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더피 백작(3)
더피 백작을 조교해?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기간이다.
'어디 하급 용병도 아니고, 나름 무력을 갖춘 백작이야. 반항을 깨고 조교하려면 생각보다 오래 걸릴 거야.'
그 시간 동안 더피 백작을 가두는 것도 문제고, 그동안 수인종 연합이 쳐들어올 수 있다는 것도 문제다.
아쉽지만 이 방법은 보류였다.
"안 되겠는데?"
"진짜? 뭐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순순히 수긍하는 한나 누나. 뭔가 기분이 묘했다. 누나의 반응이 마치......
'전문가한테 의견을 구한 일반인 같잖아? 아니, 내가 조교에 전문가급이긴 한데.'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 취급을 받으면 좋아해야 하나? 애매했다.
대신에 다른 의견을 내는 에델.
"제스님, 그냥 더피 백작을 항상 동행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흠?"
"앨리스 경의 옆에 두는 것입니다. 허튼짓을 부리는 순간, 더피 백작은 죽을 겁니다."
"맞는 말이네."
언제든 죽일 수 있는 위치에 두자. 얼핏 나쁘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진짜로 전투가 치열해지면 제어할 수 없어. 뭣보다 앨리스경은 가장 큰 전력인데, 아군을 묶는 데 쓰자고? 너무 심한 낭비야."
"그렇군요."
이것도 저것도 안 된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그냥 믿지 말자."
"예......?"
"믿지 말자고. 이 마을만 봐도 딱 감이 오잖아. 저 백작은 영지의 안전에 미친 듯이 집중하는 타입이야. 아마 본인 목숨하고도 바꿀걸?"
신뢰를 버린다. 그보다는 더피 백작의 성향을 이용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미리 빠지는 거야. 백작령에서도 비교적 뒤쪽으로 말이야."
"어...... 그러면 더피 백작이 수성전을 먼저 벌이겠군요."
"맞아. 저런 강박증이 있는 여자니까, 나름대로 버티겠지. 성을 두고 싸우느라 지쳤을 때 우리가 개입! 괜찮지?"
더피 백작이 수인종 연합을 물고 늘어지면, 내 천인대가 마무리를 한다.
어찌 보면 얄밉지만, 굳이 더피 백작과 협력할 필요도 없고 그녀를 믿지 않아도 되니까 최상이었다.
고개를 주억이는 한나 누나.
"나는 찬성이야. 원래 용병은 이런 자세로 살아야 한다고."
"평소라면..... 반대겠지만, 지금은 찬성입니다. 주제도 모르고 제스님을 노렸으니, 그 정도 벌은 마땅합니다."
"좋아, 결정이네."
의견은 하나로 통일되었다. 일명 방치플레이.
더피 백작이 최대한버텨주는 게 전략의 요지였다.
다시 여관으로 돌아가자, 손을 꼭 모으고 있던 더피 백작이 눈을 뜬다.
"화해할 거지? 그치? 나랑 힘을 합쳐서 막아야......"
"우리는 재정비를 하겠소."
"왜애애!!"
절규하는 그녀. 재정비라는 건 당장 참여하지않겠다는 뜻이다. 수인종 연합은 당연히 그 시간 안에 쳐들어올 테고.
"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러오. 아군에게 배신당했더니, 당분간은 싸울 수가 없소."
"이런 허약한 새끼!! 니물건만 한 마음을 가지니까 그러는 거야!"
"나는 좀 크오만?"
은근슬쩍 골반을 내밀었다. 옷 위로 어렴풋이 몬스터의 형상이 보인다.
"끄아악! 이상한 거 치워..... 아무튼 진짜로 재정비를 한다고?"
"그렇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오. 성이 함락되기 전에는 반드시 참전할 테니."
"너무 당연한 말이잖아."
신음을 흘리는 더피 백작. 그녀의 검붉은 머리칼이 벌써 푸석거리는 듯했다.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먹고 싶기는 하네. 이렇게 앙칼진 년은 오랜만이야.'
자꾸 땍땍거리는 것이 정말 특제 꿀밤을 먹이고 싶게 만들었다. 내 50kg짜리 방패로 내리치는 꿀밤 말이다.
더피 백작은 입술을 짓씹더니,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틀. 그거면 재정비가 끝나겠지?"
"길면 일주일은 걸릴 거요."
"야!!"
벌떡 일어나는 더피 백작. 뭔가를 더 따지고 싶은 듯했는데, 나는 그냥 무시했다.
몸을 휙 돌리며 말을 던진다.
"얌전히 기다리시오. 내 알아서 찾아갈 테니."
"저, 저게....."
"그리고 적반하장은 제발 정도껏 하길."
쾅ㅡ!
여관문이 거칠게 닫힌다. 물끄러미 여관 건물을 살폈다. 장식도 꽤 화려해서 '나 고급 여관이요.'라고 외치는 듯한 외관이다.
