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모의전(5)
살면서 이렇게 노력한 적이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도록 방패를 휘두른다. 히폴리타 측 병사의 숫자가 줄어들수록, 밀집도도 낮아졌다.
즉, 하나를 처리할 때, 힘을 더 써야 한다는 뜻이다.
"좀 꺼져어엇!!"
내 함성에 대응하듯 상대방도 외친다.
"그물, 그물을 던져!"
"암만 강해도 그물을 찢지는......"
훌렁-. 뭔가가 내 몸에 감긴다. 슬쩍 확인하니까 그물이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조여드는 것. 부하들이 이것 때문에 퇴장당한 걸 봤다.
"이까짓 그물 따위이이!!"
두 손으로 한 부분을 잡고 힘껏 찢는다. 잠시간 버티던 그물은 찌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렸다.
경악하는 병사들.
"그, 그물을......? 저게 어떻게 되먹은 힘....."
"잔머리 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붙어라!!"
방패를 들고 다시 돌격. 아까부터 이 짓만 계속했다. 남은 여기사를 확인했다. 두 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셋이었는데, 그새 하나가 또 줄었다.
역시 내가 가장자리를 공략하고, 기사들이 중앙에서 버티는 건 부담이 컸다. 무엇보다 포위당한 상태였으니까.
아직도 히폴리타 측은 수십. 난 가장 믿음직한 녀석을 호명했다.
"실바!!"
"예."
"중앙은 버틸만하냐?"
"내일 오셔도 됩니다."
듣기 좋은 허세다. 난 큭큭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딱 스물만 더 해치우고 합류하마."
"나머지는 어떡합니까?"
"너희들 몫도 남겨줘야지."
"좋습니다."
자꾸 땀이 흘러내려서 눈을 찌른다. 고개를 흔들어 털어내고는 적을 노려봤다.
발은 쉼 없이 움직였고, 방패는 몇 초마다 병사를 하나씩 튕겨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히폴리타 측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거슬리는 놈이라 냅다 들이박았다.
"넌 퇴장이야아아!!"
"커허억!"
튕겨 나가면서도 자세를 잡아 착지하는 기사. 한 방에 처리하지 못했다.
아까부터 이런 놈들이 자꾸 늘어나서 시간이 끌린다.
"하아아, 제기랄."
불평하던 와중, 어렴풋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곁눈질로 확인하니 앨리스와 한나 누나가 있는 방향이다.
'뭐지......?'
난 달려드는 기사를 다시 쳐내고는 그쪽을 주시했다. 한나 누나가 자꾸만 앨리스를 떠민다.
앨리스는 살짝 저항하다가 자포자기한 듯한 얼굴로 한 발짝 나섰다.
"도련님."
기를 담아서 또렷하게 들리는 음성. 앨리스의 목소리가 꽂히자 정신이 맑아졌다.
"왜!!"
"끝까지 버티십시오. 마지막까지 서 있으면 이긴 겁니다."
당연한 말이다. 굳이 이걸 하려고.....
앨리스의 말은 이어졌다. 이번엔 기를 상당히 조절한 듯 나에게만 전달되는 음성이다. 일종의 전음 같은 개념.
[지금의 역경을 이겨내면...... 도련님을 존경하겠습니다.]
존경??? 가문에서의 회의가 떠올랐다.
앨리스의 이상형은 존경할만한 남자. 나를 존경한다는 건? 날 좋아한다는 소리다.
'씨이이이발, 여기서 이기면 앨리스의 사랑을 받는다고?'
갑자기 전신에 활력이 생긴다. 심장은 싸울 때보다도 지금이 훨씬 두근거렸다.
앨리스, 저 고고한 기사의 존경을 받는다. 그녀를... 탐한다.
넘쳐나는 활력으로 땅을 박찼다.
"끄아아아-!!"
이제까지 날 저지하던 기사가 당황한다. 녀석은 황급히 옆으로 피하려다가 제대로 방어도 못 했다.
"커헉....."
털썩. 주저앉는 녀석. 당연히 퇴장이다. 이후에도 비슷했다.
앨리스의 존경, 앨리스의 존경. 이 말을 되뇌며 방패를 휘두르자 힘이 줄지 않았다.
"간드아아!!"
하나씩 착실히 퇴장시킨다. 그사이에 상대는 또 무슨 수를 쓰는 것 같았는데, 그냥 방패로 후려쳐서 저지시켰다.
까앙-. 이 맑은소리가 들릴 때마다 반가웠다.
조금씩, 앨리스와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무아지경으로 방패를 휘두르던 내 귀에 여자의 목소리가 꽂혔다.
"천인장님!! 접니다!!"
"응?"
