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담임선생님의 연구실 [줄리아 파후](2)
“일반적인 학교는 지정된 커리큘럼을 이수하게 하지만, 교장 녀석이 자신이 맡은 학교는 특별해야 한다면서 제멋대로 바꿔서 말이야…. 강의나 수업은 제국대학과 비슷한 느낌으로 진행한다. 용사가 구상해둔 수업 방식이라는데….. 뭐, 이건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군. 선생들도 많고 강의도 많다면 학생 수가 꽤 많아서 말이다. 몇몇 과목은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고. 정말 듣고 싶다면 선생을 설득해서 일대일로 수업을 받을 수도 있다. 뭐, 시간이 남거나 폐강된 수업인 경우이겠지만.”
“네...”
시간표가 지정된 대로 수업을 듣던 마레이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었다. 줄리아는 마레이를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 시간 계획표를 짤 때까지는 상담해줄 테니까 지금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폐강된 수업이나 시간표가 비어있는 선생들을 찾아가서 강의를 열어달라는 건... 이론상 가능은 하지만, 그야말로 가능만 한 이야기니까 별 의미 없는 소리니까 간단히 없다고 생각해도 된다.”
“가능이요...?“
마레이의 물음에 줄리아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카락이 작게 나풀거리면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묘하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성인의 향이었다. 마레이는 그녀의 갈색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선생도 사람이다 보니까 강의 시간을 늘리고 싶지 않아하지. 거기다 일대일 수업이라고 하면 보통 월반해서 넘어오는 천재들을 가르치고 싶어하곤 해서 말이야. 후계자 같은 느낌으로? 처음에는 열성적인 교사들이 있었지만, 일대일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 자체가 학생에게도 교사에게도 무척 힘든 일이거든. 나는 전략학의 기반을 둔 여러 수업을 하곤 하는데. 교장의 권유로 전역하고 이 학교로 처음 부임했을 때, 후계자나 키워볼까 하고 마구 쥐어짰더니 죄송하다면서 도망쳐버리더군. 그 뒤로는 안 하고 있고.”
“아, 예....”
미인 여교사와 일대일 수업인데도 도망쳐버리다니. 아마 그 학생이라는 사람은 여자였을까. 남자였다면 엄청 가혹한 수업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는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전 생각이 났던 걸까. 작게 한숨을 쉰 줄리아는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뭐 대충 설명은 다했고..... 미안하지만 왼쪽 눈에 대해서 물어도 될까? 아무래도 특이사항에 없다 보니까 말이야. 혹시 말 못 할 사정이라면 보호자를 통해서 말해도 된다.”
“아.... 이건... 그게....”
무어라 말해야 할까. 자신의 왼쪽 눈을 보고 자신의 노예가 되어버린 라벨라와 에르덴의 모습을 떠올렸다. 분명 자신의 왼쪽 눈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들과의 육욕으로 뒤범벅된 생활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눈병인건가?”
“아뇨, 이건....”
“그러면?”
집요하게 묻는 줄리아의 말에 마레이는 무어라 내뱉을 변명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군인이라고 했었던가, 강압적인 분위기에 마레이는 잔뜩 움츠렸다. 고요하게 내려앉은 벽안이 호수 깊이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어, 어머니가 저주에 걸려있다고....”
“음... 한 번 볼 수 있을까? 성녀님에게 받은 저주 방어용 목걸이가 있어서 해주(解呪)는 못 해도 저주의 위협은 없다.”
“아니, 그게....”
줄리아는 마레이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거절하려던 마레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미인 여교사의 몸으로 자꾸만 눈이 갔다. 벗으면 이 사람도 라벨라나 에르덴처럼 되어버리는 걸까. 이렇게 딱딱한 느낌이 드는 사람은 자신에 밑에 깔려서 무어라 말을 할까. 어떻게 앙앙 울부짖을까. 야한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아니, 아니. 이러면 안 되는데. 마레이는 고개를 털어 잡스러운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라벨라나 에르덴의 끈적한 섹스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자꾸만 매력적인 사람을 볼 때마다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학생이나 교사나 원칙적으로 과한 장신구는 교칙 위반이다.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압수할 수밖에 없다. 의료 목적이라면 오늘 하루 정도는 내가 증명서를 대신할 만한 걸 써주도록 하겠다. 뭐, 먼저 상태를 봐야겠지만.”
“그게.. 그러니까.....”
안대를 벗어보라고 강요하는 줄리아의 모습에 마레이는 눈을 질금 감았다. 앞에서 바라보고 있고, 코트에 가려져 있음에도 슬쩍 보이는 엉덩이의 윤곽. 얼음장 같은 얼굴. 이 미녀를.....
“보여드릴게요.”
자신의 안대로 손을 뻗는 줄리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난 마레이는 자신의 안대를 천천히 벗었다.
“......신기한 눈이야. 아니, 아름답다고 해야 하나.”
줄리아 파후의 말에 마레이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즉각적으로 이상한 반응을 보였던 두 명과 다르게 그녀는 마레이의 눈동자를 보고 그저 짧은 감상평을 내뱉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작게 혀를 찼다.
“생각보다 지체되었군. 지금 이 시각에 교실로 들어가면 아이들의 자습에 방해가 될 터이니, 내 연구실에서 차나 한잔하겠나? 좋은 허브티를 선물 받았는데 말이야.”
“네, 뭐....”
이상하다. 마레이는 라벨라와 에르덴의 변화가 자신의 왼쪽 눈이라 막연히 추측하고 있었지만, 줄리아의 모습을 보아하니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교무실에서 꽤나 거리가 떨어진 줄리아의 연구실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넓은 방이었다.
