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1화 〉창과 방패 (51/111)



〈 51화 〉창과 방패

히폴리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패배의 충격에 빠져서 내기의 보상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다. 애초에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모...... 몸 말이죠?"
"네."

침상에 누워 방긋 웃는 남자. 히폴리타는 제스 홀란트를 훑어봤다.
솔직히, 잘생긴  사실이다. 황족의 미모에 비견될 만큼.

'황족은 신분의 후광도 있으니까, 이자가 더 나은 건가? 아니야, 정신 차리자.'

그녀가 언제부터 남자의 외모 따위를 신경 썼던가. 규격 외의 얼굴에 잠시 흔들렸지만, 히폴리타의 마음은 굳건했다.
몸을 독점한다? 그깟 몸을 잠시 내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평생 바치는 것도 아닌데 뭘.'

구두로 협약하지는 않았어도, 계약서에 기간이 적혀 있었다. 두 달이 좀 안 되는 기간.
정확히 최전방으로 떠날 때까지다. 훈련 기간 동안 히폴리타가 부대를 장악할 계획이라서 그렇게 정했다.

'두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

물론 히폴리타는 순혈여성주의자의 대표 주자인 리리나조차 하룻밤을 못 버텼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일이라서 널리 퍼지지 않았으니까.

히폴리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좋아요. 두 달 동안 내 몸을 독점하세요. 대신에!!"
"대신?"
"제업무에 차질이 가는 일은 없어야 해요."

제스 홀란트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공녀님 같은 인재를 썩히면 국가적 손해니까요. 차질이 아니라, 아주 전폭적으로 지원할 생각입니다."
"진짜요?"
"그물은 괜찮아 보이던데요? 금속재질로 만들면 병사한테는 충분히 통할 겁니다."

기사한테는 좀 힘들겠지? 제스는 혼자중얼거렸다. 그걸 본 히폴리타가 히죽 웃는다.

"후훗, 이미 연구하는 중이에요. 단순히 신무기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맞춤 훈련을 받은 병사. 그리고 적절한 전술과 환경까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니까요."
"훌륭합니다. 믿고맡길게요."

너무 순순히 대답한다. 내가 모의전에서 패배했다고 완전히 꼬리를 만다고 생각하는 걸까?
히폴리타는 제스를 유심히 관찰했다. 저 남자가 비범하다는 건 충분히 겪어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나를 견제해야 하는 거 아닌가? 공적이 나한테 전부 돌아오면 어쩌려고?'

체링겐 가문과 홀란트 가문은 기본적으로 사이가 안 좋다. 규모가 차이 나서 경쟁까지는 아니지만, 체링겐 가문 출신의 참모한테 공적을 빼앗기는 게 좋을 리 없었다.
뭣보다 총사령관에게 듣기론, 그는 이제 도약하려고 하는 거였다.
자신의 공적을 가로채도 모자랄 판인데.....

하지만 제스 홀란트는 그 모든 걸 포용한다는 태도였다.

"공녀님의 재능을 개화하세요."
"다, 당신이 가려질 수도 있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망나니의 평판이 나아져서 어디에 쓰겠어요. 전쟁에 보탬 되는  훨씬 낫지."
"......"

이것마저 기만책? 호탕한 맹장의 모습을 연기하는 건가?
히폴리타가 열심히 머리를 굴릴 때였다. 제스는 손을 휘휘 저었다.

"자, 공녀님 빼도 나머지는 전부 나가 있어. 정령사만 불러줘. 운디네로  씻을 테니까."
"예."

천막 안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다. 그중엔 제스의 누나로 알려진 한나 홀란트도 있었는데, 그녀는 히폴리타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흐음, 내일이면 둘이 어쩌고 있을지 기대되는걸."
"무, 무슨!! 지금 하극상인가!"

히폴리타의 호령. 한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막을 나갔다. 이미 시야에서 벗어난 터라  훈계하기도 뭣하다.
단둘이 남아서 어색한 적막이 흐르는 천막.
히폴리타는 제스를 힐끔거렸다.

"아으으, 역시 샤워는 운디네가 최고야."

제스의 옷이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다. 운디네가 돌아다니면서 씻겨 준다는 소리였다.

