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1화 〉바보가 머리를 쓰면 안 되는 이유
팔이 뻐근하다.
내가 부순 사다리가 몇 개였더라? 대가리를 깬 수인종은 몇 명이고?
아예 가늠도 되질 않았다. 한가하게 그딴 걸 셀 여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 멀리서 대기 중인 수인종을 바라봤다. 대략 500여 명. 저런 놈들이 동서남북으로 있다. 총 4부대.
즉 2천의 병력이 공성에 참가하지 않고 대기하는 것이다.
'차륜전...... 단번에 몰아치는 건 힘들어 보이니까 치사하게 나오는군.'
문제는 상당히 효과적이라는 거였다.
수성 병력은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크다. 거기에 더해 차륜전을 벌여서 체력적인 열세까지 더해지면?
"어쩌면..... 무너질 수도 있어. 대체 언제쯤 도착하는 거냐, 히폴리타."
쐐애액-!
수인종 하나를 또 맞추며 중얼거린다. 직접 싸우는 병사들은 다리가 풀려 해롱거렸다.
"하아.... 하아."
"정신 차려! 조금만 있으면 지원군이 다시 올 거다! 이번에 오는 지원군은 천 단위야."
"......예!"
쉴 새 없이 싸운다는 게 이래서 어려운 거다. 제아무리 단련된 병사라도 긴장에 육체적 피로가 더해지면 버티질 못하니까.
한쪽에 적당히 도움을 주고 다른 성문으로 달려갈 때였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에델과 마주친다.
"제스님....!"
짧은 시간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한 그녀. 푹 쉬면 나아지겠지만, 지금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괜찮나?"
"예..... 사람이 죽어 나가는데 제가 불평할 수는 없지요."
애써 웃는 그녀. 에델은 마력을 바닥까지 쓰고도, 다시 조금이라도 모이면 마법을 사용했다. 당연히 회로가 정상적이진 않을 거다.
난 망설임 없이 하멜의 양기를 꺼냈다. 뚜껑에 두세 방울을 담아서 에델에게 건넨다.
"받아. 영약으로 쓰기엔 부족한 양이어도, 잠시 보충은 될 거야."
스릅-.
단번에 먹어 치우는 에델.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화색이 돈다.
"감사합니다."
"너무 애쓰지 마. 네가 다치면 큰일이니까."
에델은 말없이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맡은 역할에 충실하게 말이다.
'하지만 뒤에서 쉬는 중인 쌩쌩한 대기 병력이 들이치면.....'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새로운 놈들이 달려들면 균형이 단번에 깨질 것이다.
어쩌면 그게 더피 성의 마지막일 수도 있었다.
"히폴리타......"
그리 중얼거리던 때였다. 내 눈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게 보였다.
"어......?"
이곳은 대체로 황무지였지만, 그래도 나무와 풀 따위가 많은 지형은 존재했다. 그곳에서 깃발 십수 개가 당당하게 등장한다.
"제국군의 깃발이 아닌데?"
내 천인대는 결국 제국군 소속. 깃발도 제국을 상징하는 것과 군단을 드러내는 것을 사용했다.
하지만 저것들은 처음 보는 문양.
재빨리 근처의 병사를 붙잡고 물었다.
"이봐! 저게 무슨 깃발이지?"
"예? 뭐, 뭘 말하시는지....."
"저기 말이야!"
가슴을 치며 물었지만, 병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답답해하다가 실수를 깨달았다.
'제길, 나랑 시력부터가 다르지!'
눈이 좋은 기사를 찾아야 한다. 갑옷을 입은 녀석에게 나는 듯이 날아가서 물었다.
"너는 저게 보이지?"
"어..... 넵!"
"저것들이 무슨 깃발이냐?"
기사는 더듬더듬거리며 답했다.
"매, 맨끝은 도카 가문의 문양이고..... 그옆은 토이 가문, 세 번째는 잘 모르겠고....."
"가문? 저게 전부 귀족 가문의 문양이라는 거냐?"
"대,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근방의 영지에서 쓰는 문양입니다."
됐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진짜 타이밍 좋게 지방 귀족의 지원이 온 것이다.
여기에 내 천인대가 더해지면?
나는 기쁨에 차서 외쳤다.
"다들 들어라!! 귀족 연합이 우리를 도우러 왔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사, 사이도 안 좋은데 그래도 정이 있구나....!! 다행이다. 다행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영지민의 경악. 사실 귀족 가문의 문장은 여러 개일 때보다, 하나일 때가 더 믿음직스럽다.
'왜냐면 여러 가문이 연합한다는 건 그만큼 허약하다는 뜻이잖아.'
만약에 저기 걸린 게, 십수 개의 귀족 가문이 아니라 '5대 공작가의 깃발' 하나였다면?
나는 이미 전쟁에서 이겼다고 판단했을 거다.
그깟 소형 영지 십수 개가 합쳐봐야 상대도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당장은 자그만 손이라도 반가운 상황. 게다가 물정을 잘 모르는 영지민이나, 병사는 속이기 쉬웠다.
최대한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귀족 연합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 저들이 오면 이긴 거나 다름없다!"
"와아아!!"
"다른 성벽에도 알려라! 열 개도 넘는 귀족 가문이 우리를 지원하러 왔다!"
"예!"
입에서 입으로 소식이 퍼진다. 말은 전달될수록 살이 붙었다.
다섯 번을 넘어가자, 저기 떨어진 성벽에서는 이렇게 외쳤다.
"제국의 귀족 연합이 원군으로 왔다!"
"공작 가문의 지원이다!"
나는 터지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입술을 꽉 깨물며 돌 투척에 집중한다.
