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처절한 반격
다행히도 수성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수인종 연합이 이유 모르게 빨리 물러났기 때문이다. 사실 지원군을 요격하면 어쩌나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나는 히폴리타에게 진실을 듣고 경악했다.
"뭐......? 귀족 연합이 진짜가 아니었다고?"
"네, 그렇게 시기 좋게 나타날 리가 없잖아요. 임시방편으로 만든 깃발이죠."
히폴리타는 깃발 중 하나를 내밀었다.
"잘 보면 군데군데 어색한 부분이 있어요. 멀리서는 잘 모르겠지만."
"어..... 그렇긴 하네."
씨발, 근데 나도 완벽히 속아버렸잖아?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고 하던가. 히폴리타는 그 기본을 충실히 이행했다.
"내가 진짜로 믿고 외치니까 수인종도 속을 수밖에 없었겠어......."
"후훗, 당연하죠. 연기였다면 힘들어도, 천인장님은 진짜 지방의 귀족 연합이 참전한 줄 알았잖아요?"
힘없이 고개를끄덕였다. 그래도 다같이 속아서 결과가 좋으니 다행일까.
나도 속았다는사실이 조금 분했다.
"제길, 다음부터는 미리미리 말해줘."
"가는 중에 생각난걸요?"
원래 계획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나는 히폴리타가 처음부터 계책을 짰는데 숨긴 줄 알았다.
"후우, 근데 수인종 연합은 왜 저렇게까지 물러난 거지?"
수인종 연합의 군대는 본래 진지까지 돌아갔다. 거기서 끝나면 괜찮은데, 조금 쉬더니 아예 더 멀리 도망갔다.
"더 멀리 가봐야 이득이 없을 텐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히폴리타는 싱긋 웃었다.
"짐승들 머리 속이야 뻔하죠. 저한테 제대로 속아서 귀족 연합이 나선 줄 아는 거잖아요?"
"그치."
"최소한의 생각을 할 줄 아는 자라면, 빈집털이를 생각할 거예요. 기동력은 변하지 않는 수인종의 장점이니까요."
"아..... 소형 영지를 공격하러 갔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히폴리타.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녀석들이 방비할 순 없을 텐데? 작은 영지에는 성도 없어. 기껏해야 귀족 저택인데....."
영지민이 1만 명도 안 되는데, 성을 쌓을 순 없다. 신경 쓴 영주라면 목책이나 있을 거고, 아니면 귀족 저택이 고작일 거다.
동의하는 히폴리타.
"맞아요. 빈집이 아니라 병사가 꽉 찬 영지겠지만...... 워낙 작으니까 당하겠죠."
"괜찮은 거야?"
"어쩔 수 없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더피 백장령이야 방어시설이라도 있죠. 하지만 그런 곳에는 아무것도 없는걸요. 애초에 전쟁이 벌어지면 점령당하는 게 당연한 곳이에요."
이미 도망친 귀족도 있을걸요? 히폴리타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도망친 귀족이라..... 가능성 높네."
"네. 전부 챙길 수는 없어요. 소형 영지를 점령하면서 수인종들의 체력이라도 빼면 다행이죠."
도망간 수인종 연합의 숫자가 5천 남짓이다. 그런데 소형 영지는 인구를 다 끌어모아야 그쯤 된다.
그냥 지나가면 짓밟히는 것이다.
나는 헤르파를 쳐다봤다.
"헤르파.....피곤하겠지만, 한 번 더 정찰할 수 있겠어? 정확히 어떤 영지가 점령당했는지 봐야 해."
"오빠아..... 나 힘들어요오...."
투덜거리는 헤르파. 나는 재빨리 상처를 내밀었다.
성문을 지키다가 생긴 상처인데, 아직 아물지 않았다. 자그만 혀를 내밀어 할짝이는 그녀.
스릅-스릅-.
"마시써.....!"
헤르파의 얼굴에 조금씩 활기가 돈다. 한참이나 피를 핥은 그녀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더 다녀올게요!"
"그래. 저기 수인종 연합이 지나간 길을 쭉 따라가. 몇 천 명이 지나갔으니까, 흔적 찾기는 쉬울 거야."
"네에에!"
안개로 변해 날아가는 헤르파. 나는 긴장이 좀 풀려서 주저앉았다.
털썩-.
성벽에 기대자 주위 병사와 영지민이 시선을 보낸다. 걱정하는 눈빛도 있었고, 존경하는 눈빛도 있었다.
조금 부담스러워서 손을 내저으려는 찰나, 갑자기 박수가 시작된다.
짝-짝-
누가 처음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박수 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이내 주변의 모든 영지민과 병사가 열렬히 손뼉을 쳐댄다.
짝짝짝짝ㅡ!
"왜, 왜 그래?"
"수고하셨습니다."
"응?"
