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권속화
인정한다.
이 녀석들은 그간 표현할 방법이 없었을 뿐이지, 성(姓)에 누구보다 목말라 있었다.
'하기야 원래 수련만하던 놈들인데..... 남자랑 할 기회가 얼마나 있었겠어.'
문득 진지에 남아있던 남자 병사들이 떠오른다. 그들의 숫자도 대략 150에서 160은 된다.
무시할 병력이 아닌 셈.
'노예를 구해서 붙여줘야겠네. 여기랑 비슷하게 상품을 거는 방향으로.'
남자 병사와 기사들이야 평소에 여자를 그럭저럭 만났을 테니, 이 정도 효과는 없을 거다.
그래도 최소한의 훈련은 필요했다.
'일단 성별을 구분해서 부대를 편성해야지. 두 달이 지나면 조직력에서 차이가 클 거야.'
이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렇게 열심히 훈련하는데늘지 않을 수가 없다.
“흠.”
앨리스는 한창 훈련을 시키는 중이라 더 말 걸기 애매했다. 다른 백합 기사단원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그나마 한가해 보이는 사병을 하나 불러서 물었다.
"원래 앨리스 경이 집단전도 잘 알던가?"
"그러니까...... 모든 기사가 '원칙적'으로는 익혀야 합니다."
"원칙적이다, 그 말이지?"
바로 이해가 된다.
우리 원칙의 대명사 앨리스 경께서는 열심히 공부했을 거다. 그렇다면 기초적인 훈련은 가능할 거고....
그래도 전문 교관은 좀 데려와야겠어. 책사와 교관. 당장 필요한 거였다.
난 에델을 불러서윗선에 연락하라고 시켰다.
"에델, 우리 부대에 머리 쓰는 놈이랑, 훈련 담당하는 놈 좀 붙여달라고 그래."
"몇 명 요청하면 됩니까?"
"그냥 예쁜 애로?"
예쁘면 일하다가 꼬시기도 하고, 좋지 뭐.
그리 말하자 에델은 꾸벅 숙이고는 쪼르르 달려갔다. 천 명 앞에서 했던 키스 이후로 좀 더 살가워진 느낌이다.
“이제 뭘 하지.....”
훈련을 내가 시킬 것도 아니니, 이제 할 일이 없다. 멍하니 앨리스의 옆모습을 보는데, 누군가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런 짓 할 인간..... 아니 뱀파이어는 하나뿐인데.‘
확인하자, 역시나 헤르파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헤실헤실 웃는 헤르파.
"오빠..... 피가 고파요."
"또냐."
툴툴거리며 상처를 내주려고 하는데, 깜박했던 게 떠올랐다.
'맞다! 상품 부대 18명을 권속으로 만들어야지!‘
중요한 일이다. 저들이 상위권에 들어 '상품'을 얻었는데, 막상 상품의 태도가 불량하면?
바로 사기 저하로 이어질 것이다.
'추녀든 미녀든 간에 똑같이 대하도록 해야지. 이쪽 세계는 추녀가 딱히 없긴 하다만.....‘
교육으로는 불가능한 일. 본인 취향 여자가 아니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 수 있다.
난 헤르파를 이끌고 상품 부대 쪽으로 향했다.
"오빠....피는 줘야....“
"빨면서 따라와.“
손끝을 핥는 혀가 꽤 간지럽다. 혓바닥을 느끼며 걸었다.
상품 부대가 머무는 곳은 꽤 큰 천막이었다. 중요한 놈들이랍시고 특별 대우를 해준 셈이다.
'흠흠, 조금 불쌍한 놈들이기도 하고.‘
천막을 걷고 들어가자 상품 부대원이 전원 벌떡 일어선다.
”충성!!“
경례를 올린 녀석들은 불만 어린 얼굴로 눈치를 봤다.
"할 말 있냐?“
"천인장님..... 이런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다 제국을 위한 거야. 너희가 아니었으면 아직 훈련은 시작도 못 했어. 동료들이 죽는 걸 보고 싶나?“
"그건 아닙니다만...... 왜 저희입니까?"
그나마 상판대기가 나으니까. 괜히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나는 손짓으로 한 놈씩 불러냈다.
"자, 한 명씩 나와라. 근무조건을 협상해줄게. 너희들이 아주 만족할 수 있도록 맞춰주마.“
"정말입니까?“
"거짓말은 안 한다."
진짜로 저번에도 안 했다. 나랑 같은 보직, 상품 맞잖나.
다들 안색이 좀 밝아졌다. 가장 먼저 불만을 말했던 녀석이 따라 나왔다.
천막 안의 녀석들이 못 들을 거리까지 간 후, 난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야?“
"혹시라도 너무 우락부락한 여자가 절 선택하면..... 감당하기 힘듭니다.“
"역시."
그게 고민일 거다. 난 다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면서 천천히 각을 본다.
"자, 나 때는 말이야......"
"제가 서른 넘었는데, 저보다 나이 많으십니까?"
"쉿!! 그러니까......."
대화에 완전히 집중한 녀석. 난 어깨를 두드리던 손을 재빨리 휘둘렀다.
퍼억. 턱에 명중. 신체 능력 하나는 뛰어난 덕인지, 녀석은 단번에 기절했다.
'실력 좋은 놈은 아니라서 다행이네.'
근처에 대기하던 헤르파를 불러낸다. 그녀는 재밌는 일을 한다는 듯 웃으면서 쪼그려 앉았다.
