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제국의 보물 제스 홀란트!(9)
"괘하하....(괜찮아.....)"
나는 축 늘어진 채로 중얼거렸다.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손가락을 꼬물거려서 포션을 찾는 것 정도다.
검을 다잡는 앨리스.
"해치우겠습니다."
"아, 아 해..... 이지....(안 돼, 인질!!)"
"깜박했습니다."
살기를 살짝 없애는 앨리스. 하지만 투기는 여전했다. 늙은 오크는 비뚜름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자식을 죽이고 왔느냐?"
"......"
"어디 건방진 년의 실력을 좀 보자꾸나."
늙은 오크가 주먹을 휘두른다. 앨리스는 가볍게 피하고는 멀찍이서 검을 휘둘렀다.
피싯. 늙은 오크의 옷이 잘리고 생채기가 난다. 충분한 상처는 아니었다.
'검기에 베이고도 고작 생채기?'
물론 앨리스의 전력은 아닐 거다. 그래도 너무 압도적인 탱킹이었다. 끌끌거리는 늙은 오크.
"끌끌, 네깟놈들에게 일일이 다쳤다가는 어머니 노릇을 못 한단 말이지."
"단단한 돼지군요."
늙은 오크의 왼쪽에 있던 앨리스가 다음 순간 오른쪽에서 보였다. 이어서 늙은 오크의 전신에서 피가 튄다.
촤아아아ㅡ!
"이건 어떻습니까?"
아까와 같은 생채기지만, 이번엔 수십 개가 생겼다. 마치 커터칼로 난도질당한 듯 피가 주륵주륵 흘러나온다.
늙은 오크는 여전히 웃었다.
"의미 없다. 힘 한 번 주면 끝이다."
흡하는 기합 소리와 함께 출혈이 멎는다. 난 순간 소름이 돋았다.
'힘줘서 출혈을 막아? 피콜로야 뭐야......'
검기로도 생채기가 고작이고, 어지간한 상처는 통하지도 않는 괴물.
씨족의 어머니란 그런 존재였다.
나는 둘을 보며 승산을 점쳤다.
'그래도 승기는 앨리스 쪽에 있지 않을까? 뭣보다 늙은 오크는 피를 조금이라도 흘리고, 앨리스는 멀쩡하잖아?'
설마 늙은오크의 출혈보다 앨리스의 체력이 먼저 닳을까. 그것만 아니라면 앨리스가 이기는 거였다. 야금야금 갉아먹는 건 확실했으니.
그리 생각할 때였다. 늙은 오크에게 계속 공격을 가하던 앨리스에게 검이 하나 날아온다.
앨리스는가볍게 피했는데, 중요한 건 외부에서 개입했다는 거였다.
"누구냐!!"
그새 포션으로 좀 회복한 내가 외쳤다. 그러자 어느 오크의 외침이 들린다.
"꾸오오오!! 어머니를 건드리지 마라!!"
"아..... 맞다. 우리 포위당했었지."
하여간 이놈의 빡대가리. 장기전으로 가서 우리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지금 버텨주는 병사들이 사라지면 그냥 죽는 거다.
"앨리스!! 단기 결전으로 가야 해!!"
"알겠습니다."
앨리스의 목소리가 무겁다. 유리한 건 갉아먹는 작전인데, 상황은 단기 결전을 바라고 있었다.
더욱 힘차게 몰아치는 앨리스.
그녀는 동시에 네 방향에서 보였다. 네 명의 앨리스가 늙은 오크의 목을 노린다.
늙은 오크는 그에 대항해 간단히 팔을 들었다. 목을 대신해서 난도질당하는 굵디굵은 팔.
촤아아악. 소리는 호쾌해도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살점을 조금 떼어냈을 뿐이다.
"끌끌, 화려하기는 한데 결국 이기는 건 본녀겠구나. 내 아이들을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
앨리스는, 조금 고전하고 있었다.
'제길!! 분명 앨리스보다 약해. 그런데도 주변 상황 때문에.....'
뒷받침하는 병력이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치명적일 줄은 몰랐다. 꿀꺽꿀꺽. 부지런히 포션을 삼켜도 몸의 회복이 더뎠다.
오늘만 이미 몇 번을 마셨던 포션이다. 연속해서 먹으면 회복이 느려졌다.
앨리스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해보겠습니다."
뭘? 이라고 묻기도 전에 앨리스는 행동에 들어갔다. 칼날에서 이글거리던 검기가 손잡이를 타고 넘어 갑옷까지 침범한다.
앨리스의 전신 갑주가 끝없이 붉게 타올랐다.
'오.... 멋진데?'
변신이라도 한 느낌. 앨리스는 그 상태에서 늙은 오크에게 달려들었다.
파앗-. 아까처럼 치고 빠지는 게 아니다. 가까이 붙어서 끊임없이 연타했다.
검으로 베고, 기세를 살려 발을 날린다. 그대로 돌면서 다시 검격. 앨리스의 연격은 도무지 끊이질 않았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탓에 더 위력적으로 보인다.
뻐어엉- 뻥! 그녀의 주먹이나 발차기가 닿을 때마다 북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따라 늙은 오크도 조금 휘청거렸다.
