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양모와[라벨라 드 파웬](2)
선반 위에 하얀 수건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얼룩 하나 찾아볼 수 없는 보들보들한 감촉의 수건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거울은 물 자국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욕실까지 이어진 대리석 바닥은 매끄러운 촉감과는 다르게 무척이나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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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간격으로 벽걸이등이 놓여 있었다. 하얀 전등과 약간 노란 빛을 띠는 벽걸이등에 묘하게 나른한 느낌을 주었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의 욕탕은 크기를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한쪽 구석에는 갈색 바구니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셔츠가 들어 있는 곳, 바지가 들어 있는 곳, 마지막으로 속옷이 들어 있는 곳. 검은색 내용물이 흘깃 보여서 마레이는 깜짝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세탁물을 같이 넣어두어도 되는 걸까. 상의, 하의, 속옷으로 벗어두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따로 재질이 있는 걸까. 긴장한 탓인지 의미 없는 것들에 자꾸만 생각이 머무른다. 바구니 안에 드렁있는 끈인지, 천 쪼가리인지 모를 속옷 때문일지도 몰랐다.
빨리 욕탕에나 들어가 버리는 게 나았다. 마레이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벗었다. 거울에 비추는 붉은색 눈동자가 기괴한 도형을 그리고 또 흔들리고, 다시 새로운 도형을 그려나가고 있었다.
“저주인가.....”
돌아가신 어머니는 이 눈이 저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게 언제인지. 한참이나 어머니를 올려다보던 그때를 떠올리면 시간이 언제였는지 애매했지만, 자신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모친의 눈동자는 여전히 마레이에게 남아있었다. 빛바래 기억도 나지 않는 모친의 추억을 그리듯, 눈동자에 떠 오른 도형을 거울에 따라 그려보았다. 곧장 다른 도형으로 바뀌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거울 앞에서 설 때마다 그리게 되는 그리움, 그리고 눈에 대한 묘한 느낌은 익숙해져서 더 이상 아무렇지도 않게 변해버렸다. 익숙해져 버린 자신보다는 오늘부터 함께 살게 된 라벨라 드 파웬이 생각의 틈새로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터질 것 같은 가슴, 조각 같은 외모,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 그런데도 시선을 끄는 알 수 없는 매력.
라벨라를 생각할 때마다 자연스레, 제복 아래의 몸을상상하게 되고, 질 나쁜 망상으로 이어져 나갔다. 한참 동안 몽상을 헤매던 마레이는 세면대에서 쏟아지는물에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지도 모른 채, 서둘러 얼굴을 닦아냈다.
“아악!!”
자신도 모르게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라벨라는 문을 부술 기세로 열고 들어왔다. 얼굴을 감싸 쥔 마레이와, 뜨거운 김이 나오는 세면대를 보고, 빠르게 상황을 깨달은 그녀는 마레이를 안아 들고 곧장 얼굴에 찬물이 닿게 한다.
고통이 잦아들고, 차가운 물에 얼굴의 감각이 없어질 때쯤, 그녀는 조심스레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첫날부터 바로 문제가 생길 줄이야. 걱정스러운 속내를 억지로 삼키고, 마레이의 얼굴에 화상이 있나 꼼꼼히 확인하던 그녀는, 아무 이상이 없는 마레이의 얼굴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나?”
라벨라의 물음에 마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까지 꼼꼼히 닦아주던 그녀는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마레이의 왼쪽 눈을 보았다.
“괜찮습니다, 라벨라님...”
마레이의 얼굴을 붙잡은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었다. 보라색 눈동자는 거대한 인력을 가진 것 마냥 마레이를 점점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라벨라의 옅은 숨결이 마레이의 뺨을 간지럽혔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그 표정이 무척이나 야릇하게 느껴졌다.
라벨라의 손이 다시 한번 뺨을 가볍게 쓸어내렸다. 묘하게 끈적한 손길에 몸이 부르르 떨린다. 엄지 손가락이 뺨을 긁어내리고, 턱을 감싼 손가락들이 이유를 알 수 없이 목을 슬며시 쓰다듬는다.
“라벨라...님?”
어느새 라벨라의 얼굴이 가까워져 있었다. 숨결이 서로에게 맞닿고 있었다. 도툼한 분홍색 입술이 형광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입술 위로 슬며시 떠 오른 갈라짐이 매력적이었다.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부를 수밖에 없었다. 크게 다친 것일까.
“라벨라님?”
“괜찮은 게…… 맞는 거겠지.”
마치 고양이가 영역을 확인하듯이 꼼꼼히 훑는 듯한 시선 같다고 해야할까. 보라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뚝한 콧날이 코에 닿자,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이 넘어갔다. 마레이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꼭 감았다.
“이제 괜찮은 거지?”
“네? 네, 네...!”
아무 일도 아닌 듯 갑자기 거리를 두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당황한 듯 몇 번이나 ‘네.’라는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 있었던 일은 꿈이었을까. 입술을 닿을 거리까지 좁혀진 거리와 야릇한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물기 묻은 뺨을 수건으로 꼼꼼히 닦아낸 라벨라는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갔다.
멍하니 라벨라의 뒷모습을 바라본 마레이는 터질 듯 부풀어 오른 자신의 페니스(penis)를 본능적으로 꽉 움켜쥐었다.
