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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화 〉드디어 한 걸음(2) (43/111)



〈 43화 〉드디어 한 걸음(2)

포상이면 뭐 섹스라도 하자는 건가?
볼에 한나 누나의 입술이 스친다. 찰나의 뽀뽀. 난 인상을 쓰며 한나 누나를 밀어냈다.

"됐어. 뭣보다 같은 핏줄인데 왜 자꾸 들이대는 거야?"
"으으음,  진짜 몰라서 그래?"

내가 어이없어야 하는데, 오히려 누나가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뭐지, 같은 가문에 같은 핏줄 맞을 텐데....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한나 누나는 피식 웃었다.

"정말 모르는구나. 보통 귀족 여자는 가문에서 20살에 쫓겨나지. 근데 난 몇 살에 나왔지?"
"어..... 18살?"

듣고 보니 그랬다. 한나 누나는 18살에 가문을 나섰던 것이다. 이후로 10년을 나가서 살았고.
분명 이상한 거였는데, 당시 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쌍심지를 켜는 한나 누나.

"나랑 그렇게 친했으면서 이유도 알아보지 않은 거야?"
"어....... 누나가 웃으면서 나가길래 잘 살겠다 싶었지."
"하, 날 대체 어떻게 생각했길래?"
"그게......"

누나에게 가졌던 감정은 딱 우정이었다. 가족애라고 하기엔 가족이 너무 많다. 그냥 가문을 휘저으며 같이 놀았던 친구.
이게 한나 누나한테 가졌던 감정이다.

'그러니까 가문을 나간다고 해도 엄청 슬프진 않았지. 친구랑 헤어진다고 우는 사람은 없잖아?'

다만 이걸 그대로 말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 같았다. 누나는 옛날과 달리 충분한 무력을 갖추고 돌아왔다.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 소중한 친.... 가족이었지."
"그게 가족이 아니라니까!!"

버럭 소리 지르는 한나 누나. 난 움찔 놀라고 말았다. 가족이 아니다.....? 그럼 매일 홀란트 가문이라고 내세우던 건 대체....

"하아, 들어. 난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서 쫓겨난 거야."
"뭐......?"
"하멜 홀란트의 자식이 아니라고."

씨발, 뭔 소리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니라니. 귀족 가문에서 어머니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귀족 가문의 가주는 첩이 많다. 자식 20명을 낳아야 아들 1명이 나오니까그랬다.

'그럼 아버지 자식이 아니면..... 그냥 가문 사람이 아닌 거잖아?'

한나 누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가 다른 남자랑 자서 낳은 자식이 나였던 거야. 그게 밝혀져서 추방당했지."
"어..... 용케 안 죽었네?"
"이게!!"

용케 안 죽었다. 패드립 같지만 사실이었다. 다른 남자랑 잤다는 건 간통이니 당연히 처벌받는 거다.
한나 누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정확한 사정을 말하긴 어렵지만 말이야. 그 '다른 남자'라는 사람이 보통 남자는 아니었던 거지."
"그니까 누나의 진짜 아빠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죽지 않고 추방으로 끝났다?"
"정확히 이해했네."

대단한 사람이라. 어디 군소 귀족은 아닐 거다. 이때까지 내 행보로 알겠지만, 우리 가문은 조그만 귀족가 따위는 짓뭉개버릴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아버지가 참은 거지......'

게다가  이 사실을 몰랐다. 앨리스나 에델도 몰랐고. 즉, 꽤 비밀리에 진행된 추방이라는 거다.
난 헛웃음을 흘렸다.

"허허..... 누나는 어머니도 나랑 다르잖아? 아예 유전자가 안 겹치네?"
"아무튼!! 자꾸 나한테 핏줄을 들먹이지 말라고!!"

한나 누나는 말을 두무룽실 뭉겠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꽉 붙잡는다.

"우리 귀여운 동생. 사정도 밝혔으니까 뽀뽀해줄까?"
"됐어!! 뽀뽀는 무슨....."

친누나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도 여전히 거부감은 있다. 이때까지 친누나로 여겼는데, 갑자기 감정이 바뀔 리 없는 것이다.
누나랑 투덕대는 와중,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 힘 센 도련님. 상품은 뭘 고를 겁니까?"
"아."

나 팔씨름에서 이긴 거였지. 누나가 하도 날뛰어서 잠시 깜박했다.

'그나저나 이런 사정을 대로변에서 말해도 되는 건가? 10년 전의 일이라고 해도......'