'씻는 모습을 이렇게 보여주는 남자라니......'

확실히 거칠다. 이제껏 봤듯이 지략가보다는 맹장 스타일. 그런 남자가 이제까지 힘을 숨겼다면 얼마나 인내심이 강했던 걸까.
잠시 기다리는 사이, 제스 홀란트는 아주 말끔해졌다. 이불 속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당당히 일어선다.

"으으음, 부활!!"
"신기한 말투를 쓰시네요."
"부활이 부활이죠. 하루 꼬박 잤다가 일어났는데 뭐라고 표현합니까."

툴툴거리는 제스 홀란트. 그는 히폴리타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히폴리타의 키는 꽤 크다. 그런데도 제스 홀란트를 열심히 올려다봐야 했다.

'십존의 아들...... 하여간 피는  속인다니까.'

훅하고 제스 홀란트의 체취가 퍼졌다. 그녀는 체취에 미미한 양기가 섞인  깨달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히폴리타.

"벌써부터 양기로 유혹하는 건가요? 미안하지만, 공작 가문쯤 되면 고작 양기에 굴복하지 않는답니다."
"오, 여자를 위한 교육도 있어?"

양기에 굴복당하는 건 여자뿐. 제스는 그걸 지적한 거였다.
적절한 의문이었다.

'애초에 귀족가의 딸은 자제로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게 보통이니까.'

진정한 핏줄로 인정받는  오직 아들. 그런 상황에서 양기에 대항하는 법을 배웠다는 건 당연히 이상하다.
히폴리타는 턱을 살짝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요. 체링겐 가문은 예로부터 뛰어난 자손의 성별을 가리지 않았답니다."
"아, 맞다. 문관 쪽이었지. 그러면 이해되지."
"근데  반말을 쓰는 거죠? 여기서야 제 상관이라지만, 전쟁이 끝나면......"
"뭐 어때. 지금은 어차피 몸을 내줘야 하는 상황인데.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대해줄게."
"그게 무슨......"

제스는 히폴리타의 항의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에 혼자 중얼거린다.

"문관 가문은 특이하구나..."

무력 쪽으로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유리. 같은 재능이라도 여자보다수련 효율이 훨씬 좋았다. 하지만 머리를 쓰는 건 다르다.
세상에 음기가 넘치니 뭐니 해도 지능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양기가 많다고 똑똑했으면, 망하는 귀족 가문은 없었겠지.'

히폴리타는 고고하게 제스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비록 섹스는 한 번도 안 해본 처녀였어도, 양기에 노출되는 훈련은 차고 넘치게 했다.
지금 제스 홀란트가 은은하게 흘리는 양기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후훗, 보통 여자였다면 이유도모르고 당신의 체취에 빠져들었겠죠. 하지만 저는 다르답니다."
"음...... 아까부터 미안한데 말이야."

제스 홀란트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천진한 얼굴이다.

"난 의도적으로 양기를 흘린 적이 없어."
"네......?"
"그냥 내가 갈무리를 잘하지 못해서 흘러나오는 모양이야.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

컨트롤 능력에 비해 기운의 양이 과도할 때 나오는 현상. 어디 철부지가 영약을 처먹은 꼴이었다.
히폴리타는 내심 경악했다.

'조절되지 않은 양기가 이거라고.....? 그러면 제대로 내뿜으면?'

마침 제스가 씩 웃는다. 그는 히폴리타의 어깨를 잡고 확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과 팔이 느껴진다.

"꺅!"
"공녀님 한번 안아보자."

흐흐흐. 음침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히폴리타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까의 족히 네 배는 되는 양기 농도. 마약향을 코에 들이붓는 기분이었다.

"어때? 지금은 신경 좀 썼어. 살짝 흥분될걸?"
"저, 전혀요!!"

'자꾸만 기분이 좋아져....... 안 돼!! 이럴 때는 감각을 의도적으로 저하시켜야지.'

체링겐 가문의 교육은 체계적이었다. 노예를 조교할 때는 성감대를 의도적으로 생성한다. 자꾸만 특정 부위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버티는 훈련은? 반대로 감각을 무디게 만들었다.
잠이 너무 쏟아지거나, 방금 자다가 일어나면? 정신이 비몽사몽해서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양기 저항 훈련의 요지도 비슷했다.

