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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화 〉제5황자 (57/111)



〈 57화 〉제5황자

"화, 황자 저하!"

나는 당황해서 한쪽 무릎을 꿇으려했다. 물론 시늉만 했다.  5황자의 성향을  알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난 용병단 단장으로 온 거니까 편하게 있어."
"예."

역시나 5황자는 털털했다. 용병단을 만들었다는 사실부터 그걸 시사한다.
나는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무려 제국의 황자가 행차했는데, 무릎을 꿇는 사람은 없다. 대신에 상당히 조용한 모습.

따지자면...... 잘 벼려진 칼 같았다. 황자의  한마디면 무슨 명령이든 따를 기세. 난 어렴풋이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리폰 용병단과 친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포섭하기는 힘들겠구나.'

제 5황자는 확실하게 용병단을 장악했다. 내가 거기에 끼어들기는 어렵고, 막상 성공한다고 해도 거기에  노력이 너무 많을 것이다.
곧바로 용병단의 사용처가 결정되었다.

'기회가 되면 적당히 먹고..... 비교적 위험한 일을 맡기자.'

부대에서 죽는 사람은 생길 수밖에 없다. 이왕이면 내 사람을 더 아끼는  맞았다.
 5황자는 느긋하게 걸어오더니 내게 말했다.

"제스 홀란트인가?"
"예, 맞습니다."
"하멜 경의 아들. 역시 하멜경이 자식 농사는 기가 막히게 지었다니까."
"어...... 그런 듯합니다."
"여기는  아이들을 빌리러 온 건가?"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과연 5황자는 무슨 일로 왔을까.
모두가 주시하는 가운데, 그는 황금색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나는 말이야. 황위에 관심이 없어."
"......충분히 황제에 어울리십니다."
"내가? 크크큭."

낮은 웃음을 흘리는 황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첫째 형님이 가장 유력하지. 계승 서열 1순위잖아?"
"......예."
"둘째 형님은 어때? 서열은 조금 밀려도 능력은 더 좋아. 인품도 뛰어나서 아군이 많고."
"......"

갑자기 왜 이딴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새롭기라도 하면 그럭저럭 들어줄 텐데, 귀족이면 누구나 아는 소리라서 싱거웠다.
 5황자는 갑자기 손가락 5개를 펼쳤다.

"제 5황자는 어때? 서열도 5순위에 본인의 능력은 애매하게 좋아. 근데 성품은 너무 자유분방하지. 황제랑은 아주 멀다고."
"......"
"나는 말이야. 그래서 형님 중 하나를 골라야 해."

꿀꺽ㅡ

심상치 않다. 난 주위 반응부터 살폈다. 나처럼 놀란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한나 누나조차도.

'그리폰 용병단은 전부 알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정보가 빠른 귀족도 눈치챘겠어.'

쉬쉬하는 정보지만, 완전한 기밀은 아니다. 나는 제 5황자가 방금 뱉은 말의 의미를 곱씹었다.

'형님 중 하나를 고른다...... 즉, 황위 계승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소리잖아?'

제 5황자로 소소한 권력을 누리느니, 황제가 될 사람에게 올라타겠다는 의지. 난 잘못 걸렸다는 걸 깨달았다.

"화, 황자 저하. 저는 백작도 아니고, 일개 백작가의 삼남일 따름입니다. 방금 하신 말은 전부 잊을 테니......"
"무슨 소리야. 내가 말을 뱉었는데, 자네가 어떻게 잊겠어? 안 그런가?"

썩을 놈. 무조건 끌어들이겠다는 의지였다. 차라리 아버지였다면 대응이 달랐을 거다.

'십존급 강자는 제국에서도 대접받는 위치. 제 5황자 따위가 이렇게 나오지는 못했을 텐데.'

하지만 난 셋째 아들일 뿐이다. 대체 나를 끌어들여서 무슨 이득을 본다는 건지는 모르지만...... 설마?
기이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저하. 제가 지닌 힘은 코딱지 수준입니다."
"코딱지.....?"
"아, 그냥 작다는 비유입니다. 아무튼 아버지나 두 형제를 제외하고 제게 접근했다는 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혹시 나를 밀어줘서 홀란트 백작가의 가주로 만들려는 거냐. 이런 질문이었다.
내가 가주에 오르면 확실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제국에서 10위권에 위치한 가문의 힘도물론이고.

제 5황자는 농담을 들었다는  유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망상이 심한 친구네?"
"......?"
"형제들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하멜경이 정정하게 살아 있는데 어떻게 자네가 가주가 되겠어? 안 그래?"
"그렇긴 합니다......"

맞는 말이다. 형제들은 얄밉거나, 그냥 부럽다는 감정이지만 아버지는 존경스러웠다.
제 5황자는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복잡한  아니야. 제국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는 건 알겠지?"
"예, 황세자 저하가 온건파고 제 2황자 저하가 강경......"

이 새끼 제 2황자를 지지하나? 전쟁에서 이기면 결국 강경파가 유리해지니까?
제 5황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둘째 형님이 내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황제는 능력 있는 사람이 해야 하니까."
"그러면 제게 온 것은......"
"최대한 열심히 싸워서 공로를 세우라고.  그런 의미야."

