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양모와[라벨라 드 파웬](1)
덜컹거리던 열차에서 마레이는 눈을 떴다. 처음 타보는 대형 열차, 텔레비전 채널이 넘어가듯 휙휙 바뀌는 풍경도 삼 일이 지나자 전부 무뎌졌다. 반쯤 풀린 눈동자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눈에 담기도 잠시, 다시금 쏟아지는 잠기운에 눈을 감았다. 마른 나무 냄새가 물씬 풍겼다
-잠시 후 제2수도 벨테르에 도착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제2수도 발테르에 도착할 예정이오니 승객 여러분들은 안내원들의 지시에 따라 질서에 맞게 이동해주시길 바랍니다. 길지 않은 여행길이었지만, 발테르행 급행열차를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내방송 소리가 점차 귀에 익숙해져 희미해져 간다. 마레이는 오른쪽 눈을 비비며 잠기운은 애써 털어냈다. 열차의 진동이 점점 줄어들고, 방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음이 사람들의 발소리에 섞여 사라졌다. 약간의 시간이 더 흐르자, 고요한 정적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마레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아주 천천히 내뱉었다.
마레이는 승무원이 혹시 내리지 않는 손님을 확인하러 객실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잠시의 고요를 만끽하고 싶었다. 친척 집을 몇 번이나 옮기며 전전하고 살던 마레이에게 있어 고요하고 또, 자신만의 시간은 무척이나 소중했다. 아직 학생의 나이였지만,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었기에, 남의 집에서 조심스레 눈치를 보고 살았던 소년에게 있어 이런 여유는 낯설고 그리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었다. 열차를 타면서계속 생각해 왔던, 자신을 발테르로 초대한 라벨라 드 파웬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창문 밖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 조금 그리운 이름이었다. 같이 보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승무원이 문을 두드렸다. 마레이는 챙겨놓은 짐을 가지고 승강장으로 내렸다.
승강장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레이 드 파웬?”
기차에서 마지막으로 내리고 낯선 풍경을 담아내는 와중에 누군가가 마레이의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고 나서야 자신을 부른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훈장과 id="docs-internal-guid-406f3cb7-7fff-eb06-fe14-468b3c452ee8">
“....네?”
“맞군, 난 라벨라 드 파웬이라고 한다. 항렬상 네 이모쯤이 되겠지.”
마레이보다 머리 하나 이상은 커 보이는 여인이 마레이의 뒤에 서 있었다. 긴 녹색 머리에 웨이브가 들어가 있었고, 자수정을 연상시키는 보라색 눈이 날카롭게 마레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조각상 같다. 무표정한 얼굴도, 백옥 같은 피부도, 눈을 뗄 수도 없는 미모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느낌들이 그녀를 인간이 아닌 차가운 석상처럼 생각하게 한다. 거기에 고풍스러운 제복이 더 그런 느낌을 더할 뿐이었다.
“짐은 그게 다인가?”
“네....”
자신을 이모라고 소개한 라벨라는 시골 마을에서는 찾 볼 수 없는, 어린 마레이의 눈이 휘둥그레질 미녀였다. 거기에 군인같이 딱딱한 말투가 자연스럽게 보이는 신비한 여인이었다. 거기에 가슴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훈장과 약장들이 그녀를 더욱 멀게 느끼게 한다.
“일단 집으로 가지. 마차가 준비되었으니 따라오도록.”
손가방을 들어준다던 라벨라의 제안을 거절한 마레이는 자신의 손가방을 들고 그녀를 조심스레 따라 마차에 올랐다. 자동차가 돌아다니는 시대에 마차는 구세대의 유물로 남는 대신, 귀족 가문에서나 볼듯한 그런 물건으로 변해버렸다. 따라서 마레이는 처음 타보는 마차에서 불편한 동행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넓은 마차에서 라벨라는 한 동안 말없이 마레이를 관찰하듯 꼼꼼히 훑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없는 마레이는 애써 모른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벽 주변에는 이런 미녀는커녕, 자신의 또래의 아이들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얀 눈이 잔뜩 내리는 방벽 주변에서 대부분은 어르신들과 함께 있었기에 마레이는 눈앞의 미녀에게 무어라 말을 걸 용기 또한 없었다. 또, 사람을 짓누르는 위엄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것이 섞인 시선을 받아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자신을 이모라 소개한 라벨라 드 파웬이었다.