'집중을 흩트리자!! 최대한 다른 생각...... 아예 잠들면 더 좋고!'

의도적으로 현재 상황에 대한 생각을 회피한다. 히폴리타는 짙은 양기를 흡입하면서도 평정을 겨우겨우 유지했다.

"스으읍, 푸우우."

그걸 보고 재밌다는 듯 웃는 제스.

"이야, 감흥 없는 얼굴이네? 분명 기분 좋을 텐데?"
"헛소리......"

히폴리타의 머릿속엔 다양한 생각이 떠다녔다. 과거 그녀가 세웠던 작전부터 앞으로 천인대를 훈련할 계획.
오크 제국의 약점과 강점 따위가 무질서하게 떠돈다.
신체가 보내는 쾌락 신호는 수많은 생각에 묻히고 말았다. 히폴리타는 미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몸은...... 마음대로 해요. 하지만 내가 절정하는 일은 없을 거야."
"정말로?"
"당연하죠."
"크크큭, 이렇게 말하는 여자는 처음이네."

신선하다. 제스 홀란트는 안계를 넓힌 기분이었다.
이제껏 만난 여자라고 해봐야, 쾌락을 주면 전부 해롱거리다가 맛이 가는 여자들 아니었나.
그런데 공녀쯤 되니까 확실한 대비책이 있는 것이다.

공략한다. 공작 가문의 방비를  힘으로 뚫어낸다!
굳게 다짐하는 제스. 그는 전신에서 최고 농도로 양기를 뿜어냈다. 맨 처음 기준으로는 10배를 넘는 농도다.

"어때? 나한테 달라붙고 싶은 마음이 들어?"

히폴리타는 머릿속에 떠돌던 생각 중 하나를 대답처럼 중얼거렸다.

"오크..... 오크를."
"뭐, 뭐?"

오크. 이런 폭언은 처음 들어본다. 애초에 능력 면에서는 거의 모든 욕을 들어봤지만, 외모 쪽으로는 면역이전무한 제스였다.
그는 순간 발끈해서 하멜의 양기를 꺼내려다가 참았다.

'아니야. 순전히 내 힘으로!'

이미 기운은 충만하다. 각성을 제대로 했기 때문이다.

"하아아, 그 방비책이 얼마나 가는지 보자고."

제스 홀란트는 손끝에 천천히 양기를 모았다. 그의 손끝은, 양기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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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 오크라니!! 이 건방진 년이 진짜.
 히폴리타의 분홍 머리를 내려다봤다. 가문의 특징인 분홍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클어주고 싶다.
정액을 뿌려서 분홍을 연하게 만들어주고 싶다.

뱃속에서 욕망이 솟구쳤다. 욕망은 그대로 양기에 반영되어 손끝의 기운이 한층 강해졌다.

"오크가 문제......"
"또 지랄이네."

체링겐 가문의 방비책? 뭔지는 몰라도  깰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평범한 남자와 기사의 양기 차이도 엄청나다. 그런데 나는 거기서 한 단계를 뛰어넘었다.

'기운으로 따지자면 어딘가의 단장급은 되겠지.'

히폴리타의 모범생 같은 눈매를 훑어봤다. 항상 총명하던 눈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일종의 세뇌 같은 건가?
뭐든 괜찮았다. 한계 이상의 쾌락은 방벽을 깨뜨릴 테니까.

"우리 손부터 잡을까?"

한껏 뭉친 양기를 히폴리타의 손에 가져다 댄다. 보드라운손이 내 큼직한 손바닥과 겹친다.
응축된 양기는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며 히폴리타에게 흡수되었다. 순간 눈을 부릅뜨는 히폴리타.

"으으음......!!"
"정신이 좀 들어? 그러면 손으로 날 만지고 싶을걸?"

아무 생각 없이 손부터 공략한  아니었다. 마치 노예를 조교하듯이 한 것이다.

'손을 가장 민감하게하는 거지. 히폴리타가 자발적으로 나를 만지도록 말이야.'

손이 민감해지면, 알아서 양기를 갈구하며 나를 만지게 된다. 방비책을 든든히 믿는 그녀에겐 이보다 좋은 방법이 없으리라.

