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발테르 공립학교(2)
“합쳐진 지도 얼마 안 됐으니까. 점점 나아지겠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니까 이해할 수있어. 루마니아 공국에서도 반대로 비슷한 일이 있으니까...”
루마니아 공국. 원래는 왕국이었지만, 제국에 합쳐지면서 공국의 지위를 받아들인 국가였다. 발테르와 엘프의 대숲과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것과 흡혈 종들의 국가라는 게 특징이었다. 흡혈 종, 흡혈귀, 뱀파이어라 다양하게 불리는 이들은 마법에 능통하고 종족 특유의 마법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과거 인간들의 왕국이 분열되었을 때에는 숙적이라 불리기도 했고, 마레이가 어릴 때는 말을 듣지 않는다면 흡혈귀가 잡아간다라는 말을 종종 들을 정도로 민간에서는 두려움의 상징 중 하나이기도 했다.
현 여황이 황제를 대신해서 제위를 받아들이고 내부의 불만을 줄이기 위해서 시도했던 급격한 팽창정책 중 하나인 유화정책으로 끌어안은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였다. 하나의 영지라고 보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크기. 엘프와 비슷할 정도로 폐쇄성으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두렵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그럼 언니분도...?”
“응. 그치만.... 언니는 나와 다르게.... 친구도 많고.... 또 유명해서.... 반짝반짝 빛난다고 해야 할까. 나랑 다르게..... 멋진 사람이거든.”
므랑데의 말에는 끈적한 감정이 잔뜩 묻어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데도, 고저도 없이 흘러나오는 말에서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서 마레이의 폐를 쥐어짜는 것 같았다. 깊게 새어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참아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언니처럼 되고 싶은데.... 그게 잘안 되네. 친구도 없고 말이야. 뭐 필요 없지만….”
마레이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위로조차 할 수 없다는 게 정확한 말이었다. 일상의 대화였지만 잔뜩 스크레치 되어있는 감정이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실수라도 손댄다면 그 안에 있는 감정이 터져 나와 몸을 짓누를 것 같은 압박감이 그의 목을 꽉 움켜잡고 있었다.
“아, 벌써 다 왔네. 여기가 교문이야. 난 도서관에서 빌릴 책이 있어서 돌아가 볼게. 다음에 보면 꼭 아는 척 해줘야돼?”
“아, 네... 므랑데. 아니, 멜란씨.”
“편하게 멜란이라 불러. 나이는 별로 신경 쓰는 것도 아니니까.”
므랑데는 손을 흔들며 마레이를 배웅했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점점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친해질 수 있겠어~?”
“.....이하운 선생님?”
“냥~.”
고양이처럼 두 손을 양 볼 옆에 올린 백발의 수인이 교문 옆에 서 있었다. 호박색 눈동자가 반쯤 감겨있었다.
“친해진다니요?”
“소개까지 해줬잖아. 엄청 귀여운 미소녀랑. 아무 진척이 없는 거야?”
“네, 어렵네요.”
이하운은발치에 있는 돌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담장을 넘어서 사라진 돌멩이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앞에 그녀가 있었다.
“비슷한 냄새가 났는데, 아닌가? 응? 왜 뒷걸음질 쳐?”
“너무 가까워요.”
이하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레이의 등을 퍽퍽 치면서 즐거워하는데, 어떠한 감정도 느낄 새도 없이 몸이 슬쩍 들릴 정도의 힘에 고통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때? 네가 보기엔. 아, 파웬이라불러야 되나? 아니면 마레이?”
“마레이로 불러주세요. 저에 대해서 이미 알고 계시나 보네요.”
“보통은 다 알고 있을 껄? 교장의 손자라니 호기심이 안가면 그게 이상하잖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라벨라의 조모에 대해서 궁금증이 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는 증조할머니 항렬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어때? 므랑데는 귀엽지 않아?”
“예쁜 사람이긴 해요. 하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숨이 턱턱 막힌다고 해야 하나.....”
“오호?”
