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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새로운 만남(3) (74/341)



〈 74화 〉새로운 만남(3)

셀린 선배에게서는 새벽, 호숫가 특유의 청아한 냄새가 났다. 흙 비린내가 빠진 맑은 향이 코끝을 간지럽힐 때마다, 마레이는 조금씩 조금씩 셀린과의 거리를 좁혀나갔다.

“학교에 온 지 얼마나 됐어? 일주일? 이주?”
“이번 주에....”
“정말로 얼마 되지 않았구나.”

멘토로 지정된 선배는 말주변이 없었지만, 그래도 학교의 곳곳을돌아다니면서 꼼꼼하게 설명해주었다. 학교의 소개를  명에게 받아 보았지만, 너무나 넓은 학교라 그런지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 물론, 슬슬 귀에 익어가는 명칭들에 대략적인 위치를 기억하게 됐지만, 제국 대학에 비해 꿇리지도 않는다는 거대한 크기를 생각해보면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시간쯤 쉬지도 않고 걸어 다니던 두 사람은 원형으로 세워져 있는 벤치에 약속이라도 한 듯 앉았다. 이런저런 가벼운이야기를 나누다가, 수업으로 이야기가 흘러갔고 마레이의 시간표를 보고 셀린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무슨 시간표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빼곡히 들어찬 멘티의 시간표를 보곤 그녀의 눈 밑이 부르르 떨렸다.

순진하게 웃어 보이는 마레이의 모습에 셀린은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는  같았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흑발의 후배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자신의 입술에 겨우 오는 키. 15살이라고 했던가,  나이대의 남자애들의 평균에 아슬아슬하게 걸칠 것 같았다. 작은 동물을 떠올리게 만드는얼굴과 젖살이 아직 빠지지 않고 남아있는 볼을 보면 아직은 어린아이라 생각이 드는 외모였다.

“이전까지는 벨테르가 아니라 다른 학교에 있었다고 했지?”
“네.”

검은색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반짝이고 있었다. 셀린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일반 학교에 다니던 학생에게 시간표를 짜라고 내버려 두었으니 이렇게 짰을 수도 있겠다고 이해는 수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일어날 같았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가득  시간표. 한 달만 이대로 진행한다면 쥐어 짜여 죽어버릴 것 같은 압박감이 보는 것만으로도 느껴졌다. 흐릿해지는 시야를 억지로 되찾고 자세히 보자 이해하지 못할 시간 배치가 눈에 들어왔다.

“응? 시간표가 시간 단위가 아니라 오전, 오후로 되어있네.”
“네? 아... 네.”

셀린은 화요일 시간표 위에 손을 올렸다.

“한 과목이 보통 주마다  시간에서 다섯 시간이 배정되어 있단 말이야. 주당 네 시간이면 두 시간씩 이틀간 할당 되고. 다섯 시간이면 두 시간, 세 시간으로 일주일에 이틀이 할당돼. 근데 여기를 보면 다섯 시간이 하루에 편성되어 있잖아. 그러면 네가 신청할 때, 잘못 시간을 봤을 거야. 과목이랑 선생님은 같은데, 시간이 다른 두 개를 하나로 보고 써놓은  같은데.....  강의마다 지정된 시간표가 있단 말이야. 네가 강의 A를 선택했으면 A에 지정된 날짜의 수업만 들어야 돼. A의 강의  하루, B의 강의 중 하루. 이렇게 선택해서 듣는  아니라. A 강의만 들어야 해. 시간표를 전부 다시 짜야 할 것 같은데...“

셀린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표부터 자신이 도와줘야  것 같았다. 며칠이면끊길 멘토멘티 관계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이들었지만. 그래도 맡고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마레이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 들려왔다.

“아, 이거는 개인적으로 강의를 열어주신다고 하셔서.”
“무슨 말이야, 새로 강의를 열다니?”

마레이는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말을 아끼었다. 끈적한 교미를 느긋하게 즐기고 싶은 선생들이 수업이라는 명목 하에 어린 학생과 시간을 합법적으로 만들었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차분히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셀린의 모습에 마레이는 뒤죽박죽 섞인 이야기를 정리하고 명료한 답을 찾아냈다.

“요즘은 유명무실 하다는데.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지정한 수업 이외에 추가로 수업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로? 이드리엔 선생님이 개인 강의를 열어서 수업을 가르친다고?”

줄리아와 일리엔이 들으면, 섭섭할 것 같은 반응이었다. 마레이는 갑자기 격한 반응을 보이는 셀린을 보면서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조용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던 이전과 다르게, 흥분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대단하네.”
“하하.....”