하지만 히폴리타의 반응은 의외였다. 잠시 부르르 떨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잠깐 방해당했네. 오크..... 어떻게......"
"뭐?"

통하지 않았다. 오크라고 모욕당한 분노를 담았다. 분명 적지 않은 양이었는데.....

"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다는 거지? 재밌네."
"에휴, 지면 안 되지. 신무기는......"

여전히 의미 모를 말을 지껄이는 그녀. 나는 그녀의 다른 곳을 확인했다.
노릴 곳은 많다. 신체를 독점했으니, 그냥 옷을 벗겨도 되고 아예 민감한 클리토리스부터 공략해도 된다.

'하지만 내 자존심이 있지!!'

클리토리스를 처음부터 노려서는 체면이 살지 않는다.그림을 그려보면, 내가 매달리는 자세 아닌가?
어디까지나 히폴리타가 나를 원하도록! 그게목표였다.

히폴리타의 가녀린 손을 붙잡았다. 글씨를 쓰느라 미세하게 생긴 굳은살이 돋보인다. 그 외에는 그저 길고 예쁜 손가락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계속 조물거렸다. 그러면서 꾸준히 양기를 넣어준다.
단지 손을 잡는다는 행위. 그것뿐인데도 히폴리타에겐쾌락이 가해질 것이다.

"으으음......"
"느낌이 와?"
"전쟁...... 황제 폐하."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는 그녀. 아까는 아예 신경을 안 쓰는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가끔 신음이 나오는 정도까지 발전했다.
히폴리타는 신음을 뱉을 때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꼭 모범생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것처럼 말이다.

'귀엽네, 이거.'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고. 시작일 뿐이야."

말 그대로 시작이다. 아직 그녀를 공략하기 시작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난 침대를 슬쩍 확인했다. 히폴리타를 통째로 들어 올린다.

"흣? 아...... 오크, 오크, 오크."
"편한 자세로 하자고. 꽤 장기전이 될  아니야?"

공작가의 방비책이라는 걸까. 당장 뚫릴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천천히 공략하는 게 맞다.
히폴리타를 침대에 내려놓자 그녀는 편하게 앉았다. 옆에 바싹 붙으며 그녀의 손을 잡는다.

'겉으로만보기엔 연인이네. 손잡고 데이트하는 연인......'

물론 속사정은 전혀 다르다. 서로의 소유권을 놓고 다투었으며, 결과적으로 내가 쟁취했다.
 승리의 대가로 히폴리타를 주물거리는 중이었고. 전체적으로 순하게, 안경이 어울릴 것처럼 생긴 히폴리타다.
이런 고고한 여자가 타락되면어떨지 너무 궁금했다.

그녀의 손을 붙잡고 차분히 양기를 흘려 넣는다. 큰 충격은 아니어도, 꾸준한 쾌락. 난 여전히 멍 때리는 그녀에게 속삭였다.

"제발 오래 버텨줘. 그래야 정복할 때 짜릿하니까."
"오크, 오크, 오크......"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히폴리타 공략을 시작하고, 30분 후.
가만히 있어도 넘쳐흐르던 양기인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조금 줄어들었다는 뜻.
그래도 별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흘러내린다는 건,  통제를 벗어났다는 뜻이야. 넘치는 양기가 사라졌을 뿐이니까 컨디션 100%인 거지.'

30분이나 잡고 있던 히폴리타의 손을 잠시 놓았다. 혹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그녀의 손은 가만히 있었다.
히폴리타의 표정도 똑같다. 계속해서 고뇌하는 얼굴.

"그물도 좋지만, 새로운 원거리 무기가...... 화약과 마법......"
"좋아, 30분으로 뚫릴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

 다시 그녀의 손을 잡고 양기를 불어넣었다.

공략을 시작한 지 1시간째.
아직도 컨디션은 괜찮았다. 문제는 히폴리타도 멀쩡하다는 것.
오기가 생겨서 양기를 늘릴까 생각도 했는데, 그만두었다.

'오버페이스는  된다. 꾸준하게 공략하자.'

인내심. 공녀를 굴복시키는데 인내심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크의 번식력은 너무 뛰어나서......"