"실바, 실바입니다!"
아, 실바랑 만났다고? 나는 가장자리, 그녀는 중앙에 있었다. 그런데만났다는 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끄으응."
"어우, 삭신이야."
"진짜 허공을 날았어..."
"죽겠네."
주변에 멀쩡히 서 있는 병사나 기사는 없다. 다들 땅바닥에 쓰러져 끙끙 앓고 있을 뿐.
마지막까지 남은 건, 나와 실바였다.
실바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는 지친 얼굴이 웃었다.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행복함이 느껴지는 미소다.
"우리, 이겼나?"
"예."
"히폴리타를?"
"그렇습니다."
"괜찮은 승리였나?"
"......처절했습니다."
난 소리 없이 웃었다. 완벽한 승리의 주인은 책사고, 평범한 승리의 주인은 병사며, 처절한 승리의 주인은 기사다.
나와 제스 기사단은, 분명한 이번 승리의 주인이었다.
-----------
"축하드려요."
히폴리타에게 축하 인사를 들은 건 다음 날이었다. 모의전 당일에는 바로 쓰러져서 거의 하루 동안 잤기 때문이다.
사실 아직도 꽤 졸리다.
어제처럼 열심히 싸운 적이 없었다.애초에 수련을 그렇게 하지도 않았고.
이불 속에서 멍하니 있자, 히폴리타는 재차 말했다.
"축하드려요, 결국 이기셨네요."
"아..... 그쵸."
물 마시고 싶다. 목말라.
그런 눈빛을 에델에게 보내자, 그녀는 조용히 나가서 물통을 가져왔다.
역시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되는 친구다.
꿀꺽꿀꺽. 시원하게 물을 들이키자, 살짝 일그러진 히폴리타의 얼굴이 들어왔다.
"이겼다고 기죽이는 건가요? 그렇게 유치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뇨, 그냥 목이 말라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다.
'모의전에서 이겼어. 이제 히폴리타 체링겐의 능력을 쓰면서도 그녀한테 잡아먹히지 않을 수 있다!!'
상관을 잡아먹는 여자. 이 말을 듣고 얼마나 긴장했던가.
어쩌면 나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이제 내 참모가 될 생각이 듭니까?"
"무슨 소리죠? 저는 처음부터 천인장님의 참모로 들어온 거예요."
"으음......"
뭐라고 말하지. 역시 직설적인 게 최고다.
"정확히 표현해야죠. 내 참모가 아니라, 우리 '부대'의참모가 되고 싶었던 거잖아요."
나를 위해 일하는 게 아니다. 부대를 위해 일하고, 언젠가 부대를 장악할 계획이었지.
이런 뜻을 담자, 히폴리타도 살풋 웃었다.
"다아는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시네요. 짓궂으셔라."
"크흠."
그녀 수준에 맞지 않았나? 나한테는 딱 알맞은 대화였는데.
난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간 끌었다.
"크흐음, 그나저나 말입니다."
"네?"
"공녀님의 능력은 인정하겠습니다."
히폴리타의 얼굴에 의문과 분노가 감돈다. 패배자를 능욕하냐는 뜻일 거다.
난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솔직히 병력 운용에서는 완벽한 패배였습니다. 내가 최전방에 나서지 않았다면 깔끔하게 졌을 정도였죠."
"알긴 아시네요."
"하지만 결국 이긴 건 접니다."
잠시 쉬었다가 말을 뱉는다.
"뛰어난 전술, 잘 훈련된 병사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겁니다."
"대규모 전투에서는 개인의 무력이......"
"당신은 천인대의 참모입니다."
내 말에 히폴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대회전을 준비하는 것도, 아군 전체가 따르는 계책을 내놓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천인대의 참모일 뿐이다.
"머릿속에 집어넣으세요. 내 무력과 나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여기사들. 그들의 실력, 기세, 성향. 전부 파악하란 말입니다."
"......"
"공녀님이 숲을 보는데 천부적인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숲만을 보다가는언젠가 발목을 잡힐 겁니다."
날조용히 노려보는 히폴리타. 아까보다도 훨씬 굳어진 얼굴이었다.
'화가 났나? 아무튼 말을 끝맺어야지.'
"여기서는 나무를 배워가십시오. 병력을 숫자로 보고, 서류로 파악하는 게 아니라 직접 겪어보라는 말입니다."
"......"
"제가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여기까지입니다."
히폴리타는 가만히 있었다. 아주 딱딱한 표정으로 땅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몸을 돌린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요."
그리 말하며 히폴리타가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공녀님!!"
"......?"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는 그녀.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우리, 내기했잖아요."
내기의 보상은 히폴리타의 몸. 난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떡은 치고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