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5화 〉진.짜.영.웅 (85/111)



〈 85화 〉진.짜.영.웅

협상은 결국 용병 중대 하나와 레인져 일부를 지원받는 거로 끝났다.

‘아니, 사실 레인져를 지원받는다는 표현이 맞나? 걔들 원래 거기서 정찰하는 게 임무잖아.’

상주하는 수색병을 지원군이랍시고 받는 게 적잖이 황당했지만, 뭐 별수도 없다.
넬독이 전선의 불안정함을 역설했기 때문이다.

“오크 씨족이 전선을 돌아서 쳐들어올 정도네! 당장 전선에 지원 병력을 보내도 모자랄 판에, 천인대 이상을 빼내는 건 힘들어.”
“하아...... 중앙의 귀족은요?”
“요청은 보냈지만, 금방 올 리가 없지. 일단은 자네가 잘 막아주게나.”

이런 진행이었다.
내가 파병되는 게 결정되자, 나머지 안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금방 회의가 끝났다.
회의가 파한 후, 넬독은 나를 따로 불러냈다.


넬독의 집무실.
고용인이나 노예 따위도 전부 나간 이 공간에는 나와 넬독, 그리고 나를 도울 제이카 누나가 있었다.

넬독은 제이카 누나에겐 크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달랜다.

“자네도 알겠지만, 수인종 연합의 발호를 막는  어디까지나 방어전이네.”
“그렇겠죠. 이런 일이 생기면 7군단에서 으레 나서지 않습니까?”

제 7군단. 총 1만 2천 명으로 구성된 일종의 예비대이자 정예 군단이었다.
일반적인 군단이 평상시에 국경 부근에 배치되어 전쟁을 대비하는 것에 비해, 7군단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거지.’

평소에는 특별히 임무도 없다. 그러니 항상 훈련에 매진했고, 실전경험은 조금 부족해도 병사의실력은 출중하다고 들었다.
오크 제국과의 전쟁에도 일부가 동원된 상태고.

넬독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7군단이 나설 때까지만기다리면 될 걸세. 평상시라면 말이야.”
“......?”

그럼 지금은 평상시가 아닌가? 오크 제국과 전쟁 중이긴 해도 국가가 휘청거릴 수준은 아니다.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옆에 있던 제이카 누나가 나섰다.

“단장님께서 이번 사건으로 대노하셨다.”
“단장이면..... 제5황자 전하?”
“그래. 제1황자의 짓으로 새로 편성한 군단이 박살 나지 않았냐. 네가 그나마 수습하기는 했다만.”

맞는 말이었다. 솔직히 2만 4천에 이르던 우리 군단은 개박살이 나서 1만 중반대까지 숫자가 줄었다.
쳐들어온 오크를 전멸시키긴 했어도......

‘걔네들은 어차피 버리는 병력이었다는 거지. 황제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세력.’

도리어 오크 제국 쪽에서는 황제의 지배력이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거다.
오크의 기습을 허용한 건, 아마도 제1황자의 계략 때문. 사실상 매국과 다를  없었다.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네.”
“음? 방금 건 아주 정치적인 발언이  수 있다.”
“아니, 뭐......”

그렇게 해석되도 별로 상관은 없었다. 내가 생각 없이 살긴 해도, 매국은 존나 싫어하기 때문이다.

‘나라 팔아먹는 게 좋은 꼴은 아니잖아? 차라리 무능한 게 낫지.’

내가  반박을 안 하자, 넬독과 제이카 누나의 눈에이채가 서린다.

“호오, 자네는 완전히 위치를 정한 건가?”
“그런 적 없습니다. 단지 이번 수인종 연합을 잘 막아낼 생각뿐이죠.”

일단은 할 일에 집중한다. 그런 대답을 내놓자, 넬독도 수긍했다.

"알겠네. 그럼 7군단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해했겠군."

아니요. 존나 뜬근 없는데요? 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납득했다.

"이것도 제1황자의 방해입니까?"
"쉿, 전부 내보내기는 했어도 항상 말조심해야지."
"흠...... 수인종 연합이 암만 제국에 비해 작아도, 7군단이 나서지 않으면 많이 곤란한데요."

물론 1~6군단까지 제국의 병력은 많았다. 게다가 황제에게 충성하는 변경백도 있고, 중소 귀족 중에도 황제파는 있다.
하지만 변경백이나 다른 군단이나 전부 역할이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1군단은 수도 상비군이라 뺄 수도 없고, 2군단이랑 3군단은 애초에 오크 제국이랑 전쟁 중이고...... 4군단은 해군이라 쓸모도 없고. 6군단은 신성 왕국을 대비하고, 5군단은 말할 것도 없지.'

