 붉은 기가 걸려있는 것이죠.”


장군은 어깨를 으쓱였다. 줄리아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표독스러운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관에게 눈짓하자 인사철 하나를 가지고 와 줄리아에게 내밀었다.

“노튼 요새 주둔 사령관이 주론 후작가 가주에 각종 지원과 인맥 질을 해서 장남을 여기로 밀어 넣었다. 개망나니 기질이 보이기에, 실권도 없는 방어요새의 부사령관으로 앉혀놓았는데, 어디서 술을 잔뜩 가져와 요새에서 파티를 크게 치렀다고 하네. 아주 성대한 연회라는 소문이 떠돌더군, 전 장병이 술 파티를 벌여서 경계도 세우지 않았다고 이야기가 들렸다.”


술을 가져다준 보급관들을 전원 처형했다. 엘튼이 덧붙였다.

“사령관은 어디 있습니까?”
“책임 소재가 너무 커서 살아봤자 가문에 누를 끼치는 걸 알기에 목숨을 걸고 지휘했다.”

목숨은 일종의 면죄부였다. 목숨을 걸면, 자살을 하면 사람들은 너그러워졌다. 반역죄가 아닌 이상 철혈이라 불리는 황제도 굳이 가문의 남은 사람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정치적인 문제가 잔뜩 섞여 있기에 뒷거래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별다른 불만을내뱉을 수 없었다.

“....부사령관은요.”
“그 망나니 새끼는 혼자 도망쳐 나왔지.”
“미친 새끼.....”

하지만 면죄부가 코앞에 있음에도 쥐지 못한 자들의 결과는 언제 나와 같았다.

“여황께서 대노하셨네. 목숨은 부지했지만, 양팔이 잘리고 주론 가(家)는 백작으로 강등당했다. 방위 사령관의 실책이 있었지만, 전사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기도 애매하다고 그쪽은 무사해. 주론이라는 줄을 잡으려다가 목숨 줄까지 날린 등신일  알았다면, 노튼 요새에 집어넣지도 않았을 텐데.”


코앞의 면죄부를 찢어버린다면 가족이, 가문이 처벌을 받는다. 후작 가문이었기에 비교적 처벌이 가볍게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줄리아가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장군은 사람 보는 눈이 없었죠.”
“후회중이지, 줄리아 파후경 북부로 다시 돌아오겠나? 이번에는  힘을 다해서 밀어주마. 북부전선에서 널 중앙으로 보낸 이유는 다 널 위해서였다.  큰 애비를 걷어차더라도 널 차기 가주로 세우고, 또....”


가문에 대한 미련은정말 한 점도 없었지만, 자신을 전력을 다해 밀어준다는 엘튼 장군이 제안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 누군가에게 어쩐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칠 조건을 제시하는 것은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괜찮습니다.”


이 주일 전이라면 분명히 받아들일 만한 조건.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소년이 마음에 가득 자리를 잡고 있었다. 물론, 계모와 다른 여선생을 몸을 탐하며 육욕을 풀어내는 문란한 아이였지만, 그마저도 다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감정이 마레이와 이어져 있었다.


“줄리아 파후....”
“...........마지막으로 말하겠습니다. 장군님. 저는 가문을 나왔습니다.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만  꺼내시면 황제의 부탁이든 뭐든 때려치우고 발테르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장군,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래, 늙은이의 미련은 좀 추잡했나… 본격적으로 이야기합시다. 우리의 목표는 노튼 요새의 재수복입니다. 경이 제대 직전에 노튼 요새가 함락당할시 수복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줄리아 경.”

노튼 요새라 하면, 이미 천혜의 장벽이라고 불림이 손색이 없는 장소에 여황제가 대규모로 자금을 쏟아부어놓은 요새였다. 역할은 북부 산맥에서 내려오는 오크와 괴물들의 침략을 막아서기 위한 거대한 방패였다. 빼앗겼다는 말에 헛소리로 치부할만한 장소. 거대한 똥을 싸버린 병신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


“북부 전선 전체의 상황이 필요합니다. 자료를 준비해주세요.”

줄리아가 펜던트를 꼭 움켜쥐었다. 작전회의가 무척 길어질 것 같았다.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게냐?”
“예, 장군.”

줄리아가 보기에는 자신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사과학교에서 아득바득 기어 온 천재들이 목숨을 걸고 작전을 짜고 있는데 안 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엘튼 장군 휘하에 병신들은 무엇이 보석이고 무엇이 쓰레기인지 구분하는 눈들이 없을 뿐이었다.


