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새로운 만남(2)
“진로에 관해서 학생들을 완벽하게 일대일 맞춤을 시켜주기에는 꽤나 편향된 점도 있어서 보통은 인기 있는 아이들이 3~4명의 후배들을 데리고 있어요. 아예 없는 아이들도 있고. 마음 같아서는 저희가 하루 종일 데리고 있고 싶긴 한데. 마레이도 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니까요. 일단 학생회장에게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눠야 될 거에요.”
보면 깜짝 놀랄걸요? 하고 일리엔이 크게 웃어 보였다.
“저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저도 좋아하는 아이에요. 마레이는 하고 싶은 게 아직도 없다고 했죠? 멘토-멘티는 그렇게 딱딱한 시스템이 아니니까, 상호동의 하에 사람이 종종 바뀌곤 하니까. 여러 사람을 만나보는 것도 좋겠네요. 발테르는 다 좋은데. 다른 인간들의 학교와 다르게 반의 개념이 조금 희미하다 보니까. 주변 사람들과 친해지려면 이런 게 제일 좋거든요.”
완벽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지내오고 있는 마레이였지만, 일리엔의 말에 혹할 수밖에 없었다. 육욕으로 가득 찬 일상을 만끽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고, 이전까지는 평범한 학교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노는 게 일상이기도 했으니까.
일리엔을 따라 도착한 곳은 무척이나 한적한 곳이었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성가의 소리가 교회가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고풍스러운 조각이 가득 찬 문앞에 서서 일리엔은 문을 몇 번 두드렸다.
“샤샤, 있어요?”
“아, 일리엔 선생님! 오셨어요? 우선 손님도 있으니 앉아서 이야기하죠.”
문이 곧장 열리고, 마레이보다 머리 하나가 큰 여인이 웃으며 일리엔과 마레이를 맞이했다. 기다란 테이블 앞에 놓여있는 소파의 모습에, 같은 학생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연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번에 전학 온 아이인가요? 안녕, 흐응... 난 사사베티 마르크레라고 해. 종족은 보다 싶이 천족. 네 할머니 덕분에 졸업도 못 하고 팔 년째 여기에 묶여있는 실정이지.”
“안녕하세요. 저는 마레이 드 파웬입니다.”
마르크레는 마레이의 인사에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작게 웃어 보였다. 허리까지 오는 타오를 것 같은 적발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불꽃을 연상시키는 머리와 눈 색깔과 다르게 무척이나 침착해 보이는 인상의 여인이었다. 거기에 성인남성 만한 크기의 한 쌍의 날개가 무척이나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로렌을 닮은 것 같으면서도.... 확실히 다르네.”
“네....”
아직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라벨라의 조모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마레이는 움츠러드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 제대로 듣지도 못했지만, 발테르에 와서 가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았다.
“보내준 편지는 잘 읽었어요, 일리엔. 이 친구의 멘토를 찾고 있다고요?”
“개인적으로 샤샤가 맡아줬으면 하는데. 역시 무리겠죠?”
“일리엔의 부탁이라면 들어주고 싶긴 하는데. 이번에 성가대랑, 예비 성기사들 신성 마법 쪽을 겸임하게 되어버려서 말이죠. 이름은 올려줄 수 있지만, 제대로 돌봐줄 수가 없거든요. 역시 그런 건 싫죠?”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다시 한번 성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르크레 선생님은....”
“샤샤 선배라 불러줘. 지금은 수녀가 된 아이가 이름이 어렵다고 말해서 둘이 고심해서 지은 이름이니까. 그리고 로렌 때문에 졸업도 못 하고 여기 묶여서 애들 돌봐주는데 뭔 선생님이야.”
“죄, 죄송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자신의 조모님이 졸업을 막았다는 이야기에 마레이는 자신이 잘못한 것 마냥 사과를 건넸고, 샤샤는 조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크크....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귀여운 학생을 맡았네요, 일리엔 선생님?”
“내 귀염둥이라니까~.”
손등으로 가려진 입에서 샤샤의 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차가워 보이는 외견과는 다르게 감정표현이 무척이나 솔직한 사람 같았다.
“성기사 준비생들과 성가대는 보통 합숙이니까. 내가 관리하고 가르치는 걸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맞긴 하는데, 인간 신을 모시는 성직자들 대부분이 날 탐탁지 않게 보고 있거든. 말이 졸업 유예지만 사실상 로렌이 보호해주고 있다고 봐도 돼. 15살이라고 했던가? 발테르 학교에 조기 입학이라니 공부 잘하나 보네?”