“검은 머리는 언니를 닮았군.“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마레이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네 어머니 말이다.”
“많이 닮았나요?”
“그래, 무척이나.”
라벨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움직임에 맞춰 작게 소리를 내는 훈장들이 쇳소리를 냈다. 어머니라는 말이 무척이나 멀게 느껴졌다.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잔향을 내는 이름이 이제는 낯설다.
라벨라의 보라색 눈동자가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동안 마레이를 맡아준 사람들은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릴 정도의 나이를 가지신 분들이었다. 편지에는 라벨라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었기에 이번에 자신을 돌봐주시는 사람이 어르신 정도를 생각하고 왔지만, 젊고 지적인 미녀라는 사실에 놀라 제대로 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거기에 고귀하다는 느낌을 팍팍 주는 모습이라 더 그럴지도 몰랐다.
행동 하나하나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품에 마레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재미있는 사람이었지, 다정하기도 했고. 어릴 적에는 날 종종 돌봐주곤 했다. 집안의 사람들이나 사용인과 완전히 동떨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흑요석 같아서 항상 부러워했었지. 나이를 먹고 먼 친척이 아니라, 진짜 친언니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종종 했었다."
"네...."
요정이라 불리는 엘프들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녹색 머리칼, 양 끝이 올라간 눈매는 사람을 묘하게 따르게 하는 카리스마가 담겨있었다. 여러 단추로 채워진 제복 위로 존재감을 과시하는 커다란 가슴과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그리고 커피색 타이츠에 감싸고 있는 아름다운 곡선. 잠시라도 시선을 주었다가는 매료 되어버릴 것 같은 모습에 마레이는 그녀로 가는 시선을 애써 창밖으로 돌렸다.
“앞으로 널 우리 집에서 돌봐줄 예정이란다. 원래는 감찰청에 자리를 잡을 때, 널 바로 데려올 생각이었는데, 대숲으로 파견이 꽤나 길어져서 말이지. 그리고 돌아오고 나서 바쁘게 처리해야 할 일들도 많아서 말이다. 학교 수속 과정도 다 처리했으니 천천히 익숙해지기만 하면 된다.”
“그렇군요.”
너무 긴장해서 말이 잘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마레이가 불편하지 않게 계속 이야기를 건네는 라벨라는 꽤 다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동안 자신을 돌봐준 어르신들은 모두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마레이는 이번처럼 두근거리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간단한 인사치레를 몇 번 건넸다 받았다 하는 동안 어느새 마차는 커다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정원은 무척이나 넓었다. 꽃들은커녕 드문드문 심겨 있는 나무와 흔들 그네, 일정하게 깎인 잔디가 라벨라의 성격을 조금이지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지고 싶은 방이 있는가? 넓은 집이지만 안 쓰는 방이 많으니 편하게 고르거라. 역시 큰 방이 좋겠지? 남자아이라면 잡동사니 같은 걸 종종 모으다 보니 큰 방을 줘야겠다고 미리 결정했지만 말이야. 후후.”
혼자 결정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마레이는 대답하는 대신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라벨라를 따라가며 마레이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커다란 집, 요정같이 아름다운 미녀와 같이 산다니. 가족이었지만 말이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장성한 자식이 생기다니, 재미있는 일이야."
"죄, 죄송합니다."
라벨라는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털어냈다. 그리고 앞장서서 걷는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웨이브 진 머리카락에서 녹음이 무성한 산에서 아침을 연상시키는 기분 좋은 향이 났다.
“종종 이름 모를 새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때는 먹이를 주면서 천천히 친해지면 어깨 위에 올라와 재롱을 부리기도 하지. 이름을 지어준 아이들도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설명해주도록 하지.”
라벨라는 방 앞에 있는 창문에 기대어 마당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은 그녀의 녹색 머리카락이 더욱 밝게 빛났다. 테라스를 가리키며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본가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정원이지만, 저기 저 나무. 보이나?"
"네."
