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훈련
이틀 후.
"아아....."
나는 슬슬 다시 움직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가문에서는 몇 달이고 놀기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정말 귀찮기 그지없다.
사건의 시작은 남자 병사들의 의욕 저하였다.
왜 상품이 남자밖에 없냐는 거다. 솔직히 숫자가 적어서 신경을 안 쓴 거라서 내가 할 말은 없었다.
이것뿐이라면 며칠 정도 더 놀다가 움직였을 텐데, 그놈의 히폴리타가 가만있지를 않았다.
에델이 가져온 소식에 의하면 이랬다.
"히폴리타 체링겐이 남자 병사들을 하나씩 포섭하는 중입니다."
"제기랄......"
여자 병사들은 나한테 절대적인 충성을 보낸다. 마찬가지로 히폴리타나 남자 병사의 충성을 이끌어낼 수도 있었다.
'뭐 아예 지휘관 자리를 빼앗기는 건 괜찮아. 하지만 내가 천인장 직함을 유지한 상태에서 부대가 분열되면?'
전투에서 패배할 확률이 높아진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죽는 건 당연히 안 된다. 난 부스스한 머리를 털고 일어났다.
천막 바깥으로 나가자 에델과 한나 누나가 양옆에서 따라붙는다.
"제스, 내가 에델한테 말해준 거 들었어? 이번에 새로 온 참모 녀석, 보통이 아니야."
"흠..... 누난 용병이잖아."
용병의 눈에도 뭔가 보이나? 그런 시선을 보내자 한나 누나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그년 상관 잡아먹는 거로 유명해!!"
"어..... 꼬신다는 거야?"
"아니!! 걔를 부하로 둔 상관은 금방 한직으로 물러나거나, 걔한테 자리를 내준다니까!"
그 소리였나.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한나 누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뿐만이 아니야. 전쟁터에서 상관은 죽고 그년만 살아서 돌아온 적도 몇 번 있어!!"
"이건 문제네......"
내가 걱정하던 부분이었다. 차라리 히폴리타가부대 전체를 손에 넣으면 모른다. 그러면 자리를 내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미 여자 병사는 확실히 장악해버렸어. 올 거면 빨리 왔어야지.....'
히폴리타가 이제 와서 애쓴다고 해도, 부대를 분열시키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게 목적은 아니겠다만.
난 반대편의 에델을 돌아봤다.
"그래서 히폴리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데?"
"남자 병사를 모아서 독립적인 중대를 만드는 것 같습니다."
"중대? 상품인 18명을 빼면 150명쯤 되던가...."
독립 중대를 만들 순 있는 크기다. 흠, 대충 그림이 그려지는데.
"독립 중대는 시작일 뿐이겠네?"
"그렇겠지요."
"1000명인 부대에서 150명을 빼가서 실적을 올린다는 거지? 150명짜리 독립 중대한테 실적에서 밀린 나는 병신 취급 받을 거고."
"아마도요."
"소수의 병력으로 능력을 증명한다라..... 능력에 감복한 병사들은 결국 히폴리타를 따르고......"
이때까지 이런 식으로 상관을 잡아먹었나?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에델, 그걸 보고만 있었어?"
"......제스님이 전폭적으로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덕분에 히폴리타는 부대의 재산을 마음껏 쓰는 중입니다."
"아, 맞다."
한나 누나는 옆에서 바로 끼어들었다.
"그년, 호위기사도 한둘이 아니야."
"음?"
"네가 끌고 온 백합 기사단하고 비슷한 전력일걸?"
이건 계산에 없었다. 사실 당연한 거였는데.
'하기야 히폴리타는 체링겐 가문에서도 귀중하게 여기는 인재지. 호위가 많이 붙는 게 당연해.'
호위 기사가 어디 호위만 하겠나. 독립 중대의 작전에도 참여할 거다.
내가 생각해도 그녀의 계획은 성공할 거 같았다.
"기를 꺾어놔야겠는걸."
"......가능하십니까? 히폴리타 체링겐은 손꼽히는 신동입니다."
방법은 나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한테 밀리면 최종적으로는 내 죽음으로 이어질 듯했다.
'확률이 높아진다는 거지. 죽을 확률.....'
남자 병사를 찾아갈까? 아니다. 그건 크게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똑똑한 인간이니 확실하게 포섭했을 거다.
"내 편부터 살펴야지."
일단 나한테 충성하는 녀석들부터 보자. 그게 우선이다.
"훈련장으로 가자."
"예."
난 이틀 만에 훈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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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하나!! 둘!!"
"산개 진형을 취해라!!"
"예!"
일사불란하게 병사들이 흩어진다. 밀집대형이었다가 산개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800명이 넘는 인원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반짝이는 칼날과 턱 끝에 맺힌 땀방울.
단 이틀 만에 겪은 극적인 변화다. 난 새삼 감탄하며 앨리스를 쳐다봤다.
