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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8화 〉지키는 자 (98/111)



〈 98화 〉지키는 자

"헤르파! 성벽이 불타는 거면 함락되었다는 뜻이야?"
"어..... 진짜 불이 붙었던데요오오....."

고개를 갸웃거리는 헤르파. 내가 답답해하는 찰나, 더피 백작이 끼어들었다.

"방비 체계일 겁니다."
"응?"
"성벽에 붙는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불을 붙였을 겁니다. 성벽에 일회용 화염 촉매를 심어놨거든요."
"오.....!"

헤르파도 눈을 반짝였다.

"맞아요오..... 성벽 위가 아니라, 그냥 벽이 불타고 있었어요오.....!"
"그럼 아직 싸우는 중이라는 거네? 빨리 가야 해!"

다행히 함락된 건 아니다. 하지만 더피 백작이 말하는 것으로 보아, 방비 체계도 여러 번  수 있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기야 영구용으로 설치하려면 가격이 훨씬 비싸지니까. 이런 중견급 영지에서 설치하기는 힘들지.....'

일회용이라도 깔아둔 게 다행인 수준이다. 더피 백작의 편집증적 성격 덕분이리라.
다행히 아직 잠들지 않은 시간. 나는 크게 외쳤다.

"전원 집합하라!! 진형을 갖추고 백작의 성으로 진군한다!"
"예!"

병사들은 재빨리 무장을 챙기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름대로 빠른 속도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나는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단만 따로 데려갈까? 제스 기사단이랑, 백합기사단이면 어느 정도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히폴리타가 짧게 외쳤다.

"천인장님, 소수 병력을 데리고 먼저 가세요. 저는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갈게요."
"오..... 고마워. 헤르파는 너한테 맡길게."
"저야 좋죠."

생긋 웃는 히폴리타. 내가 빠져도 천인대는 잘만 돌아간다. 이 사실이 참 다행이었다.
게다가 최고의 정찰병인 헤르파를 맡겼으니, 알아서 적재적소에 병력을 배분하리라.

나는 금방 준비를 끝마친 기사단을 돌아봤다. 이 녀석들만 데려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폰 용병단도 준비 끝났다."
"벌써.....?"
"용병을 뭐라고 생각하나. 언제 어디서든 싸울 준비를 하는 족속들이다."

제이카 누나의 묵직한 대답. 용병 중대는 이미 상당수 낙오되거나, 죽어서 숫자가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믿음직스러웠다.

"알았어. 제스 기사단, 백합기사단, 그리고 용병 중대까지. 우리는 선발대로 출발한다."
"예!!"
"우리의 목표는 평지에서 무식하게 싸우는 게 아니다. 송곳처럼 돌파해서 수성 병력과 합류하는 거다. 알겠나?"
"예에!!"

성벽 위의 좁은 공간. 실력자가 날뛰기 가장 좋은 환경이었다.
제발 우리가 갈 때까지 버티길.
나는 간절히 기도하며 말을 몰았다.

"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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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피 백작령의 성.
이곳에서는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재빠른 수인들이 어떻게든 성벽을 기어오르려고 시도한다.
사다리를 가져오는 놈도 있었고, 그냥 사지를 이용해 등반하는놈도 있었다.

더비 백작의 병사들은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었다. 다행히 평소에 백작이 준비해둔 게 많아 초반에는 괜찮았다.

"무식한 놈들!! 끓인 기름은 어디 있나?"
"다 떨어졌습니다....."
"벌써? 물이라도 끓여!"

문제는 그마저도 슬슬 동이 난다는 것. 더피 백작이야 무한정으로 방비책을 세우고 싶어 했지만, 예산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 때문에 초반의 단단한 방어와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구멍이 생기고 있었다.
마침 엽표족 하나가 성벽 위로 올라와서 마구 날뛴다. 기겁하며 기사를찾는 병사들.

"기사님!! 수인종이 올라왔습니다."
"합공해!"
"성벽을 단숨에 올라온 놈입니다. 실력이 출중한 터라 저희로서는....."
"제길!"

보고를 받은 여자도 기사였지만, 고작해야 수습 기사일 따름이었다. 그녀가 나선다고 해도 해결하지는 못하리라.
수습 기사는 칼을 뽑으며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죽어도 되려나? 아직 해줄 일이 많은데.....'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설 수도 없다. 수습 기사가 다가가자, 날뛰던 엽표족은 끅끅거리며 웃었다.

"고기 도둑 왔나? 생긴 것도 쥐새끼 같네."
"......"

대답 없이 칼을 겨누는 수습 기사. 기세만으로도 느껴졌다. 자신은  수인종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정예 전사? 그보다도 강한 거 같은데......'

어차피  싸움. 수습 기사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을 노렸다.

"도둑년아! 네 고기로 배를 채워주마!"
"......"

엽표족 특유의 어마어마한 속도가 발휘된다. 수습 기사는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옆구리를 얻어맞았다.
터엉-!

"크흐흐, 허약한 것이!"
"......그리고 목."

엽표적의 습성을 알고 있다. 본디 맹수라서 마무리로 목을 물어뜯는 걸 즐긴다.
수습 기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예측.
그녀의 단련된 감을믿으며 몸을 내던졌다. 그러자 목을 물어뜯으려던 엽표족의 몸이 잡힌다.

"어.....? 이까짓 저항을!"

물론 몸을 잡았다고 이길 수는 없다. 금방 내팽개쳐질 것이다. 하지만 수습 기사는 젖먹던 힘을 다해 외쳤다.

"밀어!날 밀어라!!"
"예, 예!"

