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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더피 백작 (87/111)



〈 87화 〉더피 백작

수인종 연합은 말 그대로 연합이었다.
하나로 통일된 곳이 아니라, 여러수인 국가가 힘을 모은 곳.
물론 거기서도 주류는 있었는데, 일단 가장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견족(犬族)이다.

'무난한 육체파에 강아지 닮은 얼굴이지. 큰 특징이 없어.'

뭐 생활 습관이나풍습 따위는 당연히 다르겠지만, 지금은 전쟁이다. 전투력만 따지자면 견족은 수인종 중에서 극히 평범했다. 도리어 평균보다 조금 처지는 정도.

그다음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건 묘족(猫族). 고양이 수인으로 팔방미인이다.
마법, 주술, 무투 따위에 다양하고도 조금 애매한 재능을 가진 이들. 그래도 재능이 많은 덕에 평균치는 확실히 넘는 전투력이었다.

이 두 종족이 수인종 연합 인구의 70%를 차지한다. 나는 이번 전쟁도 그들이 나선 것이리라 생각했다.
앞장서는 레인져를 향해 묻는다.

"견족이야, 묘족이야?"
"예?"
"정찰했으니까, 봤을 거 아니야. 어느 종족이 주류지?"
"아..... 둘 다 아닙니다."

둘 다 아니라고? 견족이랑 묘족을 빼면 나머지 잡다한 수인을 모아봐야 전체의 30%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느 한 종족에서 사활을 걸었다는 이야기인데.....

레인져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타조족(駝鳥族)과 적마족(赤馬族)이 주된 구성원입니다. 견족이나 묘족은 오히려 구색만 맞춘 정도입니다."
"적어도 3천이라고 했잖아. 두 종족으로 군대 3천이 나올 수 있나? 인구는 3천을 넘는다고 쳐도, 싸울 수 있는 인원이 돼?"

고개를 갸웃거리는 레인져.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어쩌면 종족의 젊은이를 마구잡이로 끌고 왔을지도 모릅니다."
"허어......."

외부에 알려진 수인종 연합의 인구는 200-250만이었다. 여기서 원정군 수천이라고 해도 적지 않은 출혈일 텐데, 비주류 종족 따위가 천 단위라니......

"이상하군. 정상은 아니야."
"예. 확실히 그렇습니다."

비정상. 그런데 내게 반가운 비정상이었다.

'왜냐면 숫자만 많을 확률이 높잖아? 그 녀석들이 전부 군사훈련을 받았을 리가 없어.'

오합지졸일 확률이 높다. 물론 수인종이니 만큼, 싸움 자체는 할  있을 것이다. 뭣보다 사냥을 업으로 삼는 놈들이니까.
하지만 전쟁은? 사냥과는 차원이 다르다. 싸움 좀 한다고 전쟁이 가능하면 뒷골목 양아치=병사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나는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어쩌면...... 방어전이 아닐 수도 있겠다.

"추가적인 정찰은 언제쯤 가능하지?"
"계속 시도하는 중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수인종 놈들이 워낙 감각이 좋고 빨라서......"
"힘들다?"
"한 번 실패하고, 다시 보냈습니다. 가장 오래된 선배님들이 갔으니 성공하실 겁니다."

아직 며칠은  기다려야 된다는 거다. 제국의 레인져. 그것도 국경에 배치된 녀석들이니, 상대의 훈련 상태도 파악할  있을 거다.

"좋아. 우리도 서두르는 편이 좋겠군."
"예!!"

부지런히 발걸음을 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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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슬슬 더피 백작가의 영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방어전을 펼친다면 긴밀하게 협력할 곳이다.

레인져에게 부탁해서 이곳의 지도를 받았는데, 영지가 정말......

"쓰레기군."
"예? 제국의 땅을......"
"아니, 그냥 우리 가문이랑 비교해본 거야."

나는 에델에게도 지도를 보여줬다. 내 의견에 동조하는 그녀.

"확실히 별로입니다. 황무지와 산, 몬스터가 나오는 곳이 대부분이군요. 이런 땅으로 제국 서열 50등에 든 게 신기합니다."
"맞는 말이야. 어쩌면 능력 있는 귀족일 수도 있겠어."

능력이란 순전히 서열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아주 훌륭한 영지를 가지고 40위를 기록한 영주와, 쓰레기 같은 영지로 50위에 올라선 영주.
둘 중의 하나와 협력하라면 당연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더피 백작가의 영지는 넓긴 해도, 그만큼 시궁창이었다.
실제로 영지의 경계를 넘었음에도 아직 마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저 황무지가 넓게 펼쳐졌을 뿐이다.

"이봐, 여기는 대체 뭐에 쓰려고 있는 땅이야?"
"아...... 습격을 빨리 알아채려고 비워둔 땅입니다."
"응?"

레인져는 자신도 조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설명을 시작했다.

"험준한 지형보다 평탄한 지형에서 시야가 더 넓지 않습니까?"
"그렇지. 평지에서는  멀리 보긴 해."
"예. 그 점을 노려서 넓은 황무지를 비운 것입니다. 습격을 당해도 황무지를 보고 재빨리 알아채기 위해서요."
"아. 그거야?"

얼핏 들으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어이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여기 국경 아니잖아?"
".....예."
"아니, 국경 쪽 영지는 따로 있고, 여기는 제국 내부랑 인접한 영지인데  습격 방지?"

