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이제는 내 기사(3)
"왜나를 핍박하는 것이오!!"
멜팅 남작가의 차남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적잖이 억울한 모양이다.
'씨발, 인생 날로 처먹다가 한번 당하니까 견딜 수가 없나 보지?'
인생 날로 먹는 건 나도 똑같았다. 하지만 난 최소한 자각이라도 있다. 예를 들어, 앨리스가 '도련님은 정말 쓰레기 같습니다.'라고 한다면 겸허히 인정하리라.
그런데 이놈의 자식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네가 저지른 범죄는 생각나지도 않냐? 실바 말을 들어보니까 불법 도박장 관리에, 영지민 납치도 하고, 상인이랑 담합해서 고혈까지 빨아먹었네."
"그, 그 정도는 통치자의 당연한 권리지!! 고작 사소한 잘못으로 날 핍박하려 든다면...."
"든다면?"
차남이라는 놈은 눈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외쳤다.
"아버지께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오!! 우리 가문은 근처의 텐더 가문과도 사돈 관계요!!"
"텐더?"
들어본 적도 없다. 뭐 사돈이라는 거 보니까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결혼한 모양이다.
난 비죽 웃고 말았다.
"지, 지금 비웃은 건가!!"
"아니, 존나 웃기잖아. 니네 영지민 만 명도 안 되지? 그러면 사병은 몇 명이나 되냐?"
일반적으로 상비군은 인구의 1%미만. 판타지 세상이라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있다고 쳐도, 1%를 넘는 경우는 잘 없었다.
'영지민이 만 명이라도 사병이 100명 아래지. 근데 만 명 아래, 수천 명이면?'
내 예상으로는 50명쯤 될 거 같았다.
"한 50명쯤 되나?"
"너, 넘는다!!"
뒤에서 실바가 정확한 숫자를 알려준다.
"55명입니다. 훈련을 열심히 하는 놈은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다같이 썩었다는 거네?"
오합지졸 55명. 거기에 실바를 빼면 허접한 기사 둘.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돌려봤다.
"흠, 멜팅 남작가라고 그랬지. 내 생각엔 백합 기사단원 3명이면 너희 가문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털어먹을 거 같은데. 넌 어떻게 생각하냐?"
"배, 백합기사단? 어, 어......"
"친한 가문이 있다고? 거기까지 쳐서 백합기사단 6명이면 가문 두 개를 멸문시키고도 남겠네."
"......"
"아버지께 말해서 뭘 어쩐다고?"
녀석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당장 내가 끌고 온 병력이 녀석 가문 전력의 3배를 넘는 셈이니까.
난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부스럭-부스럭-. 주변 천막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암만 밤중이라고 해도, 이 정도 소란이면 다들 깨어났을 거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전부 네 잘못 때문이야. 네가 행동만 똑바로 했어도, 서약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고. 알았어?"
"하, 하지만...... 가문에 셋뿐인 기사를......"
"그건 내 사정이 아니지. 뭣보다 실바 스스로 질려서 떠나는 거니까."
실바를 돌아보자 그녀도 입을 열었다.
"리암님, 그간 정말 더러웠습니다. 당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거에 행복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년이!! 귀족을 등에 업었다고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으냐!!"
실바는 말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기사 서약서. 저걸 서류로 작성하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데 작성한 모양이다.
가차 없이 찢어버리는 그녀.
촤아악-
"당신 것도 찢으십시오."
"싫다!! 내가 왜 내 손으로...."
발악하는 남자의 얼굴에 때가 낀 장갑이 날아간다. 던진 사람은 실바. 전 주인에게 결투 신청을 한 것이다.
"결투? 네, 네년이....."
"더 이상 당신을 모시지 않습니다. 서약서를 찢지 않으려면, 결투를 하죠. 물론 멜팅 가문에 날 이길 기사는 없겠지만."
"이이......!!"
멜팅 남작가의 차남의 얼굴은 타오를 것같이 붉게 물들었다. 이성을 잃었는지 주변 집기를 마구 때려 부수는데, 신기하게도 나와 실바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분노조절잘해.
침구를 막 박살 낸 녀석은 한참 씩씩거리다가, 서류를 품에서 꺼냈다. 그러고는 찢어발긴다. 조각조각. 아주 흔적도 남지 않도록.
"됐냐!! 됐어?"
"깔끔하네."
난 실바의 어깨를 감쌌다. 모르긴 해도 전 주인을 버렸으니 심적으로 흔들릴 거다. 실바는 자연스럽게 내 품에 얼굴을 기댔다.
"저, 저년... 내가 꼬실 때는 눈길도 주지 않았는데!!"
"조용히 좀 해라. 다른 사람도 자야 할 거 아니냐."
그리 말하며 뒤돌았다. 녀석에게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는 밤이겠지만, 나에겐든든한 맹장 하나를 얻은 순간일 따름이다.
등 뒤에서 성난 목소리가 들린다.
"제스 홀란트!!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오늘의 복수를 해주마!!"