쐐애액-!
'제국의 귀족 연합....? 그거 내가 있던 군단이잖아. 제국의 귀족이 뭉치면 저깟 수인종 연합쯤은 아무것도 아니긴 하지.'
수인종들은 혼란에 빠졌다. 갑자기 지원군이 온다고 하면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이다.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놈들.
"대체 귀족이 어디서.....?"
"어! 저기 깃발이다!"
수인종 몇몇이 드디어 수풀 방향의 깃발을 발견한다. 그들의 지휘관에게도 소식은 전달되었다.
"대장, 우리 뒤쪽에서 병력이 오는 것 같은데?"
"응? 하필 이쪽에....!"
멀리서도 지휘관이 인상 쓰는 게 보인다. 각 종족의 지휘관이 서로 뭉쳐서 토론한다.
정확한 대화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결론이 꽤 빨리 내려졌다는 건 확실했다.
왜냐면 이런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성을 돌아간다! 북문에서 모인다!"
"예!"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남문 방향이다. 아예 지원군의 반대편에서 모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북문 쪽 공격은 거세겠지만.....
'전체적으로 편해지겠지. 어차피 수성은 면적을 방어하면 되는 거야.'
숫자가 늘어난다고 공세가 무작정 강해지지는 않는다. 성벽에 붙는 숫자는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공략하던 성벽을 버리고 멀리 우회하는 수인종들.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와 영지민들은 겨우겨우 한숨을 돌렸다.
"그래도 옆 영지에서 도와줘서 다행이야."
"우리 영주님이 무너지면 다음은 놈들이잖아....."
"아휴.... 가슴 쑤셔."
"지금 크다고 자랑하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녀석들. 나는 개중에 그나마 멀쩡한 몇몇을 추렸다.
"너, 그리고 너!"
"예?"
지목받은 병사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진다. 나는 아주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는 북문에 지원 간다."
"하, 하지만 이때까지 싸웠....."
"북문의 공세는 더 심해질 거다. 성벽이 뚫리면 다 죽는 거 알지?"
"......"
지목받은 병사들은 크게 저항하지 않고 따라왔다. 비척대기는 해도, 막상 싸우면 힘낼 거다.
그나저나 조금 의문이 들었다.
'지원이 올 수도 있긴 해. 근데 이렇게까지 타이밍이 좋나?'
오려면 싸우기 전에 오던가, 아니면 함락이 끝나고 오는 게 보통이다.
지금 등장하는 건 너무 신기했다.
"쯧. 좋은 게. 좋은 거지."
아무튼 상황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나는 의심을 접어두고 걸음을 옮겼다.
1차 수성전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한편 수인종 연합은 꽤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들의 본래 목표는 최대한 제국군을 끌어내는 거다. 애초에 오크 제국의 제안으로 출병했으니 말이다.
즉, 직접적인 영지 점령이 없더라도 제국군 1개 군단을 동원시키면 성공인 셈.
하지만 상황은 그리 이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크르르, 고작 천인대 하나에 지역 영주의 연합이라고?"
연합군의 수장, 엽표족 차르는 이 상황이 아주 좆같았다.
목표는 제국군 1개 군단을 잡아두는 것인데, 정작 상대하는 병력은 너무 초라했다.
군단은커녕, 천인대 하나가 고작이지 않은가. 지역 귀족의 병력은 쳐주지도 않았다.
그놈들이 나서봐야 오크 제국의 전선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으니까.
타조족의 족장은 멍한 얼굴로 말했다.
"그냥 북문을 뚫으면 되잖아?"
"새대가리 새끼......"
"뭐?"
엽표족 차르는 타조족 족장의 말을 그냥 무시했다. 종족 특성으로 멍청한 타조족과 말을 섞으면 답답해질 뿐이다.
‘한곳에 집중한다고 금방 뚫리진 않아. 그 사이에 원군이 도착해서, 수성 병력이 보충되면?’
완전히 실패다. 그렇다고 포위를 유지해서 지원군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수성 병력과 합쳐서 앞뒤로 협공당할 뿐이니까.
“그럼 요격?”
지원군만 따로 요격한다. 나쁘진 않았다. 그때 적마족 우두머리가 고개를 저었다.
“목표는 제국군이다. 천인대를 요격하는 건 몰라도, 귀족 연합과 싸우는 건 쓸데없는 병력 소모야.”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 당장 고기가 없어져서 며칠이면 굶어죽을 판이야!”
“그건 너네 사정이긴 한데......”
너희가 사라지면 연합 전체가 곤란해지지. 적마족 우두머리가 고개를 주억인다.
그때, 엽표족 차르는 생각났다는 듯 머리를 번쩍 들었다.
“빈집을 터는 거야! 저 자식들 지네 병사를 죄다 끌고 나왔을 거 아니야?”
“그, 그렇지.....”
“그러니까 바로 병력을 돌려서 저놈들 영지를 향하는 거다. 무혈입성일 거야!”
수인종 연합의 수장들은 눈을 반짝였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기동력이 우월한 수인종 앞에서 병력을 끌고 나왔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자식이 어쩐 일로 맞는 말을 하는군.”
“동감이다. 오랜만에 좋은 생각이야.”
엽표족 차르는 주먹을 불끈 쥐며 물었다.
“다들 동의하는 거지?”
“물론이다. 빈집만큼 탐나는 건 없지.”
서로를 쳐다보며 외치는 수장들.
“가자.”
“가자!!”
물론 근방의 귀족들은 병사를 데리고 꼭꼭 틀어박힌 상태였다.
히폴리타에게 속은 이들은, 졸지에 꽉 찬 집을 공략하는 꼴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