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모의전(4)
"나느으으으은 전설이다!!"
얻었다. 수련 없이도 기사를 후드려 팰 수 있는 재능을 얻었다.
이젠 거리낄 것이 없다. 난 방패를 들고 무작정 앞으로 돌진했다.
"으아아아!!"
방패에 뭔가가 살짝살짝 걸리는 느낌이 있다. 충돌이 생길 때마다 남자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헉!"
"무슨 힘이....."
"끄으어."
아예 튕겨 나가는녀석들. 전쟁이라면 목숨을 끊어야겠지만, 지금은 모의전.
쓰러져 전투 불능이 된 놈들은 전부 퇴장당했다. 한 번의 돌진에 무려 넷을 해치웠다.
"됐어어어!!"
"천인장님,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요, 천인장님 힘이 얼마나 좋으신데요!!"
저 힘이 '어떤 힘'일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난 대강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아군 쪽에서 여자 비명이 또 들린다. 이번엔 두 명이었다.
남은 기사는 열 명.
멀리 떨어져서 보니, 아군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기사들이 눈부신 분투를 펼치고 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다.
'뭣보다 연습용 칼을 쓰는 게 문제야.'
기사에게 갑옷의 의미는 아주 컸다. 철을 베는 실력자가 아닌 이상에야, 갑옷을 공략할 방법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갑옷 위로 내려치는 공격은 단지 충격만 줄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병사들도 똑같았다. 연습용 검이니까 날이 없다. 즉, 한두 번 맞아도 충격만 전달되지 몸이 잘리는 건 아니었다.
마치 갑옷을 입고 검격을 맞는 것처럼 말이다.
'갑옷의 이점이 줄어든 거지. 이래서 기사들이 실전보다 활약을 못 하고 있구나.'
상대의 병력을 퇴장시킨 건 대부분 아군 기사의 몫이었다. 슬슬 지칠 때가 되었다는 뜻.
이점이 사라지고, 지친 아군 여기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끄으으... 천인장니이임!"
다시 한 명. 이제 한 자리로 접어들었다. 난 방패와 적군을 번갈아 확인했다.
'힘이 세졌다고 해도, 금강불괴가 된 건 아니야. 맞으면 타격은 여전해. 그러니까 방패의 이점을 살려야 하는데......'
포위당하면 방패도 의미가 없다. 특히나 등을 지켜줄 기사들이 이렇게 지쳤다면.....
순간 머리를 스치는 건 기마전술이었다. 기마병으로 적군 주위를계속 빙글빙글 돌아서 병력을 갉아먹는 방법.
그 방법을 택하면 포위당할 일이 없다. 꽤 적절해 보였다.
"간드아아아!!"
50kg짜리 방패를 앞세우고 돌진! 아까처럼 중앙을 파고드는 게 아니었다.
도리어 상대의 가장자리를 노려서 테두리를 갉아먹는다. 이렇게 몇 바퀴를 돌면 전투는 끝나 있으리라.
나를 주시하던 히폴리타 측 기사는 재빨리 지시했다.
"할버드!! 할버드를 휘둘러서 저지하라! 장창은 땅에 박아. 기마병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예!!"
마치 기병 돌격을 막는 것처럼 땅이 고정한 장창이 보였다. 할버드는 중력과 근력을 이용해 매섭게 날아온다.
물론 이 모든 건 의미가 없었다.
꽈아앙ㅡ. 할버드가 방패를 때리더니 속도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다른 병종도 마찬가지.
사기급 방패와 힘의 조합은 무기의 사정거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창이 부서지고 병사가훨훨 날아간다.
"끄아아아!!"
"괴, 괴물....."
이런 소리를 들으며 방향을 틀었다. 중심으로 가는 게 아니라, 테두리를 타고갉아먹는 거다.
바깥쪽에 위치한 병사와 차례대로 충돌했다.
"에이잇!! 커헉...."
검을 휘두르던 놈이 방패에 찍히고 헛구역질을 한다. 전쟁의 영웅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내가 몇이나 퇴장시켰을까. 적어도 스물을 넘겼다고 생각할때였다.
'이대로만 가면.... 된다!!'
"다들 버텨라!! 너희가 중앙에서 버티면 난 바깥을 갉아 먹겠다!"
"예!! 천인장님 믿습니다아!"
단합된 대답. 지쳤어도 눈빛은 살아 있었다.
여기사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며, 가장자리를 계속 갉아먹는데 갑자기 묵직한 힘이 느껴졌다.
쿵ㅡ
"음?"
방패 너머로 확인되는 건 덩치가 상당한 기사였다. 어디서 주웠는지 대형 방패를 든 상태.
녀석은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제 뒤로는 못 보내드립니다!!"
"할 수 있다면."