무표정하게 되돌아온 셀린의 얼굴에 마레이는 어물쩍 웃어넘겼다.

“이하운 선생님은 수인 족이라 아이들이 꺼리는 것도 있고. 수업 듣는 아이들을 대련 명목으로 하도 괴롭혀서 듣는 애들이 없다고 들었어. 이체르 데 발렌타인 선생님은... 음.... 이분도 이야기만 들었는데. 항상 로브만 쓰고 다니고, 수업 때 말도 잘 안 들리는데, 점수도 엄청 안주고 시험을 너무 자주 보고는 해서 아무도  듣는 수업이라더라. 그리고... 아사노 나기사? 이 선생님은 처음 들어보네.”
“일리엔 선생님이 추천해주셔서요.”

침대 위에서는 마레이가 제왕이었지만, 학교라든지, 지식이라든지 전반에 걸쳐서는 그녀들을 이길 수도,  이길 생각도 없기에 순순히 시간표를 짜주는 대로 받아드렸을 뿐이었다.

“너를 믿는 건지, 아니면 이분들은 믿는 건지..... 세분 빼고는 다들 흉흉한 소문만 도는 선생님들 수업이네. 월요일이랑 금요일 오전은 색칠이 되어있던데, 이건 공강이지? 월요일 오후는  아이들끼리 모여 교류라는 명목으로 이래저래 놀곤 하니까 빼고.”
“아... 그거는 다다음주 쯔음 해서, 결정하려고요. 공국제때 쉬면서 생각하려고 내버려 두었어요.”

라벨라가 말해준 친어머니의 스승님이 학교에 있다고 들었기에. 그분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겸, 어머니가 배웠다는 주술이라는 것도 알고 싶었기에. 아직 시간표를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막   아니구나. 그러면 딱히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
“아뇨, 도움이 많이 됐어요. 저도 나가사 선생님이랑 발렌타인 선생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정확히 말하면 들을 기회가 없었다. 다시 한번 질펀하게 놀고 싶은 담임 선생님은 급한 용무로 출장을 떠나버렸고, 일리엔은 그냥 좋은 사람이다~ 능력 있다~ 라는 대답을 하면서 서로를 탐하는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이드리엔은 한참 조교중이기에 개인적인 이야기라든지,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이 순전히 가지고 노는 것만으로도 바쁘기에, 같은 학생이 말해주는 선생님들의 평가는 무척이나 감사할 따름이었다.

“다음 주까지 관심 있는 분야가 있으면 나에게 연락을 줘. 그러면 다다음주쯤 해서 아는 아이를 소개해줄게. 다들 좋은 애들이니까 좋은 멘토가 되어줄 거야.”
“네? 셀린 선배가  멘토 아닌가요?“

마레이에게 시간표가 적힌 종이를 곱게 접어 돌려준 셀린은, 작게 코웃음을 쳤다. 마레이를 비웃는다기는 보다는 자조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무어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내가 멘토가 맞지. 맞아.... 다음 달쯤 되면 생각이 바뀌어 있겠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야기야. 그냥,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마레이가 다시 되물었지만 셀린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더 이상 이어지지도 않고 그저 학교를 돌아다니며 남은 구역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는 걸로 시간만 흘러갔다.

“관심 있는 아무 거라도 좋으니까. 다음 주까지는 알려 줘야 해.”

번호를쥐어주며 씁쓸하게 웃는 선배의 모습에 마레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 사정이 있어 보였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오늘 처음 본 선배에게 사생활에 대해서 묻는 건 무척이나 실례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색함 속에 두 명 모두 할 이야기는 없었고, 대강의 설명이 모두 끝날 쯤에서 셀린은 마레이에게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고 길가에 주차되어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멍하니 그녀의 뒤를 바라보던 마레이는, 갑자기 어두워진 시야에 몸을 버둥거렸다.

“누굴까요~?”

다정한 목소리. 등 뒤를 꾹꾹 누르는 가슴. 그리고 달그락 거리는 쇳소리. 익숙한 향기에 마레이는 깜짝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라벨라님....?”

마레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손으로 가려진 시야가 정상적으로 되돌아왔다. 뒤를 돌아보자, 감찰국 제복을 입은 라벨라가 기쁜 듯 웃고 있었다.

“밖에서도 엄마라 불러주세요. 마레이는 제가 엄마인 게 부끄러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그래도 밖에서  부르는 게...”
“자자, 엄마~ 엄마~”

제복 위에 달린 여러 개의 훈장들은 핀으로 고정한 대신, 올려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가슴을 눈에 들어왔다.  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웃어 보이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엄마.....”
“네~”
“얼마나 기다렸어요?”

