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발테르 공립학교(1)
보통 연인의 성관계라면 정리를 도와주고 떠나는 게 예의였지만, 라벨라의 일방적인 교육(?)과 에르덴과의 경험만 있는 청소년에겐 그런 세심함을 바라는 건 무리였다. 조금은 섭섭할 만도 했지만, 줄리아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고 국부를 꽉 붙잡으며 배속 에 가득 찬 마레이의 정액을 느끼며 여운에 몸을 작게 부르르 떨었다.
“우으으....”
침대 위에서 정액을 토해내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일리엔의 모습에 줄리아는 아깝다는 듯이 서둘러 달려들어 그녀의 안에서 빠져나오는 정액에 혀를 가져다 대었다.
“넓네......”
큰 종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이 시간쯤에 줄리아가 일리엔의 방에 찾아오는 게 맞았지만, 마레이를 당장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반장에게 적당히 부탁하여 빨리 왔다며, 고기 막대기를 써서 칭찬해 달라는 듯이 엉덩이를 흔들던 담임의 모습에 수업이 지금 막 끝났다는 것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늘 선생님이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역시 북부 전선 고문(顧問) 때문일까?”
“하시는 일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근데 개인적인 용무라고 하시지 않았나?”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들며 교실을 빠르게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마레이는 말없이 그들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몇몇은 처음 보는 얼굴에 잠시 흥미를 보인 듯했지만, 그 관심도 흔히 볼 수 없는 검은색 머리카락 때문이었기에 곧 식어버리고 말았다.
관심이라 부를 것도 없을 정도의 시선이 스쳐 지나갔지만 마레이는 담담하게 그 눈동자들을 받아드리고 입술을 오므렸다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학을 종종 다녔던 그에게는 익숙했던, 그러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풍경이었다.
“도서관에 좀 들렀다 가자, 저녁까지 시간도 많이 남았고 백 마법 또 숙제가 미쳐 날뛰어서...”
“일리엔 선생님이랑 완전히 딴 판이지? 선배들에게 들어보면 악명이 진짜 자자하던데. 그걸 잘도 듣고 있네.”
“예쁘니까 얼굴을 볼 수 있는 수업은 즐거운 데. 듣고 나면 남는 게 없네... 아니, 과제만 잔뜩 있긴 하네.”
일리엔의 이야기인가 싶어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자세히 듣고 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교실을 나선 두 학생을 마지막으로 반은 휑하니 비어있었고, 더 이상 남아있을 이유도 아니기에 마레이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여기가 어디지......”
-...! ....! ...!
주위를 둘러보며 걷다가 어디서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말소리라고 하기에는 뭔가 높고, 빠른. 바람을 찢는 것 같은. 그런 소리였다.
“아....!”
“누구지?”
넓다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좁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런 공터에서 한 여인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위로 올려 포니테일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이 돋보이고, 땀으로 얼룩진 도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서 무엇인가 날카롭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기, 길을 잃어서요....”
“학기가 시작한 지 꽤 됐는데. 아직도 길을 잃은 학생이 있나 보군. 어디로 가는 길이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묻는 그녀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일리엔이 소개해줬던 선생님 중 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게... 전학을 와서.... 둘러보느냐고...”
“아아, 그게 너였구나. 파웬 가문이라고 했던가? 내 이름은 아사노 나기사다. 아마 일리엔 선생의 반에 배속 될 테니 한 번쯤 청강하러 오겠군. 수업 이야기는 그 때하기로 하지.”
“네,.”
마레이의 대답에 나기사 선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납도했다.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온 나기사 선생에게서 특이한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름 모를 부드러운 느낌의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서 왜인지 모르게 더 가까이 다가가 맡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흠.... 좀 씻어야겠네. 소개해줄까 했는데 이대로 무리겠군. 보이는 길을 쭉 따라보면 대로가 보일 테니, 딴 길로 새지 말고 쭉 가도록. 학기 초에는 선생들이 인솔해서 지리를 익히게 하는데. 앞으로고생 좀 하겠군.”
“네에에.....”
더 이상 할 말이없다는 듯이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가는 나기사의 모습에 마레이도 그녀가 알려준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이하운 선생님...! 도, 돌려줘요...!”
“베에~ 잡아봐라~.”
마레이 앞으로 하얀 물체가 휙-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늦게 금발의 아이가 흰색 물체를 따라가며 무어라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관경을 바라보던 마레이를 기준으로 빙글빙글 돌던 두 사람이 어느 기점으로 마레이를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야생 동물에게는 먹을 걸 막 주면 안 된다고!”
“제, 제가 기르는 아이들이란 말이에요....”
흰색 물체가 무엇인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자신과 조금 비슷한 키쯤 될까. 배와 허벅지를 반쯤 들어낸 검은 운동복을 입은 수인이었다. 귀를 보아하니 고양이인가. 그보다 딱 달라붙는 운동복 위로 튀어나온 복근과 오밀조밀 보이는 근육이 눈에 들어왔다. 금색의 눈동자와 동물처럼 쫙 찢어진 눈동자는 조금 이색적인 느낌을 주는 미인이었다. 다리 사이로 보이는 꼬리와 고양이 귀만 아니라면 인간이라도 해도 믿을 것 같은 외견이었다.
학교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건물과 넓은 부지를 걷다 문득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은 마레이는 줄리아가 주었던 팸플렛을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잡아봐라~ 잡아봐라~”
“가, 가운데 분이 곤란해하시잖아요....... 돌려줘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소녀가 이하운 선생에게 무어라 칭얼거리고 있었다. 마레이를 흘깃 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웨이브가 들어간 금발의 머리카락이 잠시 보였던 진홍색 눈동자를 가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눈망울이 잊히지 않았다.
“야, 거기 남학생!”
“네....?”