이런 마당에 예비대가 출동하지 않으면 뭐로 막으라는 건가. 나는 넬독을 노려봤다.

"7군단이 출동하지 않으니, 격퇴는 힘들겠군요. 그러면 아예 장기전으로 가서 방어만 하라는 겁니까?"
"일단은..... 그렇네. 최대한 오래 버티게. 상대는 원정군이니 결국 한계에 봉착할 걸세."
"하아."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명실상부 대륙 최강인 제국이 뭣하러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어디 공작가에서 나서주기만 해도 좋을 텐데.

'그럴 리가 없지. 다들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고 혈안이 된 마당에 말이야.'

만약에 본래 영지가 망해서 새로이 땅을 차지할 수 있다면, 그때나 나설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을 거고.

나는 툴툴거리며 말했다.

"예상보다도 훨씬 어려운 임무군요."
"그래서 그리폰 용병단이 있지 않나. 제5황자가 특별히 신경  걸세."
"거 150명 넣어주고는 생색은......"

명색이 황자 아닌가. 그러면 통 크게 수천씩 넣어줄 법도한데......
내 말에 제이카 누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단장님도 여기저기 일을 벌이느라 바쁘시다. 전선에 대한 지원은 이게 한계다."
"나머지는 수도에? 아니면 황국에서 활약하시나?"
"기밀이다."

그리 말한 제이카 누나는 짐짓 표정을 굳혔다.

"그리고 저번 전투에서 그리폰 용병단은 거의 전멸하지 않았냐?"
"워, 워낙 치열한 전투라......"
"네 천인대는 7할이 생존했는데 말이지?"
"크흠......"

 부분은 할 말이 없었다. 친분이 적은 용병단을 희생시켜 피해를 줄인 건 명백했기 때문이다.
제이카 누나는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이끄는 녀석들은 전부 죽음을 각오하고온 거다. 숫자가 적다고 불평하거나, 무시하지 말았으면 한다."
"아, 알았어..."
"네 명령은 설령 일부 불합리한 부분이 있더라도 따를 테니 걱정하지 마라."
"......"

저번처럼 화살받이로 써도 이해하겠다는 의미였다. 대체 뭐가 저런 충성심을 만들었을까.
나는 제이카 누나의 결심 앞에 입을 뗄 수 없었다.

"먼저 가서 준비하마. 곧 같이 싸울 텐데, 서로 얼굴은익혀야지."
"...응."

터벅터벅 나가는 제이카 누나. 지켜보던 넬독은 가볍게 웃었다.

"껄껄, 든든한 동료를 얻은  같은데 말일세.."
"지원도 별로  하면서 사지에 떠밀고는 그딴 얼굴 하지 마십시오."
"......"

나도 누나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병력이 부족하다는 상황, 제1황자의방해, 이 모든 건 이해하지만 결국 목숨을 거는 사람은 나와 부하들이다.

'편하게 앉아 있는 총사령관 따위가 개입할 여지는 없어.'

천막을 나가기 전, 한 마디를 툭 뱉었다.

"혹시라도 내가 수인종 연합을 퇴치하면 어쩔 겁니까?"
"내가 뭘 어쩌겠나. 그 순간, 자네는 영웅이 되어 있을 텐데."
"영웅이라......"

나 같은 놈한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다.
씁쓸하게 웃으면서 부하들에게 돌아갔다.


---------


차출 소식을 들은 부하들의 반응은 제각기였다.
우선 병사들은.

"천인장님을 믿습니다아아!!"
"제스 홀란트! 제스 홀란트!"
"천인장! 천인장! 천인장!!"

따위로 맹신했고, 기사급은 조금 달랐다. 이들은 그래도 국가 정세와 제국에 대해 조금 알았다.

"으음, 천인대 하나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괜찮은 겁니까?"

물론 말 몇 마디로 설득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곳의 귀족과 합쳐서 방어전을 치른다고 하자 안심하는 기사들.

"역시!! 저는 천인장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천인장님의 몸은 제가 지킵니다!"

이렇게 금세 태세를 전환했다. 마지막으로 에델과 앨리스였다.
에델은 살짝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제가 활약해야겠군요. 움직임이 날쌘 고위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드리겠습니다."
"기대할게."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평범한 반응이었는데, 앨리스는 사뭇 달랐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빛을 빛냈다.

"불리한 싸움이군요."
"어차피 방어......"
"대 홀란트 가문이 맞기만 하는  어불성설입니다."

앨리스는  어깨를 슬쩍 밀어서 나를 침대 쪽으로 붙였다.

"도련님......"
"응?"
"합체하시죠. 다시 강해질 시간입니다."

하, 합체?
머리가 핑글핑글 돈다. 무한 사정교환의 기억이 뇌리를 맴돌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