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제국의 보물 제스 홀란트!(10)
늙은 오크를 사로잡은 다음은 꽤 순조로웠다.
우리가 녀석을 잡고 소리칠 때마다 오크들이 동요했던 것이다.
"다들 물러서!! 무기 버리고 꺼지라고!!"
"어어....."
참고로 늙은 오크는 입안에 무기가 쑤셔박힌 상태라서 뭐라 말을 못 했다.
'말을 할 수 있으면 안 되지. 인질인데.'
이미 내 천인대와 싸우던 오크들은 주춤거리면서 멀찍이 떨어진 상황. 전쟁터인데도 평화가 흘렀다.
내 천인대와 마법사를 지키러 온 지원군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당장은 좋아했다.
늙은 오크의 배를 방패로 후려치며 외친다.
"자자, 빨리 길을 뚫어라!!"
"아, 안 된다. 어머니께서 그걸 원하실 리는....."
난 앨리스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앨리스가 번개같이 칼을 뽑아 늙은 오크를 베어낸다.
촤아아! 피가 터지자 그제야 오크 병사들은 재깍 물러났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밀집한 병사들 사이로 길이 뚫린다.
"더더 크게 비켜!! 이렇게 작은 길을 어떻게 통과하라는 거냐!"
"크으으, 어머니....."
"빨리 꺼지라고!!"
사람 두셋이 지나갈 법한 통로가 몇 배로 늘어난다. 졸지에 군대가 행군하는 너비가 되었다.
난 말 탄 녀석 중 하나를 골라 명령했다.
"너! 가서 지금 무슨 상황인지 전해라."
"예? 저도 모르는데요?"
"아씨....."
하여간 아는 거 없는 새끼들. 그때 히폴리타가 뭔가를 적은 종이를 병사에게 건넸다.
"이걸 전하면 돼. 천인대장의 전서라고 하면 총사령관님한테 바로 전해질 거야."
"예!!"
말을 탄 녀석이 박차를 가한다. 급하게 달려가는 말을 보며 생각했다.
'진짜 다 죽을 뻔했는데, 다행이야. 내 부하들 중에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이번 작전은 절대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피곤하다.
전투가 끝났다는 생각 때문일까, 포션을 과용한 탓일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마 가장 치명적인 건 늙은 오크에게 맞은 충격일 거다.
"힘들어...... 너무 힘들어."
늙은 오크는 인질로 잡혔고, 다른 부하들은 한숨 돌리는 가운데..... 나는 서서히 쓰러졌다.
지평선이 수평에서 사선으로, 사선에서 수직으로 보인다.
털썩. 코에서 뜨뜻한 것이 흘러나온다. 맛보니까 피맛이었다.
"천인장님? 천인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부하들의 걱정을 뒤로하며,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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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신을 차린 건 무려 이틀이나 지난 후였다. 눈을 뜨기도 전에 내 감각을 자극하는 게 있었다.
"으... 음, 이게 뭐야!!"
코끝을 찌르는 메케한 냄새. 황급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벗어난다. 방금 일어나서 그런지, 몸이 휘청이는 걸 겨우겨우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천막을 벗어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거대한 불길이었다.
화르르르ㅡ
잔뜩 이글거리는 화염. 뭐든 집어삼킬 기세인 그것이 태우는 건..... 시체였다.
수많은 인간의 시체. 산더미처럼 쌓아서 한 번에 태운다. 메캐한 냄새는 화장의 결과물이었다.
'대체 몇 구나 되는 거지? 지금 보이는 것만 이천? 삼천?'
멍하니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다가온다.
진중한 얼굴의 꽤 늙은 사내. 총사령관 넬독이었다.
"수고했네."
"......어떻게 됐습니까?"
"부하들에게 못 들었나?"
"방금 일어나서요."
넬독은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사리 입을 연다.
"패전은..... 아니네."
"저렇게 많이 죽었는데말입니까?"
"상대의 피해도 그에 못지않았으니까 말이네."
넬독은 천천히 설명했다.
우리가 인질을 잡았을 때, 본대는 치열하게 분투 중이었다. 비록 단합력은 없어도 실력은 있으니 어떻게든 싸웠던 것이다.
그러다가 병사 하나가 가져온 소식이 바로 씨족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았다는 것.
넬독은 처음엔 믿지 않았다고 한다.
"말이 안 되니까 말이네. 호위도 보통이 아니고, 애초에 씨족의 어머니가 몇 대 맞는다고 걱정하는 오크는 없어."
씨족의 어머니는 강력하다. 특히나 맷집에서는 더욱더 그랬고.
오크들은 씨족의 어머니가 칼을 맞아도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히폴리타는 인질극이 통할 거라고 했는데요?"
