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고급 회의장
성수 소동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사건 이후로 병사들은 내게 더더욱 신뢰들 보내게 되었다. 물론 내 침이 진짜 성수냐? 아니냐? 에 대해서는 의견이 좀 갈렸다.
'직접 보여줬다고 해도 100% 믿기는 어렵지. 너무 말이 안 되니까.'
난 그래서 내 침에 특별한 효능이 있을 뿐이지, 진짜 성수는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병사들은 그것도 대단하다면서 날 찬양했고.
덕분에 에델, 앨리스, 한나 누나와 넷이서 모여 이런 회의를 열어야 했다.
한나 누나가 즐거운 듯 입을 연다.
"자아아!! 지금부터 제스 홀란트의 침을 성수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겠습니다아!!"
"쉬잇, 조용히 좀 말해."
"왜애? 어차피 근처에 아무도 없어."
큭큭대는 한나 누나. 그에 비해 앨리스는 심각한 얼굴이었고, 에델은 별 생각 없어 보였다.
"앨리스 경, 방법이 있는 것 같아?"
"생각나지 않습니다. 애초에 도련님이 치료하셨을 때 진짜로 놀랐습니다."
"그걸 속았어.....?"
"예, 다친 병사에게 집중한 터라...."
하기야 다친 병사만 보고 있었다면, 내 속임수를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다. 비록 내 뒤쪽에 있어 보기 쉬웠다고 해도.....
다른 사람의 시선에 에델에게 쏠린다.
"에델, 넌 어때?"
"이게 어려운 문제인가요?"
별것도 아니라는 반응. 우리는 눈을 반짝였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결국 제스님은 포션으로 두 번을 속이신 거잖아요?"
"그렇지."
"아예 전문적으로 사기를 치면 됩니다. 포션을 옷자락에 숨기는 거예요."
"유리병을 어떻게....."
"방법은 많습니다, 제스님."
에델은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잡동사니처럼 보였는데, 잘 보니까 자그만 가죽 주머니, 미니어처 같은 물통 등 일종의 '보관'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뭐가 좋으십니까?"
"그...... 포션을 여기 넣어 다니라는 뜻이지....?"
"이해는 빠르시군요. 옷에 부착하든, 입에 넣고 다니든, 항상 사기 칠 준비를 하시는 겁니다."
난 잠시 말을 잃었다. 그냥 장난 좀 쳤던 건데, 졸지에 전문 사기꾼이 되게 생겼다.
그런데 환장하겠는 건, 아주 끌린다는 점이었다. 한나 누나도 작은 가죽 주머니를 들고 폭소했다.
"으하하!! 이거 뭐야? 옷 안쪽에 넣고 있다가, 쭉 찢어서 씹으면 끝인데? 우리 동생이 진짜 침으로 사람 고치게 생겼어."
"하아..... 이걸 해야 하나."
"그래야지. 제스야, 잘 생각해. 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거야."
맞는 말이었다. 이미 사기를 쳤으니 끝까지 밀고 가야 한다. 방법은 오직 최대한 정교해지는 것뿐이리라.
나는 자그만 가죽 주머니를 들었다. 대충 손톱 크기로, 포션도 진짜 미량이 들어갈 거다.
"여기에 최상급을 담아야겠네?"
"바로 준비할까요?"
"......해줘."
내가 최상급 포션을 건네자, 에델은 그걸 받아서 아주 조심스레 가죽 주머니에 담았다. 저거 진짜 비싼 물건이다.
'내가 평소엔 중급 포션만 쓰는 이유가 있지. 중급 위쪽은 너무 비싸니까.....'
가죽 주머니를 봉합한 에델이 내게 다가온다. 당황하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고, 상의를 젖혔다.
"지금 꿰매겠습니다."
".....계속 이옷만 입게 생겼네."
"감수하십시오."
단벌 신사라. 절약 측면에서 나쁘지 않았다. 가죽 주머니 때문에 손빨래가 필수라는 점은 별로였지만.
에델의 정교한 바느질이 계속된다. 겉으로 보면 전혀 티 나지않았고, 마침 옷도 갈색이라 안쪽에서도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다.
흐읍-
미세한 숨소리가 들린다. 참았던 숨이 터진 모양.
그러고 보니 에델과 했던 키스가 떠올랐다. 천 명 앞에서 도발하듯 덮친 입술.
"맛있었어, 에델."
"큽...!!"
잠시 멈춘 에델의 바늘. 그녀는 이내 바느질을 재개하며 말했다.
"방해하지 마십시오, 제스님. 중요한 작업입니다."
"알았어...... 근데 오랜만에 옛날 생각났어."
에델의 손놀림이 느려진다. 뭐 이런 정도로 실수할 위인은 아니다.
"그땐 에델한테 매일 같이 자자고 했는데 말이야."
".....지금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이유를 몰라서 그래?"
"......"
에델은 입을 다물었다. 적막 속에서 바늘과 실만 움직인다.
그때 한나 누나가 분위기를 깨버렸다.
"뭔데, 뭔데? 나 진짜 궁금한 거 못 참는다?"
"아....."
분위기 좋았는데. 내가 입맛을 다시는 동안, 에델은 차갑게 대꾸했다.
"가문 외인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야!! 나 한나 홀란트야. 성씨가...."
"지금은 고용된 용병일 뿐이지요. 게다가."