마레이의 대답에 이하운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위로 삐쭉 솟은 두 귀속에 푹신해 보이는 털이 잔뜩 나 있었다.
“언니 이야기를 할 때 이상하다고 해야 하나. 제가 이상할지 몰라도 그때 숨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겠던데....”
“좋아, 합격!”
“네?”
“므랑데의 친구로 합격이라고. 뭐 잘되면 사귀어도 좋아.”
이하운의 갑작스러운 말에 마레이가 되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것인지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몇몇 소개시켜줬는데, 외견만 보다가 다들 도망치듯 사라져버렸거든. 첫 만남에 그걸 알아볼 정도면 므랑데의 친구로 합격이야.”
“그게 무슨....”
친구를 할 때 무슨 자격이 필요했던 걸까. 너무 당당하게 말하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자신의 상식이 이상했던 걸까 생각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하운이 이상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왜, 므랑데 안 예뻐? 안 귀여워?”
“아뇨, 그건 아닌데.....”
“친구 하기는 싫다고?”
“아뇨. 그 말도 아니잖아요.”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하운의 화법에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놀리는 걸까. 대화를 쥐고 이리저리 흔드는 데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럼 친구 해. 그걸로 부족해? 나도 친구 해줄까?”
“아뇨, 괜찮아요. 근데 멜란이 허락해줘야 친구가 되는 거 아닌가요.”
“친구 없는 애라서 이미 친구라고 즐거워하고 있을 거니까 걱정 말고. 아, 너 내 강의 들어라. 므랑데 친구면 점수는 잘 줄 수 있거든?”
“괜찮아요. 그런 걸 바라고 친구 하는 것도 싫고요.”
“어휴, 기특한 것!!”
이하운은 발끝을 들어 올려 마레이의 머리를 꾹꾹 쓰다듬었다. 갑작러운 스킨쉽에도 마레이는 자연스러운 그녀의 손길을 받아드렸다. 어린아이를 칭찬하듯 쓸어내리는 손길이 어릴 적 어머니의 온기를 떠올리게 했다.
“뭐 적당히 스트레칭이라든지 간단한 격투술 개론이라든지 자세 같은 것만 하니까. 잘 생각해봐. 수요일에 하는 수업은 딱 하나 밖에 없는데. 므랑데 녀석도 그걸 들으니까. 더 가까워지기 좋은 기회라고?”
“기억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슬슬 저녁 시간인데 밥이라도 먹고 갈래? 요 앞 고기집이 진짜 좋은데.”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다음에 므랑데랑 같이 먹어요.”
“으으....... 진짜 말 예쁘게 하네. 잘될지 안 될지 몰라도 므랑데랑 잘해보라고. 성격이안 맞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네가 먼저 떠나지 않으면 옆에 들러붙을 껄? 그럼 난 밥 먹으러 간다.”
이하운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레이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고 빠르게 골목길로 사라졌다.
‘뭐지.....’
마레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므랑데 같은 귀여운 소녀와 친구를 하는 건 환영할만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남에게 등을 떠밀리듯 되는 건 입안이 텁텁한 느낌이 들었다.
도로를 하나 지났을 뿐인데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학교 앞에 상점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행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꺅꺅- 소리를 내며 유리창 앞에서 멋들어진 옷을 보며 이리저리 감평하고 있었다.
길을 나눈 듯, 중간을 가르는 이어져 있는 수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커다란 분수대가 이곳이 중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마법적 처리가 된 것인지 분수대 위로 물로 된 돌고래와 물고기 형상의 것들이 위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분수대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 주에 공국 건국제인데 뭐 할 거야?”
“본가에 올라갈 생각인데 이번에 우리.... 어...?”
마레이 앞에서 건국제의 이야기를 나누던 소녀들의 시선이 중앙 분수대를 향했다. 갑자기 들려오는 조용한 선율에 마레이도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광장은 이전의 광경이 거짓말인 듯 갑작스러운 침묵이 맴돌고 있었다.