"흠..... 그래."
죽일까?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아니었다. 명목상으로는 아군. 저놈을 지금 죽이면 배신이 돼버린다.
'후환을 남기는 건 찝찝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폐급 인생을 살던 놈. 원한을 가져도 체계적인 복수와는 거리가 멀 거다.
내 천인대가 있는 진지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서, 실바는 조금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천인장님, 저 녀석이 복수를 외쳤는데 괜찮으신 겁니까? 제가괜히....."
"괜찮아."
무슨 말을 해야 적절할까. 가문을 믿는다? 너무 없어 보였다.
그보다는 격려와 신뢰의 표현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말. 이내 문장 하나가 완성되었다.
"너 하나의 가치가 저까짓 남작가보다 뛰어나다. 난 그렇게 믿어."
"......"
실바는 고개를 푹 숙이고 묵묵히 걸었다.
그녀의 두 주먹이 힘이 조금 들어간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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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나도 슬슬 안위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침에 병사 한 명을 붙잡아 방패술의 기본을 좀 익혔다. 물론 수련을 오래 할 리는 없었고, 딱 3시간만 했다.
날 가르친 우리 가문의 사병은 내 신체 능력에 놀라워했다. 기술은 초보자와 다를 게 없는데, 반응 속도와 힘이 대단하다는 거다.
"도련님이 방패에 조금만 익숙해지시면, 적군 속에 떨어져도 목숨은 부지하실 겁니다."
이런 칭찬까지 들었다. 그렇게 내 기준으로는 길었던 수련이 끝나고 적당히 쉬는 중이었다.
오후 시간, 점심과 저녁의 사이 즈음. 한나 누나가 내 천막에 슥 들어왔다.
"제스!! 우리 동생!!"
"아..... 무슨 일이야?"
"어제 기특한 일을 했다며?"
음? 기특한 일이라. 실바 따먹은 걸 말할 리는 없고, 실바 섭외한 걸 말하는 건가.
난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은 실력자였고, 꼬시기 쉬웠어."
"벌써 소문이 다 퍼졌어!! 악한 주인에게 고통받던 기사, 천사 같은 천인장이 구원하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구, 구원....?"
구원처럼 거창한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단지 전력 보강을 위한 거였는데.....
내가 당황하자 한나 누나는 호탕하게 웃었다.
"으하하!! 어제까지는 네가 탐스러운 열매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야."
"열매.... 그런데?"
"지금은 달라! 어떤 녀석들은 널 정의의 사도로 생각한다니까!!"
씨발, 단언컨데 정의의 사도 같은 일은 한 적이 없었다. 대체 뭐 때문에 소문이 그렇게까지 퍼지는.....
한나 누나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야, 니 얼굴을 봐봐. 그런 고급진 외모를 달고 부하한테 잘해주니까 정의의 사도가 되는 건 당연하지!!"
"하아아....."
부담스럽다. 이러면 진짜 내가 적극적으로 일해야 할 거 같지 않은가.
괜히 긴장해서 몸을 굳히는데, 한나 누나가 날 일으켰다.
"나가보자. 애들 반응이 궁금하지 않아?"
"그, 글쎄.... 굳이 알고싶지는...."
"에이, 빼지 말고!!"
날 쭉쭉 밀어버리는 누나. 이 힘에 대항할 도리가 없었다.
'제기랄, 나도 신체 능력은 기사급인데!! 그것도 평범한 기사는 넘었을 텐데.....'
결국 한나 누나에게 등 떠밀려서 훈련장까지 와버렸다. 그곳은 어제보다도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는데, 날 보자마자 모든 병사가 움직임을 멈춘다.
착-착-착-착-. 10초도 되지 않아서 모든 병사가 나를 향해 부동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일제히 경례.
농담 따먹기를 하던 모습과는 달랐다.
"추우웅성!!"
"어.....그래."
어제까지는 그래도 날 향한 욕망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욕망 7, 존경 3의 비율인 듯하다.
괜히 온 거 아닌가. 무슨 말을 했다가 이미지가 깨지면 어떡하지?
한참걱정하는데, 병사들의 시선이 자꾸 한곳을 향했다. 그들은 나와 실바를 동시에 힐끔거렸다.
"실바, 무슨 일 있었나?"
내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 외치는 그녀.
"천인장님!! 이 녀석들이 다른 건 믿는데 한 가지를 믿지 않습니다!! 보여 주십시오!!"
"믿지 않는다고?"
뭐지, 멜팅 남작가 차남을 혼내준 거? 아니면 나름 자상하게 대해준 건가.
뭐든 어렵진 않았다.
"보여주마. 뭘 말하는 거냐?"
실바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천인장님의 침이 성수라는 걸 믿지 않습니다!! 침으로 상처를 치료하셨는데 말입니다!!"
"치, 침.....?"
기억났다. 포션을 가지고했던 장난.
꿀꺽-. 부대를 돌아본다. 800명을 넘는 여자들이, 내 침으로 만든 성수를 기다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