마레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슬쩍 훑어본 샤샤는 날개를 퍼덕이며, 마레이에게 말을 건넸다.
“그... 자, 잘 모르겠어요.”
“저랑 이드리엔, 줄리아 선생님이 달라붙어서 개인 수업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아이예요~.”
밖에서는 인식장애 마법을 쓰지 않는 이상 애정표현을 거의하지 않는 일리엔이 마레이를 곧장 꼭 끌어안았다.
“범재라도 천재로바뀔 만한 인선으로 구성되어 있네...... 로렌이 부탁했어요?”
“아뇨, 저희가 좋아서 했죠. 뭐, 이드리엔은 제가 개인 수업을 한다고 말하니까, 경쟁심리 때문에 하겠다고한 거지만. 몇 번 수업하다 보면 이드리엔, 그 아이도 푹 빠져버릴 걸요~?”
그렇지요, 마레이? 다정하게 묻는 일리엔의 말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공국제때 본격적으로 찍어 누를 예정이 잡혀있었다. 마음을 꺾을 방법은 라벨라와 일리엔이 준비해 주겠다고 말했기에, 본인은 별생각도 없이 육욕을 불러일으키는 육체를 즐길 생각만 가득했지만.
“흐음... 일주일도 안 됐는데, 그렇게 홀딱 반할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건가요? 그렇게 자랑하니까 저도 한 번 가르치고 싶네요.”
“마레이가 마음만 먹으면 샤샤도 일주인도 안 돼서 헤롱헤롱 하게 될걸요? 하지만 이번 학기는 수업이 꽉 차 있을 예정이니까. 다음 학기를 기대해주세요. 후후...”
일리엔과 샤샤가 말하는 재능의 방향은 전혀 다른 의미였지만, 이상하게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날개를 크게 한번 퍼덕인 샤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시간이 됐네요. 멘토로 소개해줄 아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에요. 일리엔도 같이 가실래요?”
일리엔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샤샤는 마레이의 머리를 거칠게 헤집으며 쓰다듬고 걸음을 옮겼다. 엉덩이를 흔들며 유혹하는 못된 암캐의 엉덩이를 매만지며 학생회장의 뒤를 쫓았다.
슬쩍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얼굴이 마레이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몸을 구부릴 쯤에서야 마레이는 일리엔에게 상(?)을 주는 것을 멈췄다.
“샤샤는 무신경한 것도 꽤 있어서.... 조금만 더요... 네? 주변에 마법으로 누가 있나 확인하고 있으니까....”
“이따 집에서 잔뜩 해줄게요.”
자신의 손을 잡고 애틋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일리엔의 모습에도 마레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샤샤는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듯, 날개를 슬쩍슬쩍 퍼덕이며 앞서 걸었다.
“조, 조금만 더요....”
“렌, 참아요.”
“응? 응... 조금만 더....”
시작은 본인이 저질렀지만, 끈적하게 달라붙는 일리엔의 모습에 당황한 것 또한 마레이였다. 허리를 슬쩍슬쩍 흔들며 치마 끝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행동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남들 눈에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일리엔이었지만, 마레이는 아직 그녀의 능력을 제대로 모르기에 입술을 꽉 깨물며 육욕을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주인님이 만져준 것만으로 또 푹 젖어서... 바로 할 수 있는데.... 네? 어때요?”
귓가에 속삭이는 달콤한 목소리에 마레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리 본능의 충실해도 두려움과 누군가에게 보일지 모른다는 거부감에 이드리엔을 다루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참아.... 명령이야.”
“네....”
진짜로 애완동물을 다루는 듯한 마레이의 태도에 일리엔은 오싹오싹한 감정을 느끼며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하체에 억지로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한참동안이나 알 수 없는 쾌감에 부르르 떨었지만, 다행히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어떻게든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셀렌, 셀렌~ 있어~?”
정원이라고 해야 될까. 높은 풀숲이 시야를 가리고 중간중간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샤샤은 몇 번 정도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움직이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는 한 소녀가 그네 의자에 앉아서 깃펜을 붙잡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 편지 쓰고 있네. 무슨 짐이... 또 약혼자가 보냈나 보네. 밥은 먹었어?”
“샤샤 선배.....”