"이..... 가벼운 년이!!"
늙은 오크는 마구잡이로 손을 휘둘렀지만, 당연히 앨리스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애초에 기술과 속도에선 완연히 밀렸고그냥 탱킹이 사기였던 놈이다.
'나랑 비슷하네? 쟤한테는 방패가 없지만.'
나도 고수와 싸우면 저 늙은 오크의 꼴이 되는 건가? 조금 소름 끼치긴 했다.
뻐어억! 뻐억! 계속해서 얻어맞는 늙은 오크.
앨리스의 검이 닿을 때는 살갗이 갈라졌고, 발이 닿을 땐 살이 출렁거렸다. 솔직히 저 비계는 진짜 사기다.
'비계로 충격흡수.... 너무 좋잖아?'
외관을 포기하고 얻은 이점이리라. 앨리스의 미완성 기술 덕분에 전투 양상은 꽤 빨라졌다.
이대로면 괜찮겠다고 생각하는데, 예고도 없이 앨리스의 붉은 기운이사라졌다.
"응?"
"아......"
안타까운 탄식. 앨리스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러니까 놀라서 멈췄다는 뜻이 아니라, 기술의 반작용인 듯 굳은 거다.
안광을 폭발시키는 늙은 오크.
"쥐새끼 같은 년!!"
육중한 주먹이 앨리스를 올려 친다. 늙은 오크의 어퍼컷은 묵직한 동시에 깔끔했고, 앨리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콰드드득ㅡ
갑옷 구겨지는 소리. 그리고 앨리스의 신형이 위로 치솟았다. 장대높이뛰기를 한 것보다도 훨씬 높이 뜨는 앨리스.
잠시 허공에 정지한 그녀가 이내 떨어졌다.
"안 돼애애애!! 앨리스으으!!"
고작해봐야 뽀뽀밖에 못 했는데! 앨리스랑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미친 듯이 달려갔다. 몸이 삐그덕거리는데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저 앨리스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한 채로 몸을 날린다. 힘없이 추란하던 앨리스는 내 품속에 와락 떨어졌다.
쿵. 얼굴 가리개 사이로 피가 흘러나온다. 보나 마나 객혈과 토혈.
그녀가 이토록 연약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괘, 괜찮아? 앨리스!!"
".....션 좀"
"내가 막아줄게!! 앨리스, 너한테만 너무 맡겼어!!"
한참 오열하고 있는데, 앨리스의 말이 들린다.
"도련님, 포션 좀...."
"아."
맞다. 상처회복은 금방이지?
괜히 머쓱해서 거칠게 포션을 꺼냈다. 내가 먹을 때도 중급 포션 위주였는데, 앨리스한테는 최상급 포션을 통째로 줬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삼키는 앨리스. 그녀는 짧게 경고했다.
"방패 드십시오."
"응."
재빨리 뒤돌아 방패를 치켜든다. 콰아앙!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방패와 함께 훨훨 날아갔다.
대충 15m는 떨어진 곳에서 추락한다. 몸이 뻐근하긴 했는데, 보람은 있었다.
'후후, 앨리스 살렸다. 나중에 놀릴 때 써먹어야지.'
두 명이 다시 대치한다.
앨리스와 늙은 오크의 2차전.
둘이 다시 불꽃을 피울 때였다. 정말 느닷없이, 늙은 오크의 옆구리가 꿰뚫렸다.
푸우우욱ㅡ
두꺼운 몸통을 뚫고 나온 철창.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보통 힘이 담긴 게 아니다.
'아니.... 애초에 검기로 생채기만 냈는데, 투창으로 옆구리를 뚫어?'
대체 어떤 놈이? 라고 생각하자 주인공이 바로 등장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달려오는 한나 누나.
"이야아아!! 맛있는 돼지 요리 중이었어?"
"한나 홀란트....."
앨리스의 작은 신음. 질투가 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마냥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한나 누나는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 상성이 맞는 놈을 상대해야지! 몽둥이로 잡아야 할 놈에게 칼을 쓰면 되나?"
"끄아아아!!"
발작적으로 철창을 뽑는 늙은 오크. 옆구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녀석은 이미 지친 듯했다.
"이, 이..... 하찮은 것들이...."
"창을 친절하게도 뽑아주네?"
한나 누나는 늙은 오크가 버린 철창을 주워서 다시금 덤벼들었다.
늙은 오크, 씨족의 어머니 눈에는 어느새 좌절감이 엿보였다.
"내가, 씨족을 세운 내가 이런 것들에게!!"
"자의식이 너무 커!!"
한나 누나는 거칠게, 앨리스는 정교하게 녀석을 몰아붙였다.
특히 한나 누나의 공격이 큼직한 상처를 만들어낸다. 발작적으로 달려오는 다른 오크가 있었지만, 아군이 목숨걸고 막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후, 늙은 오크는끝끝내 무릎 꿇고 말았다.
"끄허어어....."
육중한 무릎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 앞에 선 건 앨리스와 한나 누나.
둘은 늙은 오크의 입에 무기를 쑤셔 넣고 외쳤다.
"모든 오크는 들어라!! 너희의 어머니가 여기 무릎 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