“~♬”
가볍게 현을 튕기는 것뿐이었지만,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아름다운 음색이 흘러나왔다. 어떤 사람이 이런 아름다운 소리를 낼까 하는 궁금증에 몰려든 사람들을 비집어 앞으로 나서봤지만, 보이는 건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검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면서까지 얼굴을 가린 사람이 바이올린을 점검하고 있는 모습뿐이었다.
온몸을 꽁꽁 감싸듯 옷을 입고 있었지만, 가녀린 몸의 선과 슬쩍 드러난 목선에 여성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을 가볍게 훑은 여인은 가볍게 고개 끄덕이고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했다.
음악에 아무런 소양이 없는 마레이가 듣기에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연주였다. 활이 부드럽게 바이올린 위를 춤추었다. 활의 움직임과 다르게 집요하게 이어지는 음들이 광장 구석구석을 가득 메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연주는 어느새 끝나있었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바이올린을 켜던 여인은 바이올린 케이스를 집어 든 뒤, 인사를 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도 다시 자연스레 흩어졌다.
‘발테르에서는 이런 일이 흔한가 보네......’
방금 전에 있었던 신기한 광경을 상기하며 간단한 간식거리를 사던 마레이의 눈에 너무나도 익숙한 여성이 나와 있는 신문이 보였다.
“에르덴....?”
첫 면에는 에르덴이 있었다. 보라색 눈동자, 초록색 머리카락. 그리고 백옥 같은 피부. 몇 번이나 다시 봐도 교회 안에서 자신과 함께 뒹굴고 차마 말로하기 부끄러운 여러 행동을 전부 받아주었던 수녀였다.
‘쿵... 쿵.. 우, 울려서.... 우히히... 배가.. 배가아아앗..!’
정액으로 가득 찬 배를 끌어안고 잘록한 허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교태를 부리던 음란한 성녀의 모습이 바로 그려졌다. 괴롭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을 향해 기대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젖은 눈동자와 뻐끔거리면서 페니스를 기대하는 그녀의 둔부또한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가지 말고 잠시그 교회에 들려서 에르덴과 끈적한 정사를 나눌까 생각이들었지만, 신문에 보이는 ‘오염지역 정화 중인’이라는 글귀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기다리고 있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때까지는 돌아오리라 믿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떠오르자, 하루뿐이었지만 잊을 수 없이 끈적했던 기억들이 마레이를 둘러쌓는다. 꼭 끌어안기던 잘록한 허리. 허리에 붙어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포동포동했던 엉덩이와 힘을 꽉 주면 붉게 자국이 남았던 여린 피부.
모두에게 동경과 존경을 받는 성녀가 다시 한번 마레이의 상상 속에서 그날에 있었던 대로 음탕하게 꿈틀거리며, 마레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며 쾌락에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어느새 바지위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자신의 불룩한 물체에 화들짝 놀란 마레이는 주변을 둘러보고 서둘러 신문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지갑에 있는 금액을 다시 확인하고 너무 과하게 사버린 간식거리는 몇 개 되돌려 놓았다. 라벨라는 언제나 마레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사랑스러운 어머니였지만, 그건 전부 둘의 애욕 적인 생활에서만이었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는 용돈을 지출을 꼬박꼬박 적도록 하는 등, 꽤나 엄격한 면이 가득했다.
“다녀왔나요, 마레이?”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던 와중에 어느새 라벨라가 마레이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엄마...”
“우후후, 어서 와요.”
엄마라는 호칭이 너무나도 좋은 것인지 라벨라는 얼굴을 붉히며 기쁜 듯 웃어 보였다. 애정으로 가득 찬 보라색 눈동자가 마레이의 온몸을빠르게 훑어나갔다. 마레이가 신발을 전부 벗고 그녀를 향해 움직이자, 라벨라는 참지 못하고 마레이를 강하게 꼭 끌어안았다.
오뚝한 코가 그림을 그리듯 마레이의 목 주변을 간지럽혔다. 그녀는 붉은 입술로 마레이의 목과 얼굴에 키스를 건넸다. 웨이브 진 초록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에 나풀거리며 기분 좋은 향기를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