오후의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색과 똑 닮은 눈동자에 샤샤가 담기자,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어제 말했던 멘티 데려왔어. 이번에도 안 맞는다 싶으면 바로 말해줘. 다른 아이를 소개해주게.”
“안 맞는 게 아니고.... 아니, 아니에요. 네, 알겠습니다.”
웨이브가 잔뜩 들어간 푸른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인형 같다고 해야 할까. 무표정한 얼굴에는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마레이는 일리엔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도 눈앞의 소녀에 대해 잘 모르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예비긴 하지만 소개할 게, 이쪽은 셀린 페르디낭. 정령사 쪽으로 진로를 잡고 있지만, 이것저것 관심이 많고, 자세히 알고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거고...... 마레이, 네 소개는 스스로 해줘.”
샤샤는 짓궂게 웃음을 터트리고 일리엔의 옆으로 가 팔짱을 끼고 조심스레 정원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일리엔은 조금 더 마레이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참으라는 명령에 순순히 샤샤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저, 마레이 드 파웬이라고 합니다.... 15살이고.... 아직 진로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셀린 페르디낭. 18살이 정확한 말이지만, 제국법으로는 17살이야.”
셀린은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색하게 남겨진 두 사람은 그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셀린은 지금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일지 깨닫고 먼저 말을 꺼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일단은 앉아.”
“네, 네...!”
“점심은 먹었니?“
마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구니를 뒤적이던 셀린은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약혼자가 보내준 거니까 마음껏 먹어.”
“네?”
약혼자가 보내준 걸 자신이 먹어도 되나? 생각이 들었지만 셀린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포장을 뜯으며 과자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누가 다가와서 나와의 멘토를 끊으라고 말하면, 솔직히 말해줘. 다른 친구들을 소개해줄게.”
“네? 그게 무슨.....”
마레이의 물음에 셀린은 못 들은 척 계속해서 과자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다. 편지 위에 과자 부스러기가 묻어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별로 알 것은 없어... 알아도 좋은 건 없고.”
“네...”
단호한 셀린의 태도에 마레이는 무어라 말을 이어나갈 수도 없었다. 풀이 잔뜩 죽어 있는 마레이의 모습에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어나갔다.
“어차피 금방 끊어질 멘토멘티 관계라고 해도 기본적인 건 내가 알려주는 게 맞겠지. 얼마나 알고 있어? 전학이라는 이야기는 샤샤 선배에게 들었어. 전학이 비밀이라는 것도 들었고.”
“전혀....”
셀린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바구니에서 잔을 꺼내 마레이 앞에 내려두었다. 이름 모를, 그렇지만 기분 좋은 향이 나는 차를 마레이의 잔에 가득 따른 뒤에 말을 이어나갔다.
“보통은 스터디그룹 같은 느낌이긴 해. 시험 기간에는 같이 하는 곳도 있고, 따로 하는 경우도 있고. 금요일오후에 전교생이 잡혀있다 보니까, 외부 활동한다고 하면서 집으로 가는 그룹도 있고. 정말로 발테르 주변을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어. 아니면 2박 3일로 주변 도시에 가서 관광하는 애들도 있고. 정말로 진학이나 진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정보 공유나 관련 진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방문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하지. 그리고 나는.....”
말을 하다가 멈춘 셀린은 무어라 잔뜩 적혀 있는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비싸 보이는 깃펜을 반으로 부러뜨린 뒤에야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여러 가지 해보고 싶어.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고, 외부 광장에서 같이 연주하고도 싶고, 공부도 같이하고 싶어. 뭐.... 그렇다고. 그냥 바램이야.”
흘리듯 내뱉는 말이었지만, 호흡에 섞여 나오는 끈적하고 애절한 감정에 마레이는 무어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섣부르게 같이하자는 말도 꺼낼 수도 없을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학을 왔으면.... 학교 건물이 익숙하지 않을 테니 소개 시켜줄게.”
셀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저기.. 셀린 선배. 짐은....?”
“신경 쓰지 마, 어차피 버리려고 했어.”
홀가분해 보였다.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바뀐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며 마레이는 셀린의 뒤를 따랐다.
“아, 맞다....”
셀린은 갑자기 무엇인가 떠오른 모양인지 걸음을 멈추고 마레이를 바라보았다.
“어서 와 발테르 학교에.”
작게 웃는 그녀의 얼굴은 왜인지 모를 씁쓸함이 잔뜩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