난 한나 누나를 슬쩍 바라봤다. 평소처럼 누나의 대책 없는 행동일  알았는데, 아니었다. 도리어 주위를 확인하며, 만족스러워하는 반응.
마치소문이 퍼지길 바라는 눈치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중년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상품은 팔씨름 전에 말했잖아.  피를 좀 뽑아간다고."
"그, 그건......"
"걱정하지 마. 얼마 뽑지도 않을 거야."

난 헌혈을 떠올렸다. 남자 기준으로 400ml. 이 중년 사내는 건강하고 몸집도 상당하니 500ml쯤은 괜찮을 거다.

'몸무게랑 혈액량이 비례하니까.'

난 에델에게 물었다.

"에델, 보존 용기 있어?"
"저를 만물상자 취급하시는군요."
"그래서 있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지니고 있었다. 에델은 가방에서 강철통 하나를 꺼냈다. 마법진이 새겨진 종류다.

"부패를 느리게 해주는 용기입니다. 보관 기간을 10배까지 늘릴 수 있습니다."
"좋아."

강철통을 들고 중년 사내에게 다가갔다. 얼굴이 살짝 질리는 사내.

"너, 너무 큰  아닙니까?"
"건강에 해롭지 않을 정도로만 뽑는다니까. 나 신분도 확실한 사람이야."
"그래도 무서운....."
"에잇!!"

덩치답지 않게 자꾸 쫑알거려서 귀찮다. 나는 중년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팔을 쥐었다. 에델에게 눈짓하자 그녀는 알아서 중년 남자의 정맥을 그었다.

촤악- 졸졸졸-. 피가 흘러서 강철통에 담긴다. 저게 전부 양기였다. 여자한테는 적당한 수준의 보약쯤 되리라.

'헤르파한테 먹이면 효율은 더 좋고. 맛이  없어도 참아라.'

언제까지 내   방울로 키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식으로 성장 속도를 가속해야 했다.

"읍!! 읍!!"

제압당한 남자는 몸을 뒤틀었지만, 어느새 한나 누나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셋이 둘러싸서 피를 뽑아낸다.

'겉으로만 보면 납치단인  알겠네.'

졸졸졸-. 500ml는 눈대중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피가 적당히 모여서 500ml를 확실히 넘었을 때, 입을 열었다.

"좋아, 이제 그만."
"예."

꾹 누르고는 포션을 뿌려 지혈한다. 중년 사내는 조금 헤쓱해진 인상이었다.

"피, 피를 뽑아가는 귀족이라니요....."
"뭘 그렇게 놀라냐. 이렇게 알뜰하게 살아야 부자 되는 거야."
"아, 예...."

난 네크라는 중년 사내의 등을 팡팡 쳤다.

"고마웠어!! 덕분에 기운의 컨트롤도 익히고, 피도 얻고 말이야."

떨떠름하게 알았다고대답하는 중년 사내. 우리는 왁자지껄 떠들며 진지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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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자 밤이 꽤 깊었다.
해는넘어간 지 오래고, 이미 다들 자고 있을 시간. 본래라면 훈련 끝에 잠든 병사들을 내버려 두는  맞지만......

'시간이 없어. 오늘 말을 해놔야 내일부터 따로 훈련에 들어가지.'

모의전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승리를 거두기 위해선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나는 텐트를 돌아다니며 서약을 파기한 가문의 기사를 찾았다.

에델이 안내해줘서 헛걸음하는 일은 없었다. 오릭스 가문의 문장이 꽂힌 천막에 들어간다.
스무  가량의 여자 병사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하나도 꾸미지 않은 날것의 매력이 돋보인다.

코오오-

미세하게  고는 소리가 들린다. 다들 씻은 것 같기는 한데, 체취가 강하게 풍겼다.

'녹초가 됐을 텐데 신경 써서 씻을 시간은 없었겠지.'

나는 그중에서 기운이 가장 강한 여자를 톡톡 건드렸다. 전신에서 은근한 양기를 풍기는 채로.

"이봐, 이봐."

작게 속삭이자, 부스스하게 눈을 뜨는 병사.

"누구.... 처, 천인장님?"

녀석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몸을 가리진 않았다. 무방비한 신체가 잠옷 너머로 얼핏 보인다.
 단련되어 군살 하나 없는 몸매. 어깨는 앨리스보다 훨씬 널찍한 것이 신체 단련에 집중한 듯하다.

"잠시 할 말이 있다. 조용히 나와라."
"저, 저희 둘이 말입니까?"
"밖에 내 부하도 있어. 둘만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

미세하게 실망한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는 조용히 천막을 나왔다.
체취가 사라지고 밤공기 특유의 상쾌함이 코를 찌른다. 병사는 허름한 잠옷 하나를 걸친 채 순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게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다가  뱉었다.

"이제부터 나를 모셔야 할 거야."
"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올려다보는 녀석은, 꽤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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