"언니와 함께 심었던 나무지. 본가에 있었지만, 어떻게든 가져올 수 있었다."
마리 언니. 그렇게 중얼거린 라벨라는 한 동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우스운 것인지 작게 코웃음을 치고 방문을 열고 마레이의 방을 소개해주었다.
“아침이면 태양이 비추고, 일요일이면 대성당의 종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곳이다. 마음에 드는가? 방이 넓지만 이것저것 넣다 보면 금방 비좁아지겠지.”
“네.”
방은 마레이가 지내왔던 그 어떤 방보다 몇 배나 넓은 방에 책상과 침대만이 놓여있었다. 휑한 풍경과 다르게 금방이라도 청소를 한 듯, 먼지 한 톨 찾아볼 수 없는 깔끔한 방이었다. 깔끔히 닦인 창문 사이로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남자아이 방을 어떻게 꾸며야 할지 몰라서 일단 남겨두었단다. 이번 주말에 같이 상점에 가줄 터이니 그때 골라 보자꾸나. 저녁은 금방 준비될 터이니. 편하게 푹 쉬고 있거라. 언니의 자식이라면 내 자식과 다름이 없으니. 아니, 이제는 날 엄마라 생각해도 좋다.”
머리를쓰다듬고 사라지는 라벨라의 모습을 마레이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잘 부탁한다. 다시 소개하지, 감찰청 2국에 장에 직책에 있는 라벨라 드 파웬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만 같은 남이겠지만, 항렬상으로는 네 이모란다. 아까 중간중간 이야기했지만 네 어머니와는 절친한 사이였지. 원래는 3년 전에 널 맡으려고 했지만 ‘피가 흘러내리는 날’ 이후 많은 일이 있어서 수습하고나니 지금이었다. 위에 있던 사람들이 사라지다 보니까 계속 승진을 하게 돼서 말이야.”
“네에....”
어색한 대답이었지만, 라벨라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용기가 났다.
“마레이 드 파웬입니다.”
“간결해서 좋군. 학교는 내 조모님이 운영하시는 학교로 가게 될 것이야.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너는 이제 내 자식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을 하거라. 그리고...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그 눈에 관해서 물어봐도 괜찮은가?”
라벨라의 질문에 마레이는 자신의 왼쪽 눈을 매만졌다. 정확히는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안대를 가렸다. 재질을 알 수 없는 천이 주는 까끌까끌 느낌에 마레이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안대를 매만졌다.
“어머니께서 알 수 없는 주술이 걸려있으니 남들 앞에서 함부로 보이지 말라고....”
“...... 나는 그쪽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니..... 언니는 꽤나 저명한 주술사였었지. 학교에는 네 어머니의 스승님도 계시니 한 번 찾아 뵙거라. 15살이라고 했나?”
“예. 이제 곧 생일이 다가오니까요.”
겁에 질린 작은 동물 마냥 안대를 가리는 마레이의 모습에 라벨라는 더 이상 그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자꾸 언니를 떠올리게 하는 신기한 매력을 지닌 아이. 라벨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식성이 부족하니 앞으로 많이 먹여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다.
“학교에서 이것저것 배우겠지만, 혹여나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주렴. 할머님과 다르게 나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마음 것 지원해주고 싶단다.”
“아뇨.... 딱히....”
소극적인것일까. 아직도 낯선 곳을 경계하는 모습에 라벨라는 올라오는 한숨을 간신히 참아내고 작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몇 살에 결혼을 해야 이런 아이가 있을까, 지금이라도 결혼 한다면 몇 살 쯤에 이런 아이가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 피곤한 아이를 너무 오래붙잡고 있었구나. 목욕을 마치고 오늘은 푹 쉬거라. 내일 급한 일정이 생기지 않으면 둘이서 상점가를 둘러보자구나.”
“네.....”
제복의 겉옷을 벗은 그녀의 와이셔츠 위로 거대한 봉우리에 시선을 뺏겼던 마레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이모라고 소개했지만, 그동안 만났던 친척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아름다운 누나와 함께라고 생각하니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옷 안을 자꾸 상상하게 만드는 몸매에 마레이는 서둘러 잡념을털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