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그런 적 없어요
다음 날 아침, 나와 히폴리타는 사이좋게 일어났다.
"잘 잤어?"
"네, 남자랑 같이 자는 것도 재밌네요."
생긋 웃는 히폴리타. 그녀의 예쁜 얼굴을 관찰했다. 사실 난 아직도 그녀가 왜 나한테 빠진 건지 모르겠다.
문득 드는 의문.
'나를 속이려는 건가? 안심시키려고?'
턱없이 날 과대평가하는 그녀다. 속이려 한다는 추측도 그럴듯했다.
"왜 날 좋아하는 거야?"
"말했잖아요. 당신의 삶이 엿보여서 좋다고."
"노력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아."
"알아요.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은 전부 노력하죠."
히폴리타는 여전히 방긋방긋 웃었다. 그러면서 내가 개발시킨 손으로 목덜미를 만지작거린다.
"뭐...... 이것저것 합쳐진 거겠죠? 용맹하면서도 마냥 무식하지는 않은 모습이라든가, 그...... 얼굴이라든가."
"아하."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니까 이때까지는 괜찮은 남자만 봤는데, 나는 괜찮음 + 잘생김이라는 거다.
'일단은 이 정도로 넘어갈까? 히폴리타가 유능한 건 사실이야. 나중에 기회를 봐서 좀 더 개조해보자.'
엘릭서는 아주 귀하니까 보통은 금고에 넣어둔다. 엘릭서를 쓴다고 해도, 가문으로 돌아가서 쓸 거다. 전쟁 중에는 조교하는 게 어느 정도 먹힐 터였다.
히폴리타는 다시금 입술을 덮쳤다. 그녀와 진한 키스를 한바탕 나누는데, 천막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제스님, 에델입니다."
"츄릅."
키스를 마무리하고 잠시 히폴리타를 떼어 놓는다. 대신해서 분홍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들어와."
"예."
에델은 바싹 붙은 우리를 보더니 눈썹을 조금 올렸다.
"대단하시군요."
"응?"
"아닙니다. 아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히폴리타를 슬쩍 보며 말하는 에델.
"2인분으로 준비할까요?"
"음...... 먹고 갈래?"
히폴리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먹여줄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야."
에델은 금방 음식을 내왔고, 우린 차분히 밥을 먹었다. 히폴리타는 아침을 먹는 내내 살짝 들뜬 기색이었다.
특출나게 맛있는 요리도 아닌데, 탄성을 내지른다.
"맛있어요!!"
"그냥 고기 스튜가......?"
"당신이랑 먹으니까 맛있다는 거죠!"
"그래......"
그녀의 감정을 따라가기 힘들다. 손을 잡고 있을 때, 약간 개조된 것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갑자기 또 반하다니......
'으음, 대화가 많이 필요하겠어.'
마침 앨리스도 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갑옷을 입고 훈련을 준비하는 그녀.
"도련님, 오늘부터 통합 훈련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통합......? 아, 히폴리타 부대도 포함된다는 거군."
"예."
그때, 히폴리타가 재빨리 끼어든다.
"남자들로 이루어진 150명은 그냥 두세요."
"그냥 두라고?"
"네. 천 명이나 되는 부대에요. 그게 전부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것도 이상하죠."
"으음, 그런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만, 어쩌면 십만 단위가 충돌하는 대회전이라면 모르지만, 평범한 전투에서 천 명은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히폴리타는 말을 덧붙였다.
"애초에 총사령관님은 이 부대에 단독작전을 맡길 계획이었어요."
"진짜?"
"네. 사병으로 구성된 부대가 제국군과 같이 작전을 수행할 수는 없잖아요? 두 달 동안 훈련을 잘 시켜도 애매해요."
"하기야...... 그럼 무슨 역할을 맡으려나?"
히폴리타는 뭐 그런 걸 묻냐는 표정이었다.
"혹시 절 시험하는 건가요? 시험이라면 조금 더 고급 질문을 했으면 좋겠는데."
"아,아니..... 그니까 같은 생각을 하는지 확인하는 거야. 확인!!"
씨부럴, 나를 빡대가리로 생가하는 부하들은 물어볼 때마다 아주 친절하게 답해준다.
그런데 히폴리타는 나를 고평가해서 그런지 설명해 주는 걸 귀찮아했다.
"확인..... 필요하긴 하죠. 제 예상은 게릴라 부대에요."
"오크 제국에...... 침투한다는 소리지?"
대답하지도 않고 밥만 먹는 히폴리타. 이런 건 질문이라고 생각도 안 하는 모양이다. 앨리스가 대신 말했다.