라벨라는 입을 가리고 작게 웃었다.

“대충 30분쯤이려나? 공국제가 끼어있는 금요일이라고 다들 퇴근하고 싶어 하는 눈치 길래 빨리 퇴근시켜주고 마무리하고 왔죠. 일리엔에게 연락은 받았어요. 방금 전 아가씨가 예의 멘티?”
“네, 셀린 페르디낭 선배에요.”

페르디낭, 페르디낭. 조금 낯선 모양인지 이름을 몇 번 중얼거리던 라벨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기억 못 하는 걸 보니, 제국의 유력가문은 아닌데... 잘도 저런 물건을 타고 다니네요.”
“네? 마차요?”

라벨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국 특유의 복장 때문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주변 사람들이 흘깃흘깃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마레이가 살던 곳에서는 못 봤죠?”
“네, 자동차는 많이 봤는데 마차는...”

라벨라가 마레이의 손을 붙잡고 깍지를 꼈다. 기다란 손가락이 손목을 슬쩍 긁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격은 비슷비슷한데, 아무래도 유지비가 웃어넘길 수준을 넘겨요. 앞에 달리는 것들은 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도 공학이랑 여러 복잡한 학문들로 만든 키메라거든요. 마차에 무슨 마법을 걸었냐에 따라 또 유지비가 한 번 더 치솟고. 흘깃 보이는 마법진들만 해도 가격이..... 제가 기억하지 못할 가문이 운용할 물건이 아니었는데 말이죠.”

그저 귀족들의 괴상한 취미겠거니 하고 넘겼던 마차가 그렇게 고가의 물건이었는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발테르에는 오히려 자동차가 보기 힘든 곳이었으니까. 도시의 유행인가? 하고 가볍게 치부하고 넘겼지만. 갑자기 묘한 가시감이 느껴졌다.

“저번에 마차는...?”
“처음 만날 때는 마레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주말에는 더 잘 보이고 싶어서요. 황제께서 하사하신 물건이고 관리비도 공금처리가 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안 쓰는 물건이에요. 다시 타고 싶어요? 원하면 바로 부를게요.”
“아뇨, 아뇨.... 저는 그냥 엄마랑 걷고 싶어요.”

이렇게 유혹하다니, 당장이라도 뒷골목으로 끌고 가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라벨라는 속에서 튀어나오는 욕망을 억지로 참아내고, 마레이의 이마의 짧게 입을 맞추었다.

“일리엔이 조금 늦는다고 하네요. 저랑 데이트해 주실 수 있나요?”
“아.... 네에..”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하고 붉게 상기된 얼굴로 속삭이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렸다. 라벨라가 기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마레이의 손을 이끌고 광장으로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서점에도가고... 카페에서 잠시 대화도 하고....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도 해요.”
“좋은데... 우리끼리만 먹으면 일리엔은요...?”
“흐음...... 애완동물을 챙기는 것도 주인의 미덕이긴 하지만.... 뭐, 셋이서 같이 먹죠. 개인실을 빌릴 수 있는 곳에서.”

라벨라가 끈적하게 웃어 보였다.

서점은 꽤나 한적했다. 학기 초에는 발 디딜 틈이 없을 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학기 초가 아니면 서점은 한산하다는 말이었다. 라벨라는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그냥 웃기만 하면서 마레이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응? 이거....”

잔뜩 쌓여 있는 신문 정면에 익숙한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무표정하게 단상 위에 있는 모습에 누군가 했지만, 자세히 보자 곧장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이번 공국의 건국절.... 그러니까 공국제에 대숲도 참여한다고 의사를 밝혔거든요. 대숲의 공주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지라, 황제께서 이번 사절단에 저에게 참여를 명령하셔서 가게 됐는데. 왜 감찰청 인사가 사절단에 들어가 있냐고 말이 많아서요. 평화로운 시기가 되니, 이런 일로 1면에도 나오네요.”

슬쩍 신문을 읽어보자, ‘공국의 자치를 인정한 제국에서 감찰청의 국장급 인사를 보내는 건.....’ 이라는 복잡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대단하네요....”
“후후, 그러면 칭찬해줄래요?”

숨이 닿을 거리. 보라색 눈동자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있었다. 약간 달아오른 분홍 뺨, 붉은 입술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새하얀 치아.

자신도 모르게 입을 맞추려고 하던 마레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서 고개를 좌우로 거칠게 흔들었다. 공공장소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에 입술을 손으로 가리며, 또다시 한 발자국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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