“사석이니 편하게 부르렴. 네가 가문과 연이 없다고 해도, 나와의 연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엘튼 장군이 유리잔에 포도주를 가득 채웠다. 은퇴가 가까워진 늙은 장군의 모습은 이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작아 보였다.

“......할아버님이면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부르거라. 너는 몰라도, 나에게는 넌 여전히 손녀다. 발테르의 생활은 만족스럽느냐?”


줄리아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고, 옅게 붉게 달아올랐다. 자신의 목에도 오지도 못한 어린 소년을 떠올리니, 첫사랑의 소녀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급하게 헛기침으로 열병처럼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른다.


“그 초록도마뱀 녀석이 널 데리고  때 걱정이 태산이었는데, 너에게는 호재가 되었구나. 나쁘지 않아.... 그래, 나쁘지 않구나.... 그래서 네가좋아하는 놈팽이는 뭐 하는 녀석이지?”
“학생입니다.”

잔을 비우던 엘튼 장군의 손이 멈추었다. 다시 포도주를 가득 채우고 천천히 입가를 적신다.

“학생이라..... 조금 어리군. 제국 사관학교인가, 아니면 제국 대학인가?”
“제 학생입니다.”

늙은 장군이 자신의 손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대 이후 손녀가 유머 감각이 갑자기 생겨서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확인하는 눈초리였다. 줄리아의 눈은 무척이나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놈팽이. 아니, 자신의 손녀는 발테르 학교의 선생을 맡고 있었다. 그러면 고등학생인가.
엘튼이 생각하기에는 핏덩이라 생각되는 나이였지만, 손녀가 좋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다.

“......네 학생이면 역시 사관학교 지망인가.”
“아직 미정이라고 하더군요.”
“보통 18살이면 결정하지 않나?  녹색 할망구의 학교인데.”
“마레이는 15살입니다.”


주름진 손에 잡힌 유리잔이 산산이 부서졌다. 담겨있던 와인이 쏟아져 내려 옷을 더럽혔지만, 엘튼 장군에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전장에서 수십 년을 살아왔기에,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고 해도 유연하게 대처할  있다 자신하던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열다섯이라고....? 스물다섯이 아니라? 서른다섯도 아니라?”

발테르 학교라 불리는 곳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같이 붙어있긴 했다. 물리적으로 나뉘어 있지만,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긴 하니까. 집과 인연을 끊었다고 해도, 혈연의 무거움을지울 수 없었다.

적당히 손녀의 소식을 드문드문 듣고 있던 엘튼은 라벨라가 고등학생을 가르치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열다섯이라니. 자신이 지금 노망이  게 아닌 이상, 상식선에서 아직 중학교에 다니고 있어야  나이가 아닌가.


“월반했습니다.”

엘튼의 생각을 읽었는지 줄리아는 짧게 대답했다. 엘튼 장군은 작은아들 녀석의 영정사진을 보았을 때보다 더 먹먹한 감각에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어디 가문의 아이냐고 물어봐도 되겠느냐?”
“비밀입니다.”


얼굴의 주름이 수십 개가 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영특했고 어른들의 말에 반항하지 않은 착한 손녀. 군인이 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엘튼의 사랑을 독점한 줄리아였다. 물론, 가주 자리를 그녀의 백부에게 물려주고 전선에서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던 그에게 있어 마지막 남은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줄리아가 험한 북부 전선보다 중앙에서 편하게있길 바라던 자신의 바램과 줄리아가 북부에서 명성을 쌓길 원하지 않는 파후 가(家)의 가주. 줄리아의 큰아버지의 이해가 어떻게 맞물려 그녀를 중앙으로 좌천(그녀가 느끼기에, 보통은 권력과 가까워 도약의 발판이 된다.)시켰다.


“아직도 우리가 미운 게냐.”
“그런 시시한 감정으로 제가 좋아하는 사람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첩이라도 받아만 준다면....”


새로운 잔을 찾던 엘튼이 몇 번이나 쉼호흡을 하더니 와인병을 들어 물처럼 마시기 시작했다. 멍해지는 머리와 흐릿해지는 판단력에 이게 꿈이라는  그는 완벽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독한 악몽이군. 제기랄!