“애를 울리면 어떻게?! 네가 책임지고 달래줘라. 이것도 네가 대신 주고!”
고양이 수인이 마레이에게 도시락통을 쥐여주고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갑작스레 나타나서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고 떠나는 이하운의 모습에 마레이는 멍하니 바라보다, 혼자 남겨진 금발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두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느낌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 저기....”
“안 울어요....”
금발의 아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레이의 가슴에 간신히 올 것 같은 키에 마레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두 손으로 도시락통을 꽉 쥐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으로 꼬마라고 해야될 것 같은 아이가 도시락통을 받아드렸다.
“죄송해요. 이하운 선생님이 짓궂으셔서.”
“.....격투술 선생님 아니신가.”
“네. 맞아요. 혼자 있을 때마다 찾아오셔서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눠주시는데. 가끔은 저렇게 장난을 치셔서.... 나쁜 분은 아닌데.....”
이하운. 분명 일리엔이 보여준 메모에서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마레이는 별 이상한 선생도 다 있다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이하운을 위해 변명하는 소녀의 모습에 그것도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므랑데(Mlandic)라고 합니다.... 제국어로는 발음이 좀 어려워서 다들 멜란이라 불러요. 부, 불편하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 저도 갈 테니까...”
“저기... 멜란...? 저 길을 잃었는데. 도와주실 수 있나요?”
“네! 물론이죠!”
단지 길을 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강아지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느낌으로 기뻐하는 멜란의 모습에 마레이는 대충 이하운 선생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외견으로 본다면 갓 중학생쯤 되었을까. 자신을 멜란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던 소녀는 도시락통을 두 손으로 가지런히 들고 있는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었다. 이쪽을 흘깃흘깃 바라보면서 무어라 대화를 꺼내고 싶은 눈치이기에 마레이는 먼저 운을 떼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멜란은 몇 살이에요?”
“열일곱 살인데...”
“저는 열다섯 살이니까 편안하게 말해주세요.”
므랑데는 기쁜 듯 웃어 보였다. 슬쩍 웃는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한쪽으로 묶은 금발의 사이드 테일이 마레이의 옆구리까지 길게 늘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걸 보면 슬슬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으.”
므랑데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흘깃 고개를 돌려보자, 그녀도 마레이를 흘깃 보다 눈이 마주치곤 곧장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입을 움츠리고, 마레이를 흘깃 보면서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그건 참 어려워 보였다.
“멜란은 언제부터 이 학교에 다녔어요?”
“나, 나? 나는 그러니까... 2년 전에 왔어... 마레이는?”
마레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므랑데는 놀란 듯 몸을 크게 떨고, 다시 말을 더듬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작은 동물 같았다. 빨간 눈동자와 고운 흰색 피부는 토끼를 떠올리게 했다.
“저는 올해요.”
“다행이네.”
므랑데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 걸까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다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아, 아아... 그러니까.... 벨테르 학교가 신기한 편이지만, 보통은 중고등학교가 나뉘어 있고 학년으로 분류가 되잖아... 그러다 보니까. 새로 들어온 학생들은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이다 보니까. 중간에 들어오면 사람들하고 친해지기 어렵 거든.......”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도 않게 줄어들었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겠지만, 친구가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이하운이 억지로도시락
“그러고 보니... 멜란은 몇 살이에요?”
“열일곱 살인데...”
“저는 열다섯 살이니까 편안하게 말해주세요.”
므랑데는 기쁜 듯 웃어보였다. 슬쩍 웃는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한 쪽으로 묶은 금발의 사이드 테일이 마레이의 옆구리까지 길게 늘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걸 보면 슬슬 저녁시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으.”
므랑데가 작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흘깃 고개를 돌려보자, 그녀도 마레이를 흘깃 보다 눈이 마주치곤 곧장 고개를 숙였다.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 입을 움츠리고, 마레이를 흘깃 보면서 무어라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그녀에게 그건 참 어려워 보였다.
“멜란은... 2년 전이면 3학년 때 온 건가요?”
“응, 언니처럼 1학년에 오고 싶었는데, 아버님이 기준에 미달이라면서 안보내주셨거든. 열심히 해서 벨테르에 오게 됐는데..... 그런 걸 잘 모르고 3학년 때 와버렸어.”
작게 한숨을 내쉬는 므랑데의 모습은 가엽고, 또 너무 귀여워서 꼭 끌어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린아이와 다름없는 외견이지만, 나이와 외견이 일치하지 않은 건 역시 아까 본 길쭉한 송곳니 때문이었을까.
“므랑데는 흡혈귀인가요?”
“아, 응..... 어떻게 알았어....? 미, 미안 가릴 게..!”
이하운 선생님이 자신에게 통을 들려주고 대화를 하라 들을 떠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므랑데의 담임선생님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학생 입장에서는 배려심이 부족한 선생님이었다. 억지로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하다니, 초등학생도 아니고. 마레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눈 앞의 소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았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에 붉은 입술이 무척이나 야릇해보였다. 눈동자는 루비처럼 붉었지만 반짝이는 커녕 어둡고 질척여서 마치 핏빛이라 생각이 들었다. 어깨까지 내려온 금발이 걸을 때마다 살랑거렸다.
“므랑데는 흡혈귀인가요?”
“아, 응..... 어떻게알았어....? 미, 미안 가릴 게..!”
“아뇨, 괜찮아요. 전 예쁘다고 생각하거든요.”
도시락 통으로 얼굴을 가린 므랑데가 조심스레 마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괜찮냐고 묻는 듯한 붉은 눈동자에 마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녀가 활짝 웃어 보였다.
“공국 사람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말이야....... 무서워한다고 할까..... 제국 사람들은 어려워....”
죄송해요 라고 마레이가 짧게 대답했다. 므랑데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