"저희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맞습니다!!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느닷없이찬사가 쏟아진다. 나는 그저 '내 성'을 지키려고 한 건데......
이들은 내가 공동 주인이 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
"딸에게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더피 성은 이름 모를 영웅께서 지켰......"
"차라리 이름을 알려주십시오! 저기 음유시인 나부랭이가 지나가면 두들겨 패서라도 기억시키게!"
"부탁합니다!"
곤란하다. 이런 영웅담은 곤란하다.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히폴리타는 재밌다는 듯 짧게 뱉었다.
"제스 홀란트. 그의 이름이야."
"오오, 이름마저 멋집니다!"
"제스 홀란트! 제스 홀란트!"
다시 시작되는 연호.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모르겠고, 일단 잠이나 자자.'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다행히 잠은 잘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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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하룻밤 진하게 자자, 피로는 거의 풀렸다.
경계는 내 천인대의 일부가 담당했고, 더피 성의 병사들도 긴장을 풀고 다들 푹 쉬었다.
그리고 상쾌한 아침, 나는 헤르파의 이야기를 들으며 경악하는 중이었다.
"하룻밤 만에 점령.....?"
"네에에. 아예 박살이 났어요오....."
헤르파는 드물게 풀죽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봤던 참상을 설명했다.
"사람들이 도망가는데 막 죽이고오..... 무기도 없는 사람을 찌르고...."
"차근차근 말해라."
그녀의 말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일반 영지민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는 거다.
그 와중에 저항이 있어 피해를 본 듯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하기야 영지민이 도끼 들고 덤벼봐야 얼마나 통하겠어.'
이미 하루종일 공성전을 펼쳤던 수인종이다. 녀석들도 쉴 거라고 생각했건만, 쉬지 않고 몰아붙인 모양이었다.
아마 차륜전을 위해 쉬던 병력을 활용했으리라.
나는 입술을 짓씹었다.
"대체 왜 그렇게 잔혹하게 구는 거지......"
"종족이 다르니까요."
옆에서 히폴리타가 끼어들었다. 의문의 시선을 보내자, 차분하게 설명한다.
"인간끼리의 전투라면 영지민을 살릴 거예요. 새로운 주인도 영지민이 있는 게 좋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수인종이 인간을 살려서 어디에 쓰겠어요. 저들 입장에선 죽이는 게 맞아요."
"하아....... 가만히 내버려 두면 다른 영지도 같은 꼴이 된다는 건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히폴리타의 얼굴도 마냥 밝지는 않다.
"천인장님, 당장 나설 생각은 하지 마세요."
"왜.....?"
"병사들이 쉬어야 해요. 고작 하룻밤 쉰 거로는......"
"하아아, 알겠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대로 당하라는말인가.
눈살을 찌푸리자, 재빨리 대안을 내놓는 그녀.
"쓸만한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요."
"어떤?"
"수인종은 영지민을 다 죽이고 있잖아요? 그러면 수인종이 나누어져서 마을별로 쳐들어갈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한 영지에만 마을이 몇 개는 된다. 자그만 마을까지 합하면 족히 10개도 넘으리라.
'5천 명이 거기를 순회공연할 수는 없지. 분명 나뉘어서..... 음?'
상대가 나누어졌다. 바로 '각개격파'라는 단어가 떠올렸다.
내 얼굴을 보고 살짝 웃는 그녀.
"맞아요. 마을에 매복했다가 수인종을 덮치는 수도 있겠죠."
"확실히, 그거라면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히폴리타는 조금 씁쓸하게 말했다.
"우리가 매복하지 않은 다른 마을은 박살 나겠지만 말이에요."
"......"
그랬다. 마을이 10개라고 치면, 정예를 뽑아 매복하는 곳은 1-2개 마을뿐.
나머지는 지금처럼 학살극이 일어나는 셈이다.
수많은 영지민의 목숨을 발판으로 적을 갉아 먹는 작전.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해야 해.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가 아니야."
"네."
간결한 대답. 어째 히폴리타의 얼굴에 자책이 스친다.
더 좋은, 희생이 없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한 탓일까?
'하지만 병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야. 이런 상황에서 희생 없이 이기는 건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해.'
마냥 이상을 외칠 수는 없다.
나는 병사들에게 작전을 설명하고는 마을에 매복할 병력을 뽑기 시작했다.
"자, 누가 자원해서 매복하겠나? 참고로 실력을 가려서......"
"나.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악에 받친 더피 백작의 지원. 그녀는 씹어뱉듯이 말했다.
"수인종을 처죽일 수 있는 일이라면, 뭐라도 좋죠."
어째 복수귀가 하나 탄생할 것만 같은 얼굴이다. 전쟁에서는 저 표정 하나가 백 마디 말보다도 믿음직했다.
“합격.”
나는 고르고 고른 정예를 대동하고 더피 성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