'역시 전쟁 중에 이런 곳에서 자는 건 사치지.'
병사들과 함께하자. 내 목숨을 끝까지 지켜줄 녀석들이니까.
우리는 마을의 공터로 돌아갔다. 한밤중의 소란과 다르게, 놈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불침번을 서는 몇몇만 반갑게 인사한다.
"추웅성!"
"그래."
"천인장님, 아직도 안 주무신 겁니까?"
"그냥 너희 곁에서 자고 싶어서 말이지."
"오오......"
적잖이 감동한 눈치다. 역시 지휘관은 병사들 틈에 있어야지. 그렇고말고.
나는 만족하며 적당한 천막을 찾았다. 물론 여분으로 세운 천막이 있을 리는 없고, 좀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내가 고른 건 헤르파의 천막이었다. 정식 부대원이 아니라서 아무도 다가오지 않는 위치. 잠도 혼자 자고 있었다.
다가가서 옆에 눕자, 헤르파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오......빠?"
"응, 오늘만 같이 자려고."
헤르파는 바로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낮에도 자주 하는 짓인데, 누운 상태에서 하니까 자세가 묘하다.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조물거리는 그녀.
"오빠는 따뜻해....."
"추웠어?"
"그건 아닌데요오..... 그래도 따뜻해."
헤실헤실 웃는다. 살짝 처진 눈꼬리가 자연스레 휘며 눈웃음을 쳤다.
그녀는 가슴팍에 손을 올린 그대로 잠에 들었다.
코오오-코오-
일정한 숨결이 쇄골을 간지럽힌다. 나는 그녀의 머리에 가만히 손을 얹고는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편안한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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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어제처럼 경비대장이 우리를 안내하는 일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소식을 못 들었는지, 우리를 영웅쯤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경비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듯 묻는 앨리스.
"도련님, 이곳 경비대가 조금 게으른 걸까요?"
"아닐 거다. 어제 일이 좀 있었지."
옆에 있던 에델이 차분하게 사건을 설명했다. 죽 들은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경비대도 동원되었겠군요."
"아..... 그쪽이군. 우리를 홀대하는 게 아니었어."
"예, 아예 안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수성이 집중할 생각인 듯합니다."
이곳 경비대는 확실히 도움이 되는 병력이었다. 내가 그리 판단할 정도니까, 영주 입장에선 얼마나 든든할까.
수성전에 바로 끌고 간 거다.
나는 레인져를 찾았다. 근처에 있던 녀석의 어깨를 잡는다.
"아직도 추가정찰은 없고?"
"그..... 전서구를 받긴 했습니다."
"어때?"
레인져는 머뭇거렸다. 답답해서 호통을 치려는데, 녀석이 눈을 질끈 감으며 외친다.
"파, 팔천입니다! 예측 범위의 최대치였습니다....."
"팔천?"
정신이 아득하다. 솔직히 비주류 종족이 구성원이라길래, 내심 숫자는 적겠거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8천.....?
"말이 안 되잖아! 타조족이랑 적마족으로 어떻게 팔천이야!"
"아..... 선발대가 일부만 본 것 같습니다. 다른 비주류인 호족(豪族), 엽표족(猎豹族), 랑족(狼族)까지 나선 모양입니다...."
"뭐? 호족.....?"
다른 종족은 그냥 넘겼다. 뭐 엽표족은 드럽게 빠른 대신에 지구력이 안 좋다던가, 랑족은 육각형이 작은 만능이라던가 하는 특징이 있지만,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다.
호족. 호랑이 수인이다.
숫자는 확실히 적어도 하나하나가 강인하기 그지없는 놈들. 보통은 산맥에 틀어박혀서 지들끼리 붙어먹는 게 일상인데, 이번 원정에 나선 것이다.
호족이 나섰다는 건..... 상대를 오합지졸로 볼수 없다는 뜻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수인종 연합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거기까지는 레인져의 영역이 아니라, 첩자가 할 일이라서......"
"후우,"
맞는 말인데 존나 답답하다.
짜증에 가득한 한숨을 내쉬는데, 이번엔 감시탑 부근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땡땡땡ㅡ땡땡땡ㅡ!
“습격이다!! 적습이다!!”
적습.....? 제국과 인접한 땅인데 어떻게?
의문을 가득 담아서 주위를 돌려보는 순간, 레인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마, 마지막으로 팔천 중에서 일부는 산맥을 빙 둘러서 진군한다고......”
“씨발! 그걸 지금 말하면 어떡해!”
마을의 주변은 황무지. 시야가 넓다.
나는 황급히 달려가서 대체 어떤 놈들이 습격하는지확인했다.
두두두두ㅡ
땅이 뒤흔들리는 소리. 흙먼지 사이로 얼핏 보이는 노란색 거죽과 검은 줄무늬. 멀리서 봐도 대단한 덩치.
잔뜩 부풀어 오른 근육.
“하필 호족이야.....?”
수인종 연합의 최강, 호족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