제국한테 공격받을 거다. 이 말인가?
내가 황당해하자, 레인져는 우물쭈물했다.

"영주에게 그렇게 설명을 들었을 뿐입니다. 저희는 결국 군인인지라 결정권이 없습니다."
"하기야......"

영지를 어떻게 운영할지는 영주의 마음이지, 황제라고 해도 크게 간섭할 수는 없었다. 그냥 영주가 세금만 제대로 내면 신경 쓰지 않는  도리다.

'암만 그래도 땅이 아깝다..... 황무지도 잘 개간하면 쓸 수 있을 텐데.'

혹시 인구가 적어서 그런가? 사람이 적으면 땅이 있어도 쓸 수가 없다. 나는 애써 납득하려고 하며 길을 걸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을  가자, 저 멀리에 우뚝 솟은 건축물이 보인다.

"앨리스경, 저거 보이지?"
"예. 아마도 감시 용도 같습니다."
"저기는 도시도 아니잖아. 기껏해야 큰 마을 같은데?"

큼직한 마을에 우뚝 솟은 감시탑. 방비한다는 뜻은 좋은데, 제국과 인접한 땅이라 아무리 봐도 낭비 같았다.

"혹시 안전에 대한 강박증 같은 게 있나? 더피 백작이 대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네......"
"꽤 젊은 분입니다."

레인져의 대답. 고개를 끄덕이려 하는데, 뒷말이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또 드물게 여자로 가문을 이어받았습니다."
"응? 문관이야?"
"아닙니다."

여자로 가문을 승계. 게다가 문관도 아니다.
대체 어떤 인물이지? 나는 앨리스를 슬쩍 봤다.
그녀가 어지간한 귀족 가문 영애였다면, 가문을 이어받고도 남을 것이다. 더피 백작이 그런 인물인가?

갈수록 궁금증이 커진다. 나는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얼른 가자. 일단 마을 백성들 얼굴이나 확인하자고. 꼴이 좋은지 어떤지 말이야."
"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병사들을 조금 더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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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피 백작령에서 처음 본 마을의 반응은 꽤 의외였다.
나는 기껏해야 촌장쯤이 나와서 나를 반길 거라 생각했는데, 경비대가 튀어나온 것이다.
꽤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바짝 긴장해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구스 마을 경비대장, 오트라고 합니다!"
"어, 반갑다."

'자경단도 아니고 경비대? 이름만 그럴듯하게 지었나?'

경비대장과 경비대의 복장을 살폈다. 만약 자경단 수준이라면 평복에 무기나 한둘 차고 있을 거다. 그런데 이놈들은 아니었다. 일단 가죽갑옷을 기본으로 입었고, 완갑이나 투구 따위도 있다.
조금 엉성하긴 해도, 자경단과는 무장부터 다른 것이다.
나는 실력을 가늠해봤다.

'군기가 바짝 들었어. 내 앞이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이런 태도면 전투에서 도망치지는 않겠군.'

오합지졸이 아니라, 도움이 되는 병력이라는 뜻. 실력을 떠나서 대가리만 채우는 녀석들은 아니었다.

"더피 공이..... 꽤 방비에 열심인 모양이군."
"예!! 저희 영주님은 누구보다도 영지민의 안전에 신경 쓰십니다!"
"강박증......"
"예?"
"아니다. 일단 잘 곳이나 안내해라."

바짝 대답하며 앞장서는 경비대장. 내가 이끄는 병사는 거진 1200에 달한다. 이들이 전부 민가에서 잘 수는 없으니, 적당히 마을의 공터에 천막을 펼쳤다.
한창 작업하는 와중에 경비대장이 슬쩍 다가온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해."
"영주님께서 지휘관님은 따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마을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 있습니다!"
"흐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똑같이 천막이라고 표현하기는 해도, 지금 임시로 세우는 천막은 아주 부실했다.
들고 다녀야 하니까 진짜로 최소한의 기능만 챙긴 것이다.

'솔직히 여관이 훨씬 편하기는 할 거야.'

그런데 내가 따로 자면 병사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을까? 고생  덜하겠다고 사기를 떨어뜨리는  바보짓이었다.
그리 고민하던 때, 이야기를 엿들은 병사 몇몇이 크게 외친다.

“천인장님은 편한 곳에서 주무십시오!!”
“맞습니다!! 고운 얼굴만큼이나 편하게 자야 합니다!!”
“천인장님의 피부를 위해!”
“피부를 위해!!”

갑자기 난리 난 병사들. 역시 성욕으로 돌아가는 부대는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하기야 내가 거친 생활을 해서 외모가 망가지는 것보다 편하게 자는 게 낫겠지.... 병사들한테도.’

나는 경비대장을 보며 끄덕였다.

“좋아. 나 혼자는  그렇고, 몇 명만 같이 데려가겠다.”
“알겠습니다.”

앨리스에게 제안했더니 거절했다.

“도련님까지는 괜찮아도, 저는 병사들 옆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말을 들을 겁니다.”
“알았어.”

결국 데려온 건 에델과 한나 누나였다. 우리를 마을 구석의 큼직한 여관으로 안내하는 경비대장.

“이쪽으로 오십시오.”
“좋아.”

내가 말없이 걸어가는데, 갑자기 한나 누나가 몸을 가까이 붙인다.
여관이 코앞인 상태였다.
나에게만 들리게 속삭이는 누나.

“알고 있지?”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너무 뻔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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