아주 짧은 망설임 이후, 병사들은 수습 기사와 엽표족을 바깥으로 밀었다. 그들도 전투로 잡을 수 없다는 건 알았던 것이다.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엽표족.
하지만 수습 기사는 놓아주지 않았다. 이빨까지 써가며 벗어나는  막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따위 수작에!"
"밀어라! 더 빨리!"

마침내 성벽의 끄트머리에 왔을 때, 수습 기사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훌쩍 뛰었다.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자유낙하. 짧은 해방감이 찾아온다.

"이딴 쓰레기 같은 수작을!"

엽표족은 추락하는 중에도 몸을 뒤집어 수습 기사를 아래로 깔았다. 이러면 충격을 덜 받으니, 생존할 수 있을.....
피융- 푸우욱ㅡ!

"어....?"

그의 가슴을 뚫고 나온 건 석궁의 화살촉이었다. 이어서 날뛰던 엽표족 위로 화살비가 쏟아져 내린다.

"아, 아니...."

십수 개의 화살을 꽂고 선 채로 죽어가는 엽표족.
이렇게 죽을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 그의 얼굴에는 황당함이 가득했다.

수성전은, 작은 영웅이 하나하나 모여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영웅들마저 더 찾기 힘들어졌을 무렵, 저 멀리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두두두두ㅡ!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큼직한방패였다. 기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패.
방패를 둘러멘 사내는 우렁차게 외쳤다.

"제스 홀란트가 왔드아아아!!"
"아이오 더피가 여기 있다-!"

숫자는 백을 살짝 넘는다. 수천이나 되는 수인종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병력.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을 지키던 병사들에겐 희망 그 자체였다.

성벽 위에 있으니 더 잘 보인다. 병사들은 희망을 널리널리 퍼트렸다.

"원군이다! 나가신 백작님이 원군을 끌고 왔어."
"조금만 버티면 된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쏟아부어!"

대체 언제까지 버텨야 하나. 그런 생각에 절망을 느끼던 병사들에게도 활기가 돈다.
평소 사냥만 하다가 궁병으로 차출된 이들도 힘내서 다시 활을 쏘아냈다. 물자 운반 따위를 담당한 영지민도 힘을 되찾은 건 물론이다.

원군의 존재.
그것만으로도 수성 병력은 더욱 견고해졌다. 물론 이걸 보고만 있으면 멍청이다.
수인종들은 재빨리 역할을 배분했다.

"평지에서 가장 강한 게 누구지?"
"타조족."
"좋아, 저기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은 타조족이 맡아서 처리해라."

투다다다ㅡ
살짝은 경박하게 뛰는 소리가 퍼진다. 공성전에서는 애매했던 타조족이 제스 홀란트의 부대를 요격하러 나선 것이다.

다섯 갈래에서 뻗어 나와 제스 홀란트에게 향한다. 다섯 갈래의 병력 하나하나가 200을 넘었다.
저걸 일일이 상대하면 합류도  하고 전멸하게  것이다.

제스 홀란트는 그의 믿음직한 누나, 한나 홀란트를 바라봤다.

"누나?"
"알지알지."

파앗-!
말에서 크게 뛰어오르는 한나 홀란트.
그녀는 공중에서 그림 같은 투창 자세를 취하더니, 이내 창을 쏘아냈다.
출발과 도착을 구분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빠른 투창이었다.

범인의 귀에 들리는 건, 그저 거대한 폭발음뿐.
콰아아앙-!
정면으로 달려오던 타조족 부대가 흙먼지에 휩싸인다. 언뜻 핏덩어리도 보이는 듯했다.

"됐어. 쭉 가면 돼."
"역시 우리 누나."

한나 홀란트는다시 말 위에 착지해서 돌격했다. 가장 앞장서서 달린다.
그녀 자신이만든 흙먼지 안으로 진입하자, 선명한 피냄새가 났다.

이어서 제스 홀란트의 부대 전부가 흙먼지 안으로 진입한다. 가시거리가 극도로 짧아진 상황.
적아를 구별하기 힘들면, 포위진을 만들 수도 없다.

"그냥 달려! 걸리적거리는 놈이 있어도 무시해!"

몇몇 낙오자는 어쩔 수 없다. 실제로 용병 중대에서 잡히는 병사가 있었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두두두ㅡ

"속도를  올려라!"

매캐한 흙먼지를 뚫고 나온다. 다섯 갈래로 요격하러 나왔던 타조족은 어느새 뒤에 위치했다.
간단히 돌파해버린 것이다.

"저기다. 쫓아라!"
"구우우우!"

흙먼지에 나온 제스 홀란트를 보고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는 타조족들.

하지만 늦은 감이 있었다. 에델의 입이 달싹이고 거센 바람이 분다.
날려버릴 수는 없어도, 속도를 늦추는 강풍.

타조족과 제스 홀란트가 이끄는 지원군의 거리는 점점 벌어질 뿐이었다.

마침내 성벽 부근까지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해자는 수인종이 채워버린 지 오래다.
성문을 열고 합류만 하면 되는 상황.

문제는 성문을 열면, 다시 닫기가 무진장 힘들다는 거다.

지원군이 들어오는 걸 넘어서, 수인종까지 입성하면 성을 지킬 수 없게 된다.
모두가 망설이던 순간, 제스 홀란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외쳤다.

“성문을 열어! 그리고 전부 들어가라!”
“천인장님.....?”

그는 성문 앞에서 방패를 땅에 꽂았다.
쿠우웅ㅡ!

“나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 자리를 지킨다. 더피 성의 성문이 되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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