‘방금 뭐였을까.’
연애 경험이 없었지만, 적어도 조금 전은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처를 살핀다고 하기에는 너무 끈적했다. 자신을 유혹하는 걸까. 마레이는 서둘러 고개를 털어냈다.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자신을 유혹하다니, 상상이라도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이상해지는 건 자신이었다. 혹시 자신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마레이는 가능성 없는 상상을 하며 아직도 기가 죽지 않은 자신의 분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가족이라고 해도, 사실상 라벨라와 자신은 남이나 다름이 없었다. 북부의 방벽, 시골 마을에서 자란 자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귀족이었다. 누구든지 손짓하면 무릎을 꿇을 것 같은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분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니. 우울해지는 자아비판이었지만, 그래도 조금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은인인 라벨라 드 파웬에게 이런 상상의 대상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를 저지르는 것 같았다. 마레이는 진창처럼 엉망이 된 생각을 잊기 위해 너무 넓은 욕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을 사람들이 같이 사용하는 공공 목욕탕에나 볼 법한 넓은 곳이었다.
너무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게 일정하게 온도가 유지되고 있었는데. 직접 불로 데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몇 걸음 걸어가야 도달할 거리에는 샤워기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전신 거울이 ‘〔’ 자 모양으로 서 있었다
.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거대한 저택과 수많은 하인들이 살고 있는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마레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주택이었다. 아버지의 친척들, 그리고 심지어 어머니에게서조차 파웬 가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었다.
라벨라 드 파웬은 정말 자신의 가족이 맞는 걸까. 왜 그러면 어머니는 라벨라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을까. 아니, 해주셨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너무 어렸을 때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거나, 나쁜 장난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증기가 가득 올라온 욕조 위에서 마레이는 라벨라의 도툼한 입술과 옷위로도 숨길 수 반칙적인 여체를 떠올렸다. 농익었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가슴과 둔부. 그리고 차가운 표정. 제복으로 다 감출 수 없는 그 몸매를 떠올리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망상을 조금씩 펼쳐나갔다.
라벨라의 웃는 모습이 떠올릴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갔나? 욕실을 같이 쓰고 싶은데.”
“....!”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마레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몸을 돌리고 상체를 엉거주춤 굽혔다.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물기가 가득한 바닥에 발걸음 소리가 천천히 마레이를 향해 다가왔다,
“아직 덜 씻었나?”
“.....예, 예!”
뒤에서 라벨라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마레이는 몸을 더욱 크게 숙이고 욕조의 구석으로 몸을 옮겼다. 빳빳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자신의 분신을 가리기 위해노력했지만, 그의 노력과 무관하게 라벨라는 둘이 사용해도 충분히 넓은 욕조 속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마레이를 향해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물이 조금 미지근하네,. 그렇지 않은가?”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첨벙거리는 물소리. 그리고 라벨라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모든 소란들이 거짓말처럼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 욕실을 가득 매웠다. 갑작스런 침묵에 마레이는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라벨라의 새하얀 나신을 볼 수 있었다.
백옥같이 새하얀 피부, 물기를 머금고 가슴을 가리고 있는 초록빛 머리카락. 한 손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가슴. 건강미 넘치는 십 일자 복근과 단단한 허벅지, 그리고 비밀스러운 곳을 가리는 무성한 초록 수풀. 그녀는 가릴 생각도 없는지, 아니 더욱 잘 보라는 듯이 몸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물이 뜨거운가?”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라벨라의 당당한 태도에 마레이는 자신이 이렇게 수줍어 하는 게 잘못 된 건가 생각이 들었다. 가족 사이에 같이 목욕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이미 어엿한 청소년이었다. 그런데, 성인 여성과 함께 목욕하는 건 이상했다.
“여행의 여독이 있을 텐데, 편히 쉬거라.”
“네에…..”
아무렇지도 않게 옆자리에 앉은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도 엉거주츰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다가온 라벨라를 두고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잔뜩 화가 난 자신의 분신이었다. 두 손으로 가리려고 해도, 아직 채 다 자라지레이도 엉거주츰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다가온 라벨라를 두고 건너편으로 넘어가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문제는 잔뜩 화가 난 자신의 분신이었다. 두 손으로 가리려고 해도, 아직 채 다 자라지도 않은. 아니, 비슷한 나이대 소년과 비교해서 몸집이 작은 소년이 가지고 있기에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페니스를 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나는 분명히 편히 쉬라고 했는데. 불편한가?”
“아, 아닙니다...”
라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듯 마레이를 보고 웃고 있었다. 자신을 이렇게 배려해주는 사람에게 몹쓸 상상을 하다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가슴이나 음부를 가릴 생각도 없이 편안하게 욕탕에 앉아있는 라벨라의 모습에 마레이는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녀의 몸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제복으로 감출 수 없는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는 실제로보니 상상한 것보다 더욱더 엄청났다.
“피곤하겠지만, 씻고 나서 발테르 주변을 둘러보자꾸나.”
“네, 네…!”
라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걸까. 마레이는 괜히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이상한 것 같아서 조심스레 페니스를 가린 손을 떼어냈다. 평소보다 더욱 크게, 그리고 딱딱하게 발기한 육중한 물건이 배에 닿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