"인질극을 할 수 있다면 통하겠지. 한나 홀란트처럼 괴물 같은 파괴력이 있다는 가정하에 말이야."
"흐으음."
넬독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기절할뻔했다고 한다. 고작해야 고위 마법사에게도 희망을 품었는데,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졌으니 말이다.
넬독은 정말 최대한으로 이용했다고 말했다.
"오크들을 물러서게 만드는 건 물론이고, 무기까지 버리게 했지. 무장해제를 시킨 다음에는 오히려 우리가 공격했어."
"조금 치사한데요?"
넬독은 씁쓸하게 웃었다.
"지휘관은 냉정해야 하네. 적군과의 약속은 휴짓조각만도 못한 거지. 내 부하들을 지키고, 그들의 신뢰를 살 수만 있으면 돼."
"그래요?"
"후후, 그래서 나름대로 큰 타격을 입혔네. 자네 참모, 히폴리타도 괜찮게 활약했지."
"뭐 녀석이야......"
항상 제 역할을 하는 친구다. 유리한 상태에서라면 더더욱 능력이 두드러졌을 거다.
'궁병을 저격하러 간 것도 히폴리타, 비장의 수를 준비한 것도 히폴리타, 씨족의 어머니를 사로잡는다는 계획을 세운 것도 녀석이지.'
늘 여유로운 모습. 물론 속마음이야 애가 탔을 거다. 하지만 아군의 두뇌가 흔들리면 손발은 훨씬 더 떨리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잘 알았다.
넬독은 타오르는 시체를 가리켰다.
"1연대의 시신이네."
"어.... 전멸입니까?"
"거의 전멸이지. 다른 연대의 시신은 내일 태울 예정이야."
"반은 넘게 살아남았습니까?"
넬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이야. 오크 녀석들 입장에서도 1만 8천의 병력이 증발한 건 큰 타격이었을 거고."
우리의 반격과 반프레 시의 지원군, 다른 군단의 도움에 힘입어 소탕할 수 있었다고 한다. 뭐 열심히 도망친 놈들이야 살았겠지만, 큰 의미는 없다.
넬독은 허공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아남은 녀석들은 더욱 정예가 되겠지."
"단합력도 저절로 생겼을 겁니다."
"크큭, 단합력의 대가치고는 너무 큰 것 아닌가?"
넬독은 순전히 제국 군인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었는데,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와..... 이거 귀족 자제들 어떡하냐? 진짜 가문 돌아가서 제대로 깨지겠네.'
전멸한 연대도 있고,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연대도 있다. 수많은 가문의 사병이 증발한 것이다.
빈털터리가 됐으니, 이제 돌아가야 할 텐데 사병을 전부 잃고 복귀한다면?
'뭐, 좀 예쁜 자식이었으면 혼나는 수준일 거고, 무능력하고 병신같은 자식이면 쫓겨나겠지.'
아마 수많은 귀족 방랑자가 양산되리라.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좋았다.
백성들 고혈 빨아먹는 놈들이 줄어드는 거니까.
물론 나도 가문의 피를쪽쪽 빨아먹던 자식이긴 했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내 부하들은어떻게 됐어요?"
"아..... 제스 천인대 말인가?"
제스 천인대? 아주 낯간지러운 이름이었다. 뭣보다 내가 아니라, 총사령관의 입에서 들으니까 더욱 그랬다.
"그냥 독립천인대...."
"제스 천인대라고 부르지. 우리는 그렇게 합의했네."
"왜.....?"
"자네의 활약을 보면 알아. 자네의 천인대가 없었다면 우리는 반프레 시까지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네."
총사령관이 이렇게까지 칭찬하니까 기분이 좋기는 했다. 그는 이어서 내 제스 기사단은 별로 다치지 않았다고 전했다.
"신기하더군. 자네의 천인대에서도 피해는 컸어. 3할도 넘는 병력이 죽었지. 그런데 제스 기사단? 그리 불리던 친구들은 살아남았더군."
"어....."
"허허, 비결 좀 알려주게나."
존나 잘생겨진 다음에 몸으로 유혹하십시오. 이렇게 말할 순 없었다.
나는 그저 웃어넘기며 대화를 끝내려 했다.
"뭐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부하들 챙기러...."
"잠깐. 말이 끝나지 않았네."
"......?"
넬독은 씩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자네에게 훈장이 갈 걸세."
"훈장이요.....?"
여자나 주지. 넬독은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한 개도 아니고 꽤 많을 걸세. 자네는 제스 홀란트 아닌가?"
"망나니....."
"제국의보물, 제스 홀란트!! 참으로 수고했네."
전쟁에 참여한 후로, 점점 이상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