맥이 탁 풀렸다. 열심히 싸우는 건, 굳이 이런 말이 없어도  거다.
나는 남은 그리폰 용병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분들도 빌려주실 겁니까?"
"원해?"
"예. 있다면 큰 도움이 될......"
"아쉽지만 안 돼."

씨발, 황자라고 장난하나.
조금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는데 겨우 참았다. 우리 가문이었으면 아버지 믿고 잔뜩 찌푸렸을 거다.

"내가 단장이긴 해도 애들 자율성은 존중해서 억지로 시키지 않아. 50명 중에서 40명을 데려갔으면 만족하라고."
"알겠습니다."

제 5황자는 나를 응시하다가 품에서 무언가를 슥 꺼냈다. 고급 스크롤. 광역 마법이 새겨진 종류였다.

"받아."
"응원입니까?"
"그럴 수도 있고...... 사실 미안해서 그러는 거지."
"......?"
"아니, 뻔하잖아. 전쟁에서 이기면 둘째 형이 훨씬 유리해진다고. 그러면 첫째 형은 가만히 있겠어?"

아, 설마. 제발 아니길 바랐다. 하지만 제 5황자는 냉정하게 말했다.

"정보가 샐 우려가 커. 언제 기습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고, 작전을 걸다가 역으로 당할 수도 있어. 형제 싸움 때문에 애먼 병사들이 다치는 거지."
"하아."
"그러니까 미안해서 주는 스크롤이야. 혹시 위기에 처하면 그럭저럭 도움은  거야."
"더 주시죠."

내 말에 5황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숫제 미친놈을 보는 얼굴이다.
하지만 난 아주 당당했다.

'아니, 형제싸움이라서 미안하니까 스크롤을 주는 거잖아? 근데 한 장으로 퉁치는 건 아니지.'

솔직히 보통 황족이라면 건방지다고 몇 대쯤 맞았을 테지만, 난 제 5황자를 믿었다.
이 녀석은 자유분방해서 용병단까지 만든 놈이다. 부하들도 막 대하지 않았고. 분명히......

"푸하하하!! 역시 재밌는 친구야. 잠깐 기다려봐."
"예."

성공했다! 사람은 맞춤형 공략이 중요한 법이다. 나는 슬며시 나오는 미소를 삼키며 황자의 손에 집중했다.
그는 아까와 비슷한 것으로  개, 조금 떨어지는 품질로 두 개를 건넸다.

"자, 5위계 스크롤이야. 5위계 안에서는 최상급 위력이니까 감사히 받아."
"감사합니다."

나도 스크롤을 보는 눈은 있다. 총 4개 중에서 2개는 황자의 말이 맞았지만, 나머지 2개는 아니었다.

'5위계에 간신히 걸치는 마법 스크롤이잖아? 생색내기는.'

아무튼  정도면 횡재다. 어딜 가든 밥값 하는 에델이 4위계 마법사. 그보다 높은 5위계면 귀족가의 수석 마법사도 될 수 있었다.
천인대한테는 차고 넘치는 수준이다.

제 5황자는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잠깐 얼굴을 보러 왔는데, 괜찮은 친구네."

어떤 부분이?

"나는 이만 가볼 테니까, 열심히 싸우라고."
"예."

그는 바람처럼 사라지는......줄 알았는데 잠시 뒤돌아 한 마디를 남겼다.

"제스 홀란트,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고. 네 형제들보다는 더 괜찮아 보이니까 말이야."
"......저하?"

제 5황자는 진짜로 사라졌다. 무슨 장치라도 있는지 어디론가 슥 들어가 버렸다.

'내가 형들보다 낫다고? 가주가 될 확률이 높다는 건가..... 미래를 위한 투자?'

잠시 혼란에 빠진 사이, 한나 누나가 툭툭 친다.

"동생, 이제 나가자!"
"다 알고 있었어?"

한나 누나는 씩 웃었다.

"여자한테는 비밀이 있는 법이지!"
"그게 뭔......"

말하는 사이에 누군가 안대를 씌운다. 이번엔 진심으로 벗으려 했는데, 누군가 교묘하게 방해했다. 기술이 뛰어난 느낌.
난 결국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맡겼다.

한참이 지나자, 어느 순간 갑자기 공기가 바뀌었다. 뒷골목 특유의 퀴퀴한 느낌이 아니라 상쾌한 공기.

"스으읍, 나온  같은데?"
"맞아."

드디어안대를 벗기는 한나 누나. 재빨리 확인하자, 옆에는 한나 누나가, 뒤에는 40명의 그리폰 용병단이 있었다.
해가 조만간 넘어가는 시간. 나는 크게 외쳤다.

"오늘 안에 부대로 간다!! 다들 뜁시다!"
"예!"

나는 40명의 정예를 이끌고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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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참을 뛰어서 조금 지쳤을 무렵이었다.

"슬슬 진지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오, 저기 보인다!"
"......"

옆에서 같이 뛰는 한나 누나의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누나의 딱딱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누나?"
"동생...... 우리 좀 큰일 난 거 같다."

무슨 소리지. 한나 누나는  곳만 뚫어지게 보는 중이었다.
의문을 품으며 그 시선을 따라간다.

"대체 뭐가 있길...... 씨발."

아직 훈련이 끝나지도 않은 아군을 향해, 오크 군대가 돌격하고 있었다.

"비사아아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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