한나 누나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누나, 앨리스 경이 훈련도 잘 시키는 것 같지 않아?"
"뭐..... 나만큼 하네."
누나만큼? 암만 봐도 교관 체질은아닌데?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자 한나 누나는 이를 악물었다.
"야!! 내가 진짜 능력을 보여주면 너희 다 놀라서 자빠져."
"네네."
간단하게 넘기려는데, 누나의 표정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고 보니 한나 누나는 좀 지나치게 막나가는 구석이 있었다.
'올톰 시에서도 그랬지..... 다른 때도 겁을 먹은 적이 없어. 혹시?'
힘을 숨겼나? 하지만 어떻게?
누나는 10년 전에 가문을 나갔다. 그 사이에 S급에 가까운 A급 용병이 된 것도 놀라운데 거기서 뭐가 더 있을까.....
일단은 넘어갔다. 다른 일에 집중할 때다.
앨리스는 한참이나 훈련을 시키다가 휴식을 줬다. 내가 구경한 지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조금 지친 표정으로 걸어오는 앨리스.
"도련님, 성과를 확인하러 오셨습니까?"
"겸사겸사."
뒤에 있던 에델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했다. 차분히 들은 앨리스의 얼굴에 노기가 스친다.
"참모 주제에 도련님의 자리를 노린다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면 좀 거창한데..... 비슷하긴 하지."
"제가가서 암살하면 됩니까?"
"절대."
암살이라니. 앨리스는 아주 정석적인 기사였다.
즉, 잠입이나 은밀함 따위는 배우지도 않았다는 거다. 해봤자 정면으로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는 거겠지.
난 차분히 입을 열었다.
"일단 히폴리타가 150명을 포섭하는 건 그대로 둘 거야."
"예? 나름 유능한 인물이라고....."
"하지만 그 녀석이 만든 독립 중대를 깨부수면 그만이잖아?"
나쁘지 않은 생각이 떠올랐다. 난 싱긋 웃었다.
"내기를 제안할 거다. 우리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150명만 뽑아서 녀석의 부대와 대결하는 거야."
"모의전....입니까?"
"그래."
몇 배나 되는 숫자로 싸우는 건 당연히 치사하다. 그러니 숫자만 맞춰서 모의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내가 이기면 당연히 히폴리타의 콧대가 꺾일 테고.
"흐음, 지원자를 받아야겠군요."
"앨리스 경, 가까이 와봐."
차분히 걸어오는 앨리스. 난 그녀의 귀를 잡고 끌어당겼다.
"무작위로 뽑는 척하면서 실력 좋은 놈들만 골라."
"눈치채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평균 실력은 남자 쪽이 좀 더 높잖아."
앨리스는 그제야 수긍했다.
강자 쪽으로 갈수록남자가 많아진다. 즉, 내 부대에서 남자만 뽑았으면 그 평균치가 높다는 거였다.
'물론 상위 150명만 선발하면 내 쪽이더 유리하지.'
이 정도는 히폴리타도 뭐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꽤 애매한 문제였으니까.
앨리스는 눈을 반짝이며말했다.
"도련님께 충성을 다할 녀석들로 선발하겠습니다!!"
"으음, 그래 당연하지."
또 중요한 게 있었다. 안 그래도 상품 때문에 미친 듯이 훈련하는 놈들이다.
난 퍼져서 휴식 중인 부대 앞으로 다가갔다. 거친 시선이 내게 꽂힌다.
"허억, 허억..... 천인장님....."
"노력하면..... 10등 안에만 들면....."
"키스 잘하시던데...."
헥헥대며 욕망을 표출하는 병사들. 쭉 봤는데, 좀 덩치 큰 녀석은 있어도 다행히 추녀는 없었다.
'원래 그런 세계잖아.'
150명끼리 맞붙는 모의전이다. 연습을 많이 해본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터.
난 간단하게 지시했다.
"다들 여섯 덩어리로 나누어져라!!"
여자 병사들은 총 856명. 6등분하면 대략 140명을 넘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 딱 비슷한 사이즈다.
어리둥절하면서도 일단 지시를 따르는 병사들. 확실히 충성심이 높아졌다.
거친 숨결이 훈련장을 가득 채운다. 따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방패를 든 녀석은 전열에, 칼을 든 녀석은 2열에 위치하는 등 체계가 잡혔다.
결국 여섯 덩어리가 된 천인대.
"지금부터 토너먼트를 시작하겠다. 너희 중에서 1등을 차지한 부대는......"
나와의 하룻밤 기회? 안 된다. 그러면 내 희소성이 너무 떨어졌다.
그럼 상품 부대를 내걸까? 이건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씩은 뽑을 예정이었으니.
"18명의 상품을 선택할 기회를 주겠다!!"
"와아아아!!"
데스매치.....는 아니지만 그 정도로 살벌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녀석들에겐 실전과 다를 게 없었을 거다.
'역시 본능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