에델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가문을 나가고 5년 동안은 기록이 없더군요. 그러다가 5년 후에 갑자기 B급 용병이 되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어..... 용케 알았네?"
"홀란트 가의 정보력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한나 누나가 5년 동안 수련한 건가? 그래서 단번에 B급으로 시작?
에델의 말을 들으면 그런 단순한 사정은 아닌 거 같았다. 한나 누나도 드물게 가라앉은 분위기였고.
탁-
"끝났습니다, 제스님."
"오!!"
난 짐짓 쾌활한 척했다. 실제로 에델의 바느질은 완벽해서 가죽주머니가 완벽히 숨겨졌다.
"흐흐, 이제는 누가 치료해달라고 해도 자신 있게 나설 수 있겠어. 옷을 찢은 다음에 잘근잘근 씹으면 포션이 나올 거 아니야?"
"축하드립니다. 인간 이상의 무언가가 되셨군요."
에델의 목소리였다. 묘하게 비꼬는 말투인데 지적하기도 뭣하다.
난 괜히 눈을 돌렸다.
"흠, 회의는 끝인가?"
"제가 의논드릴 게 있습니다."
"앨리스 경?"
"예, 곧 치러지는 모의전에 대한 사항입니다."
앨리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몇 가지를 물었다. 난 능력껏 대답하고, 능력이 부족한 부분은 앨리스에게 일임했다.
"나머지는 앨리스 경한테 맡길게!!"
"예? 하, 하지만 150명이 맞붙는 전투입니다. 전술은 반드시 필요할....."
"상대는 체링겐 가문의 신동이야."
난 히폴리타를 떠올렸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녀는 나를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다. 아마 능력을 100배쯤 부풀려서 보는 것 같다.
'아니, 0에다가 뭘 곱해도 늘어나지는 않지...... 따지자면 더하기인가.'
아무튼 그런 히폴리타니까 분명 대비를 많이 해둘 거다. 어설프게 전략을 쓰려고 했다가는 도리어 당할 확률이 높았다.
난 앨리스에게 말했다.
"우리는 우직하게 간다."
"그렇다는 건....."
"실력. 전략을 아무리 짜봐야 실력 차이 앞에서 장사가 없다는 걸 알려줘야지."
"으으음......"
앨리스의 신음이 흘러나온다. 무슨 생각인지는 뻔히 보였다.
"도련님. 외람된 말이지만, 사실 그 정도 실력 차이를 내기는 힘듭니다....."
"나도 알지."
전략을 무시할 수 있는 실력 차. 그걸 부대 전체에서 만들긴 힘들었다.
하지만 국소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난 싱긋 웃었다.
"앨리스 경, 일단 기본적인 전술만 훈련시키고 있어. 대형을 짜고 싸우는 것 말이야. 절대 무너지지 않는 거에 집중해야 해."
"알겠습니다!!"
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선, 믿음직한 녀석들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오늘 내게 충성을 바쳤던 자유기사들처럼.
'기사..... 좀 더 섭외해야겠어.'
내일은 조금 바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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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는 일부러 얼굴을 꽁꽁 감싸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요즘 들어 하루하루 심해지는 병사들의 반응 때문에 맨얼굴로 나가기가 무섭다.
보통 병사들이 쓰는 천막을훑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다들 자리를 비운 상태.
히폴리타 쪽도 열심히 훈련시키는 모양이다.
옆에는 에델을 대동한 상태였다.
"에델, 여기서 세력이 특별히 약한 가문은 없나?"
"많습니다."
"목록 좀 줘."
에델이 서류에 표시를 하더니 내게 건넨다. 절반 이상이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다.
"흠.... 여기서 실바처럼 꼬실 수 있는 기사는?"
"그것까지는 알아내기 힘듭니다, 제스님. 기사들의 개인사니까요."
"하기야."
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숫자를 생각해봤다. 적어도 기사 열댓 명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실바한테 물어봐서 캐내야 하나? 한참 고민하는 중이었다.
이상한 놈이 눈에 들어왔다.
"응? 저거 뭐냐?"
약간 얼빵하게 생긴 남자였는데, 입은 옷으로 봐서는 귀족가 자제다. 옆에는 호위 둘을 대동한 채였다.
녀석은 천막 위의 깃발을 보며 길을 찾는 중이었다.
"에델. 오늘 누가 방문한다는 말 있었나?"
"없었습니다."
"흠, 내가 아니라 병사를 찾아왔다는 거지?"
무슨 일일까. 난 재빨리얼굴을 감싼 천을 풀었다. 멀끔한 면상을 드러내며 느긋하게 걸어간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내 차림을 훑는 녀석.
"그.... 지휘관이신가?"
"맞다. 부대를 맡은 천인장이자, 홀란트 가문의 삼남이지."
녀석은 잘 됐다는 듯 훅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자 다크서클이 짙게 깔려있다. 옷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났다.
"아아, 반갑습니다. 전 옥시 가문의 디펜 옥시라고 합니다."
"부대를 찾아온 용건은?"
"그게..... 내 부하와 할 말이 있어서 말이죠."
"네게 더 이상 지휘권은 없다."
디펜 옥시라는 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지휘 같은 건 상관없는데..... 급전이 좀 필요해서 말이죠."
"급전....."
급전이라는 단어, 그리고 녀석의 태도와 꼴을 보고 확신했다.
'이 새끼, 도박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