"참모님의 의견처럼 게릴라라면, 당연히 침투할 겁니다."
"주, 죽을 확률 높잖아.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으음...... 지휘관의 역량과 병사의 기량에 따라 큰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꿀꺽. 스튜를 삼킨 히폴리타가 나를 껴안는다. 어깨 즈음에서 뭉글뭉글한 가슴이 느껴졌다.
'속옷..... 벗었네.'
"설마 나를 못믿는 거예요? 어제 모의전할 때 확신했어요!"
"뭐를?"
"내 머리와 병사들의 충성심이 합쳐지면 우리 부대는 질 수가 없다고!!"
"그, 그래.....?"
나는 확신이 없는데.
우리 부대가 할 일을 듣고 나니까 꽤 초조했다. 적진에 침투해서 단독 작전을 펼친다.
'잘못 걸리면 포위당해서 꼼짝없이 전멸이잖아?'
물론 나는 살아남을 수도 있다. 아마...... 남자 성노예가 될 거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오크 여자들한테 돌려 먹히는성노예라니......
'절대 안 되지. 꼭 이겨야만 한다!'
각오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앨리스는 히폴리타에게 질문했다.
"참모님, 앞으로 훈련 방향을 알고 싶습니다."
"훈련 방향? 나쁘지 않게 하던데."
히폴리타는 중얼거리더니, 앨리스에게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일단 기본은 지키는데, 너무기본이지. 우린 단독 작전을 수행할 거잖아? 서로 진형 다 갖추고 싸우는 게 아니라, 치고 빠지기. 즉, 이동하면서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도망치게 될 일이 많다는......"
그녀의 설명은 약 10분을 넘게 이어졌다. 앨리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동자세로 경청했다. 나는 처음 10초를 넘어간 순간 포기했는데, 앨리스는 끝까지 고개를 끄덕였다.
"......해서 남자로 구성된 150명은 천인대 내부의 단독부대로 빼는 게 낫다는...... 앨리스경, 이해한 거겠지?"
"예, 참모님."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는 히폴리타. 그녀는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궁병의 숫자가 통상보다 많아야 하는 이유는?"
"아군이 도주할 때 엄호사격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호오, 작전을 수행할 때, 함정을 설치하는 게 좋을까?"
"아닙니다. 한둘도 아니고, 천 명이 작전을 펼치면 아군의 피해가 반드시 생깁니다. 그 시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행군하는 게 더 이득입니다."
"오오. 싸움만 하는 기사는 아니었네? 제국의 백합..... 다시 봤어."
히폴리타가 칭찬하는데도 앨리스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다. 앨리스는 칭찬을 은근히 좋아하는데. 분명 내가 칭찬할 때는 슬며시 웃었단 말이지.'
묘한 일이다. 아무튼 나는 둘에게 물었다.
"훈련에 대한 논의는 다 끝난 거지?"
"아직이에요. 오늘 안에 서류를 보낼 테니까, 앨리스경하고 같이 검토해주세요. 특히, 천인장님이 꼭 보셔야 해요."
"나.....?"
진짜 읽을 줄만 아는데. 어차피 앨리스가 다 확인할 게 뻔하다.
그래도 장단은 맞춰줬다.
"능력껏 해볼게."
"후훗, 믿을게요. 천인장님."
다 먹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히폴리타. 그녀는 몸을 돌리다 말고, 내게 다가와서 키스했다.
뜨거운 혀가 가볍게 얽혔다가 빠져나간다. 기분이 좋기는 한데, 굉장히 감질난다.
"하아, 키스 말고 더 하는 건 어때?"
"언젠가 하겠죠?"
그리 말하며 자리를 뜨는 히폴리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내 양기에 저항하는 공작가의 신동, 히폴리타 체링겐.
'꼭 따먹는다. 조만간!!'
히폴리타는 떠났다. 에델도 잠시 일이 있다고 천막을 나갔다.
남은 건 앨리스와 나. 단둘이 있는 천막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훈련이 있어서."
"잠깐!!"
철커덕. 고개를 돌리는 앨리스. 나는 모의전에서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앨리스경, 분명 그랬지? 모의전을 이기면 날 존경하겠다고."
"......예."
"또앨리스경은 존경할만한 남자가 이상형이지?"
"맞습니다."
"그럼 이제 난 어때?"
앨리스는 나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을 연다.
"도련님에 대한 감정은, 모의전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뭐?"
씨발, 그러면 내가 왜 그 지랄을 한 거야! 분명 날 존경한다고.....
앨리스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기 전에 입을 열었다.
"도련님을 싫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