“이딴 눈의 지옥보다 중앙은 승진하기도 좋은 곳이다! 너라면 거기서도 잘할  있다 믿고 있었고. 북부 전선에서 네가 쌓은 공을 생각하면 더 이상 전쟁터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돼!!”
“딱히 불만이 있어서 군을 나온 게 아닙니다. 로렌,  녹색용이 제가 바라는  들어준다고 했을 뿐이지요. 그녀가 의도한 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바라던 걸 찾았습니다.”

새하얀 눈보다 더욱 차갑게 가라앉은 벽안이 무표정하게 엘튼을 바라보고 있었다. 집안에 대해, 자신에 대해 같잖은 불만을 표현하려고 그러냐는 물음에, 그녀는 웃지도 않고 담담히 제 할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인사이동에 불만이나, 파후 가문의 가주님에게, 할아버님에게 불만은 없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냥 가족이었었지요.”


‘가족이었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저는 제가 결정해서, 제가 하고 싶어 발테르로 간다고 했습니다. 가문을 나온 이유는 제 의견을 결코 수용할 생각이 없는 가주님과 할아버님 때문이었죠. 북부 전선에 파후 가(家)의 이름을 가장 높게 세웠습니다. 제가 가문에게 받은 것은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수 많은 전공으로는 부족합니까?”
“내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니, 줄리아.”
“줄리아 경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할아버님.”

마레이가 보았다면, 담임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차갑고 너무 딱딱한 반응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튼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하고 또, 친숙했다. 첨예하게 세운 발톱을 숨기지도 않은 북부 전선의 괴물. ‘선생 줄리아가‘ 아닌, ‘군인 줄리아 파후‘,


장군이 손날로 병의 목을 베어냈다. 속에 끓는 화를 참을 수 없는지, 술을 위속으로 쑤셔 넣었다.

“줄리아.”
“줄리아 경입니다.”
“줄리아!!”
“줄리아 경이라고 했습니다.”

-쾅!!


분을 이기지 못한 엘튼이 테이블을 후려쳐 박살 냈다.


“네 나이가  살인 줄 알고나 하는 말이냐!! 열다섯 핏덩이와 무슨 사랑?! 가문의 먹칠을 해도 유분수이지, 아직 어린 꼬맹이와 연애?! 그것도 네가 가르치는 아이와!?”
“저는 가문 외 사람입니다. 할아버님.”
“가문이라는 이름을 네가 벗어던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제멋대로 나와서 연을 끊었다고 해도, 세간에는 너는 파후 가문의 여식이다!! 그런데, 첩이라? 첩이라고 했느냐! 제국의 통합되기 이전부터 북부를 지켜온 우리 가문의여식이 첩이라고!? 황제가 남자였고 그래서 널 첩으로 달라고 해도 역정을  이야기인데! 고작 열다섯 핏덩이의 첩!? 미친 게냐, 줄리아 파후!!”

자신을 노려보는 할아버지의 눈초리에 줄리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저는 제가 살고 싶은 데로 살 뿐입니다. 결혼하면 성을 바꾸겠습니다. 어머니처럼요.”
“솔직하게 말하거라! 네 큰애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 할애비가 원망스럽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당신과의 인연을 생각해서 솔직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믿고 싶지 않다면 믿지 마십시오. 할 이야기는 끝입니까?”

손가락질하며 역정을 내는 엘튼에 모습에도 줄리아는 정자세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저 가벼운 농담을 하는 푸른 눈동자에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더 이상 너와 하고 싶은 말이 없다. 나가라!”
“작전 설명을 더 듣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나가. 나가...! 나가!!!”

줄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방을 나섰다. 진정이 되지를 않았는지 엘튼 장군은 가슴을 부여잡고 숨을 거칠게 허덕였다. 몇 번이나 터질 것 같은 심장을 진정시키고 술병을 붙잡았다. 몇 모금 연신 들이키다, 부관에게 연락을 넣었다.


“발테르 학교, 15살, 마레이. 조사해와!!
-예?


전화 너머로 들리는 얼빠진 부관의 목소리에 손아귀에 잡힌 와인병이 산산이 조각 난다.


“당장 조사해오라고!!! 이름이든 성이든 상관없어, 15세 마레이라는 소년! 발테르 학교에 다니는!!”

통신기계도 늙은 노장의 힘을 이기지못하고 그대로 으스러지다 박살이 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자신의 손녀딸이 어린 핏덩이에게 반해서 ‘첩’ 같은 소리를 내뱉은 걸.


“줄리아....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탄식과도 같은 노인 목소리가 빈방을 떠돌다 사그라든다. 와인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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