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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히폴리타 체링겐 (28/111)



〈 28화 〉히폴리타 체링겐

히폴리타 체링겐.
제국에는 5대 공작 가문이 있었는데, 이들은 전부 합해서 제국 국력의 30%를 넘게 차지할 정도로 강대했다.

그중 체링겐 가문은 황제에게 충성하는, 소위 황제파 가문이었다. 그러니까 체링겐 가문의 신동이 전쟁에 참여했을 테고.

문제는 대체 왜 내 부대에 배정되었냐는 거다.
그녀는 내가 알 정도로 유명한 인재다. 즉, 고작  명짜리 부대에 묶이기는 아주 아깝다는 뜻.

'끄음, 게다가 따지자면 우리 가문이랑은 별로 친하진 않은데.....'

내가 속한 홀란트 백작가는 아버지의 무력으로 유명한 곳. 같은 무력 계열인 앙주 공작가와 친했다.
다른 공작 가문과는 데면데면한 사이였고, 특히 황제파인 체링겐 가문과는 사이가 별로다. 하필 거기서 배정되다니.

내 곤란한 표정을 읽었는지, 히폴리타는 과감하게손을 내밀었다.

"여긴 전쟁터입니다. 가문끼리의 친분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하하.... 그렇죠."
"특히 제스 공자님은 벌써 부대의 통합을 이루셨잖아요?"

히폴리타의 눈이 반짝인다. 부대 통합? 따지자면 성공하긴 했다.

'성욕으로대통합이라서 문제지.....'

난 얼떨떨하게 있다가 뒤늦게 그녀의 외모를 훑었다. 너무 의외의 인물이라 당연한 과정이 늦어졌다.

'머리는 분홍색. 이건 가문 특징이지. 눈은 순해 보이는 모범생 눈이네. 입술도 조금 작은 편이라 펠라할 때 쾌감은..... 아차차!'

노예를 보는  아니다. 참모로 들어온 귀족이었다. 그것도 우리 가문보다 강대한.
난 괜한 헛기침을 하고는 히폴리타에게 말했다.

"병법은  아십니까?"
"수도의 아카데미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죠."

이론은 만점인가.

"실전 경험은 있습니까?"
"후훗, 제스 공자는 정보가  느리네요. 이미 제가 고안한 작전이 몇 번이나 성공했답니다. 아린 평야 대회전 아시죠?"
"어.... 제국에서 대승을 거둔....."
"맞아요. 대회전의 세부 전략에 참여했죠. 나이치고는 꽤 겪었다고 생각해요. 슬슬 단독 부대를 맡아볼 때인데, 참모가 된 건 의외지만요."
"끄으음."

존나 대단한 여자다.
거의 내 눈높이까지 오는 큰 키만큼이나 공적을 많이 쌓았다. 진짜 나 대신 천인장을 맡아도 되는 거 아닐까?

난 3초 정도 고민하고 결정했다.

"좋아요, 그럼 우리 부대의 작전은 전부 일임하겠습니다."
"......?"

일순 혼란에 빠진 히폴리타. 그녀는 이내 냉철한 얼굴이 되었다.
싱글거리던 아까와는 전혀 다르다.

"후훗, 총사령관님께 들었지만 역시 보통은 아니네요. 한 문장으로 사람을 방심시킬 줄 알아요."
"아니......."

그놈의 총사령관!! 그 새끼가 문제다. 내가  귀찮은 자리를 떠맡게 된 근원!
난 얼굴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진심입니다. 전 병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니, 히폴리타 공녀에게 완전히 맡기겠다는 겁니다."
"......진짜로?"
"예. 말은 잘 들을 겁니다."

히폴리타는 묘한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입을 달싹이다가 결국 뱉는다.

"제가 부대를 장악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죠? 얌전히 시키는 일만 하는 인간은 아니랍니다."
"그쪽이 장악하면요?"

개꿀이지, 뭐. 능력 좋은 녀석이 나 대신 지휘관 노릇 하겠다는데.

그래도 보는 눈이 있어서 차마 말이 나오진 않았다. 뭣보다 체링겐 가문의 인간한테 그렇게 말하면 아버지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몇 초쯤 고민하는 척하다가 웃으면서 넘겼다.

"하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본능을 믿습니다."
"......?"

역시 고민 끝에 나온 말은 항상 괴상하다.  한숨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얼굴값을 하는 분이네요."

대가리로  영양이 전부 면상에 쏠렸다는 건가? 내가 생각해도 그렇긴 하다.

"일단...... 부대부터 둘러보시죠.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작전을  테니까."

모르겠다. 안내나 하자.
천막을 걷어내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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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뭔가 있다!!
제스 홀란트라는 남자에 대해 듣자마자 든 생각이었다.

히폴리타 체링겐, 그녀는 인생 자체가 탄탄대로였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핏줄 덕에 훌륭한 머리를 부여받고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체링겐 가문은 머리 쓰는 인재를 배출하는 것으로 유명한 곳. 그녀는  대표 격이라  여자였다.