"여기 누운 아저씨 피 빨면 돼요?"
"그래. 적당히 빨았다가, 체액을 뱉어서 네 권속으로 만들어."
"헤헤, 재밌겠다."
헤르파가목에 이빨을 박으려는데, 재빨리 저지했다. 그런 상처가 있으면 눈치채는 놈도 나오기 마련이다.
티 나지 않는 동맥..... 팔 안쪽이 낫겠지?
"헤르파, 팔 안쪽에도 동맥이 있으니까 거기로 흡혈해."
"네에엡, 오빠."
쪽쪽 야무지게 피를 빠는헤르파. 근데 어째 표정이 썩 좋지는 않았다.
헤르파는 한참 빨더니 체액을 주욱 뱉고는 일어섰다. 내 말대로하긴 했는데 울상이다.
"으으으....."
"왜 그래?"
"입 배려써...... 오빠 피로 정화할래....."
조졌다. 매일 내 피만 먹어서 입맛이 너무 고급이 돼버렸다. 이 녀석이 남자치고는 하위 계급이라고 쳐도 이런 반응이라니.
난 적당히 헤르파를 달랬다.
"조금만 있다가 줄게. 자, 요 남자부터 일으켜봐."
"지금 주지...."
헤르파는 투덜대면서도 충실하게 따랐다. 그녀의 눈이 살짝 빛나자, 남자가 눈을 번쩍 뜬다.
"자연스럽게 행동하라고 해봐. 아까처럼."
"네에에."
다시 눈이 번쩍이자, 녀석은 어느새 내 옆에 와 있었다.
"천인장님!!"
"으, 응?"
"왜 때리신 겁니까? 제가 뭐 대단한 걸 요구한 것도 아닌데, 너무......"
"헤르파, 다른 건 유지하는데 나한테 충성하라고 해봐."
다시 눈이 번쩍인다. 남자의 태도는 삽시간에 바뀌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제 와서 인사?"
"아까까지 너무 무례했습니다. 부대의 지휘관이신데, 제가 너무 격 없게 대한 것 같습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오....."
"시키실 게 있다면 뭐든 말하십시오!!"
나쁘지 않다. 조금 과한 면이 있지만, 이것도 헤르파를 통해 조절하면 될 거다.
난 남자를 다시 재우고는 헤르파에게 물었다.
"몇 명까지 될 거 같아?"
"우움, 지금은 모르겠어요. 아까랑 차이가 없는데......"
역시 제국 대마법사의 딸이다. 어머니 쪽이 어떤지는몰라도, 헤르파의 아버지 쪽 핏줄은 확실히 최상위급이었다.
'18명은 가뿐하겠지!'
우리는 남자를 앞세워 천막으로 향했다.
"천인장님, 아주 만족했습니다!"
"그래그래. 또 협상할 놈 없나?"
첫 타자의 반응을 보고, 다들 손을 들었고 난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상품 18명은 전부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다른 건 굳이 건드리지 않았으니 전쟁이 끝나면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남자 부하는 굳이 들일 생각도 없고.'
난 헤르파의 손을 잡고 신나게 걸었다.
"잘했어, 헤르파!!"
"헤헤, 그러면 오빠 피 좀......"
"으응?"
"나 아까 맛없는 피 때문에 입 배려써....."
어쩔 수 없이 좀 뜯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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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오후.
중요한 일은 대강 처리하고, 내 천막에 누워 좀 쉬는 중이었다.
가문에서 데려온 노예 둘은 지금도 유용했다. 양쪽에서 달라붙어 전신을 열심히 주물러준다.
'역시 최고야. 여기까지 올 때도 유용했고, 진지에 와서도 유용하다니까..... 전선에 데려가면 좋을 텐데.'
"도련님, 여기가 좋으십니까?"
허벅지를 주무르던 식사 보조의 물음. 난 고개를 까딱이며 중얼거렸다.
"거기도 좋고~ 안쪽도 좋고~. 그냥 지금이 좋다."
"행복하셔서 다행입니다."
"후후."
그렇게 막간의 여유를 한껏 즐길 때였다. 천막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제스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해."
그런데 에델이 조금 머뭇거린다. 그녀는 내가 천막 안에서 보통 뭘 하는지 알았다.
"제스님, 지금 동행이 있습니다. 초면인데 바로 들어가도 됩니까?"
"초면?"
뉴 페이스..... 아까 요청했던 책사랑 교관인가.
그래도 같이 일할 사이인데, 처음부터 폐급으로 보이긴 싫었다. 안 그래도 부대원은 전부 훈련 중 아닌가.
난 손짓으로 노예를 물리고는 침대에서 내려갔다.
"큼큼, 이제 들어와."
"예."
스르륵. 천막이 걷힌다. 에델은 단 한 명을 대동하고 왔는데,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딱딱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제스님, 우리 부대에 배정된 참모입니다."
"진짜로.....?"
"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맞나? 어이가 없어서 눈만 끔벅였다.
침묵이 이어지자, 참모라는 녀석이 방긋 웃으며 소개한다.
"처음 뵙네요, 히폴리타 체링겐이에요. 이름은 들어 보셨죠?"
이름뿐인가. 그녀의 성부터 유명했다.
체링겐 공작가. 제국 5대 공작 가문의 신동이 내 부하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 걸 저지를 인간은 한 명뿐이다.
'빌어먹을총사령관...... 이번엔 또 뭔 생각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