히폴리타의 얼굴을 구경하면서 양기를 내뿜었다.

2시간 30분째.
양기가 줄어드는 게 체감되었다. 전투할 때처럼 급격한 소모는 아니지만, 확실히 처음보다 감소했다.

'넘치던 게 사라진 정도가 아니야.  그릇을 채우지 못하는 양......'

일반적이라면, 여기서 멈췄을 것이다. 갔다가는 양기 회복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만둘 수는 없었다. 조금 전, 히폴리타의 동공이 조금 흔들렸기 때문이다.

"공녀?"
"......오크, 오크, 오크."

숫제 나를 물리치는 주문인 것마냥 중얼거린다. 그녀의 귓가로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멍하니 있던 눈동자도 조금씩 방황한다.
실험삼아서 가볍게 손을 떼보았다.

움찔ㅡ

히폴리타의 손이 나를 따라오다가 곧바로 멈춘다. 고작 0.5초 정도의 움직임.
하지만 확실한 변화였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슬슬 양기가 좋아졌구나?"
"오크 제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계기는....."
"이제는 역사를 더듬네?"

할 수 있는  다 해봐라.  즐겁게 웃으며 양기를 투하했다.


4시간째.

위험하다. 고된 전투를 치른 것만 같았다.
배가 텅텅 비고, 당장이라도 뭘 먹어야 할 듯한 기분. 입도 바짝바짝 말라왔다.
어느새 히폴리타는  범벅이다. 그녀도 적잖이 힘들었으리라.
근처의 물병이 눈에 들어왔다.

"물은 마시면서 해야지."

일할 때도 밥은 먹는다. 공략도 물 정도는.....
그리 생각하며 손을 뻗었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내려다보니 히폴리타가  손가락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공녀?"
"어, 어..... 오크!!"

처음으로 당황한 티를 내는 히폴리타. 화들짝 손을 놨지만, 이미 그녀가  잡았다는 사실은 뇌리에 박혔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마시고, 히폴리타에게 내민다.

"공녀도 마시지?"
"......."

말없이 물을 채가는 히폴리타. 그녀는 목을 축이더니 작게 속삭였다.

"물 때문에 잡은 거예요. 나도 달라는 뜻으로."
"알지알지."

누가 뭐라나? 나는 히폴리타의 손을 다시 잡았다.
왠지 그녀도 마주 붙잡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양기를 박박 긁어서 다시 공급하기 시작했다.

"흐으음."

그녀의 숨소리와 함께 공략이 재개되었다.

5시간째.
눈이 스르륵 감긴다.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에서 잠깐 후회했다.

'처음부터 양기를 조금씩 주입할  그랬나? 너무 자신만만하게 퍼부었어......'

시작할 때까지는 밤을 새도 괜찮을  알았다. 그런데 그건 각성한 양기를 써보지 않아서 생기는 착각이었다.
아니면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툭-. 머리 옆에 뭔가 닿는다. 히폴리타의 어깨.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후우, 존  아니야. 완전 멀쩡해."
"......그렇다고 해주죠."

그나저나, 공작가의 방비책은 대체 어떤 수준인 거지? 내가 양기를 퍼부어도 버틴다는 건가......
너무 얕봤을 수도 있다. 그리 생각하는데 이번엔 뒤통수에 뭔가 닿았다.

털썩-. 침대였다. 나도 모르게 침대 위로 쓰러진 거다.
어느새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히폴리타의 손은 아직 놓지 않았다.

'내 정신력이 이렇게 강했나......?'

히폴리타를 공략한다. 목표를 세우긴 했는데, 의식이 잠깐 끊기는 사이에도 손을 놓지 않을 정도였나.
새삼 스스로에게 감탄했다.

"양기를 계속 뿜어......"

중얼거리다가 깨달았다. 내 양기는 텅텅 비었다. 긁어내려고 해도 나오지 않을 만큼. 한동안은 정양해야 할 정도로.

그러니까, 5분 전부터 나는 양기를 뿜은 적이 없었다. 히폴리타를 잡을 힘도 없었다.

히폴리타의  너머로 눈이 마주친다.

"손...... 네가 잡고 있었어?"

히폴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놓지 않았을 뿐이다.

"됐......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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