방패에도 기술은 있다. 방패술이란 것으로 적절히 흘려내는 법이나, 방패로 공격하는 방법 따위를 배웠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피지컬이 뒷받침되었을 때의 이야기. 각성한 지금은 기사조차 신체 능력으로 압도했다.
쿵-쿵-. 연속적인 충돌음이 퍼진다.
그럴 때마다 덩치 좋은 기사는 몇 발짝이나 튕겨 나갔다. 기민한 발놀림으로 다시 자리를 잡기는 했다만.
"크흐으으, 못 보냅니다!"
"다섯 번은 버티겠냐?"
충돌할 때마다 방패로 느껴지는 저항이 줄어든다. 난 확신을 가지고 돌진했다.
‘크게 한 방을 먹이고......’
그렇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순간, 어디선가 파공성이 들렸다.
쐐애애액ㅡ
불길한 소리. 화살 따위를 예측할 능력이 없음에도 등골이 서늘했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퍼억-. 묵직한 충격이 등허리를 타고 퍼진다. 예상도 못 한 원거리 공격.
"구, 궁병은..... 아까합류했을 텐데?"
내 머릿속엔 혼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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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폴리타는 초조하게 팔짱을 꼈다.
"조금 전에 말이지."
"예."
"제스 홀란트가 달라진 거 같은데, 잘못 본 거야?"
"아닙니다.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아. 히폴리타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니까 힘을 숨겼다는 거지? 실력을 감추고 있다가 갑자기 드러냈다, 이 말이야?"
"아마도 그렇습니다."
"혹시 전투 도중에 깨달음을 얻었을 확률은?"
히폴리타의 수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도 나름대로 안목이 있었다.
"깨달음을 얻으면 움직임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무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니까요. 그런데 천인장은 움직임은 여전히투박하면서, 단지 힘만 늘어났습니다."
"비장의 한 수가 있으셨다?"
크킄. 어이가 없다. 히폴리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혹시나 발악하는 기사가 있을까 봐, 궁병을 숨겨놓기도 했다.
갑옷 위에 화살을 쏘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일부러 강궁에 묵직한 화살촉을 만들어 둔기처럼 만들기도 했고.
'각성하는 기사가 나와도제압할 수 있게 말이에요. 그런데 제스, 당신은 제압되질 않네요?'
그의 충직한 여기사들은 하나씩 무너졌다. 진검을 쓰지 못하는 기사는 확실히 약하다.
그런데 제스 홀란트는 전투 초기보다도 펄펄해 보였다. 이때까지는 정말 장난이었던 것마냥.
히폴리타는 초반에 생각했던 걸 떠올렸다.
'제스, 그대는 내 지략에 용맹으로 맞섰죠. 멍청한 판단인 줄 알았는데...... 개인의 실력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물론 그녀의안배는 끝난 게 아니었다. 몇 가지 사소한 작전이 더 있었다.
지금처럼 다들 지쳤을 때로 쓸 수 있는 작전이.
하지만 그게 의미가 있을까?
"후우, 정말 최선을 다하고도 패배하는 게 오히려 꼴사납죠."
"예?"
"너한테 한 말은 아니야."
"아......
히폴리타는 전장을 그저 바라봤다. 기사 몇몇이 그녀 쪽을 자꾸만 확인한다. 준비했던 걸 펼치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히폴리타는 고개를 저었다.
"지시를 내리시지 않는 겁니까?"
"응. 굳이......"
그녀가 설명하려는 순간이었다. 서로 신뢰를 쌓은 기간이 짧아서일까.
히폴리타 측 기사는 참지 못하고 안배를 실행했다.
갑자기 그물을 꺼내서 여기사에게 던지는 녀석. 여기사는 당연히 칼을 휘둘렀지만,그물이 잘리지 않았다.
'연습용 검이니까.'
그리고 그물에 걸려 허우적거리던 여기사는 곧 퇴장.
그걸 본 히폴리타 측 기사들은 너나 할 거 없이 다들 그물을 던졌다. 성공률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제스 홀란트의 여기사는 몇 남지 않았으니까. 줄줄이 퇴장하는 여기사들.
"공녀님!! 승기를 잡았습니다! 역시 공녀님의 안배는......"
"하아아, 멍청한 것들."
그런데도 히폴리타는 눈을 감싸고 한탄할 뿐이었다.
분명 생각했던 전술이 잘 먹혔다.기뻐해야 마땅할 상황인데? 히폴리타의 수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공녀님, 어째서 기분이......"
"결국 패배할 거다."
"예?"
"아둔한 것아, 이번 모의전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르겠냐. 여기사를 얼마나 줄이던 상관 없다."
히폴리타는 제스 홀란트를 가리켰다.
"저 남자를 잡지 못하면 결국 패배한다."
지금 한 짓은 발악일 뿐이고.
그녀는 처절한 패배자라는 현실에 깊게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