워낙 어릴  능력을 증명한 덕에 가문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고.
엘리트 그 자체인 히폴리타의 소망은 하나였다.

'나에게 대적할 사람을 찾고 싶다!'

당장 그녀와 비슷하거나,  뛰어난 사람은 물론 있다. 하지만 히폴리타 자신이 20대라는 걸 고려하면, 다들 대단해 보이진 않았다.

전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론만 출중한  아니냐? 이런 의심을 짓밟으며 실적으로 증명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는 나날이었는데, 갑자기 총사령관에게 한 가지 연락을 받았다.

[자네와 맞먹는 인재를 찾은 것 같네. 평생을 웅크린 사자. 기대되지 않나?]

두근-두근-.심장이 뛰었다.
총사령관은 절대 무능하지 않다. 오히려 생각이 많고, 심계가 깊은 편이다. 그런 인간의 보장이니 확실하리라.

'나와 비견될 인재면..... 20대겠지? 남자? 여자?'

히폴리타는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다른 이유보다는 그녀의 눈에 차는 남자가없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천대받는 세상. 거기서도 능력으로 우뚝 선 그녀에겐대부분의 남자가 별로였다.

'힘만  바보들..... 무력에서야 우월하다고 쳐도, 머리가 좋은 거랑은 아무 상관 없잖아?'

드디어 동등한 인재를 본다. 그녀는 부푼 마음을 품고 제스 홀란트를 찾아간 거였다.
히폴리타는 우선 부대를 보자마자 살짝 경악했다.

'임명받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통합했어.....?'

총사령관조차 골치를 앓았던 문제 아닌가. 그런데 제스 홀란트라는 남자는 며칠 만에 해결한 것처럼 보였다.
미칠 듯이 훈련하는 병사들이 그 증거였다.

이건 진째베기다. 그녀의 기대감은 점점 커졌다. 마침내 그의 천막에 도달했을 때, 그의 하녀가 입을 열었다.

"제스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아주 무방비한 음성이다. 곧이어 들어가서 본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노예들은 옷을 반쯤 걸친 채 구석에 숨은 상태고, 제스 홀란트는 어벙한 표정이었다.

마치 대가리 텅텅 빈 귀족가의 폐급 자제 같지 않은가.

평생을 웅크린 사자라더니, 역시기만의 천재인가?

'쿠쿡, 이런 연기에는 넘어가지 않아요.'

히폴리타는 대화 중, 제스 홀란트를 대놓고 도발해 보았다.

"제가 부대를 장악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죠? 얌전히 시키는 일만 하는 인간은 아니랍니다."

만만해 보이면, 자신이 부대를 먹어버리겠다는 도전장. 그런데 제스 홀란트의 표정은 도리어 밝아졌다.

"하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전 본능을 믿습니다."

덤벼보라는 건가? 자신감이 넘쳐서?
히폴리타는 꽤 유명한 여자였다. 아카데미 시절에는 교수를 엿먹이는 거로 명성을 떨쳤고, 군에 들어와서는 상관을 집어삼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모를 리가 없어. 혹시..... 나와 같은 부류?'

자신처럼 무료했던 천재. 비슷한 수준을 만나길 바랐던 걸 수도 있다.
히폴리타는 제스 홀란트라는 남자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던 얼굴도 눈에 들어온다.

'저런 미모를 가지고 악명을 떨치려면 어지간히 고생했을 거야.....'

"얼굴값을 하는 분이네요."

히폴리타는, 제스 홀란트의 등을 보면서 조용히 다짐했다.

'이겨주겠어. 이 부대를 잡아먹어서 진짜 천재가 누구인지보여주겠어!!'

어떤 방해 공작을 펼쳐도 굴하지 않으리라. 그녀의 눈은 찬란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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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델!!"
"부르셨습니까?"

에구구. 일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능력 좋은 참모가 와서 다행이지. 난 노예의 가슴을 주무르며 멍하니 말했다.

"그 새로 온 여자 있잖아. 히.... 히폴리타!!"
"이름을 기억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를 뭐로 보고. 최소한 유명인 정도는 기억한다.

"그 녀석이해달라는 건 전부 해줘."
"어..... 야망이 있는 참모 같았습니다."

역시나 걱정을 표하는 에델. 나한테 해가 가면 어쩌냐는 거겠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어때? 야망이 있으면 좋지."
"그래도 전쟁터에서 제스님이 아니라, 그 여자의 명령을 우선시한다면......"

그런 확실히 문제가 된다.  부하는 어디까지나 날 지켜야 하니까.
 잠깐 생각하다가 갸웃거렸다.

"글쎄다. 걔네들 암만 봐도 '상품'은 확실히 지킬 것 같은데?"

내 부대는 성욕으로 움직이는 부대.
여자가 끼어들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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