“연구실은 처음 오는 건가? 아, 이런 실수를.... 아직 제국대학을 다니지 않아 연구실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겠군. 교장 녀석이 직접초빙하거나 능력을 인정받은 교사들은 각자 연구실이라는 개인실을 배정받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해했나? 뭐, 초빙 강사들도 각자의 개인실 비스무리한 것을 받았긴 했지만, 연구실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했을 뿐이니까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네에...”
줄리아는 묘하게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분주히 손을 올리고 물을 데우고, 차를 준비하고. 그녀는 딱딱해 보이던 이미지와 다르게 부드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군인처럼 딱딱한 말투인 것을뺀다면 그냥 일반 여성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마셔보도록, 퇴역하기 전에 있던 부대의 동료가 변방에서 구한 귀한 찻잎이니까.”
“...맛있네요.”
“그렇지? 나도 아껴 마시는 차거든.”
마레이는 줄리아가 준 차를 홀짝이면서, 자신의 왼쪽 눈에 대해 많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자신 같은 학생을 챙겨주는 담임선생을 자빠트릴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도 후회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신 건가? 아니, 이건 그러니까. 조금 궁금해서 말이야. 나라고 해서 학생의 모든 인적사황을 아는 것은 아니고, 친척 집에 살다가 이모의 집에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그러니까.... 미안하군. 성급하게 물어보았어.”
“아니에요, 부모님은... 꽤나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기억에 없고,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괜찮아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줄리아는 가볍게 말을 꺼내다가, 자신이 실수한 것을 깨닫고 황급히 사과했다. 마레이는 돌아가신 부모님에 관해 묻는 것이 싫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억에 없는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분명 좋은 분이셨고 단지 함께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다. 단순한 사실에 대해서 말하는 게 부담스럽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거기에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학생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에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교장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혹시 이모님이라 말했던 사람은 라벨라 드 파웬인가? 감찰청의 마녀로 유명한 그 사람 말이야.”
“마녀는 잘 모르겠지만 그분은 맞아요.”
줄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명치에 둘린 커다란 벨트를 풀어냈다. 그리고 붉은색 코트를 가볍게 벗고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그녀는 무엇인가 당황한 눈치였다. 아니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 같다고 할까. 마레이는 연상의 미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를 연상시키고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진정시켰다.
“파웬군.... 마레이라도 불러도 될까?”
“네, 선생님.”
줄리아의 입에는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레이는 그녀를 잘 알지 못했기에줄리아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대신 그는 밤색 스웨터 위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가슴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레이는 전략학에 관심이 있나? 남자아이라면 종종 장군을 꿈꾸곤 하니까 말이야. 제국대학교 말고 사관학교로 가는 제자들도 꽤 있거든. 전학생이다 보니 더 호기심이 가는군.”
“사관학교라든지 대학교라든지 아직은 잘.....”
“그러면 전략학 수업을 들어볼 생각이 있는가? 어디보자 강의가… 이런, 인원이 전부 찼군. 전학생이니 다음 학기에 내 정규수업을 바로 듣는 것은 꽤나 고된 일이 될 테니. 강의를 열어줄 테니 수업을 듣겠나? 예전처럼 후계자를 키우겠다 던 지 그런 생각이 아니고, 그냥 전학생이다 보니 조금의 돌봄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자랑하는 것처럼 들려 조심스럽지만, 북부의 내전을 종식시킨 얼음마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들어서 후회하지 않을 수업일 거다.”
줄리아는 시간에 쫓기는 듯 무어라 빠르게 말을 하고 있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마레이는 그녀의 말보다 대신에 스웨터 위로 드러난 멜론 같은 가슴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가? 수업을 들을 생각이 있는가?”
“아니, 그게... 저기....”
줄리아가 무어라 말을 했던 것 같았다. 마레이는 당신의 가슴을 보고 있어서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어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략학 수업을 듣는 것에 대해서 말했던가.
“흠......”
줄리아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다는 듯이 웨이브 진 갈색 머리를 거칠게 털어냈다.스웨터 안에 잠들어 있는 가슴이 움직이는 모습에 출렁출렁 소리를 내는 착각마저 들었다. 줄리아는 초조한 듯,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지금이라면 전학생을 데리고 아이들에게 소개해도 될 시간이었지만, 줄리아는 애써 무시한 채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시간이 남는군.... 그럼 개인적인 잡담이라도 해볼까. 체스 좋아하나?”
“네, 조금은... 어르신에게 배워서...”
“전쟁사는 어떤가? 남자아이들을 대부분 좋아하던데.”
“자세히는 몰라도... 듣는 건 좋아해요.”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하던 일이 잘된 것처럼, 자신이 바라던 대로 이야기가 진행된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점차 올라간 입꼬리에,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마레이도 그녀가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요즘 남자아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 혹시 마레이는. 아니, 마레이의 나이대 남자애들은 여성에게 관심이 있나?”
“네, 보통... 그렇죠...?”
“이상형은 어떻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친구가 적어서....”
줄리아는 마레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올라간 입 꼬리가 천천히 제자리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나갔다. 줄리아의 다리가 꼬아지고 슬쩍 벌어진 스커트 사이로 마레이의 시선이 흘깃 지나갔다.
“그럼 네 이상형이라도 이야기해주렴.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뭐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레이는 성실히 대답했다.
“그.... 친철하고.... 상냥하고.... 따뜻한 사람일까요...”
순간적으로 라벨라와 에르덴을 떠올린 마레이는 담임선생님에게 자신이 처한 특수한 상황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엉덩이나 허벅지를 벌리며 박아달라고 졸라대는 두 여인에 대해서 말한들 믿어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예쁘다거나 가슴이 크다거나 엉덩이가 크다는 둥. 저속한 말을 내뱉을 수도 없었기에 그저 가볍게 말할 수 있는 느낌으로 자신의 이상형을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