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솔선수범
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에델!! 일단 부대 인원부터 알아 와. 가문 같은 쓸데없는 거 말고, 성별이랑 외모 위주로!!"
"네? 아, 알겠습니다."
에델이 드물게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황당한 명령이긴 하다.
가문별로 나눠진 부대를 통합해야 하는데, 성별이랑 외모나 알아 오라니.
'하지만 원래 사람은 성욕 앞에 통일되는 법이지. 본능을 충족시키는 게 최고의 포상이야.'
병법에도 그랬다. 지구 시절 읽었던 책의 내용이다.
병사들의 사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적당한 약탈을 허용했다고 하던가? 약탈을 통해 욕구를 풀면 충성을 바친다는 소리였다.
'여기선 조금 다르게 해야지. 오크 상대로 약탈해봐야 어지간한 특이 취향이 아니고서야......'
에델은 금방 서류를 가져왔다. 항상 유능한 전속 하녀다.
난 에델이 가져온 서류를 보며 고뇌에 빠졌다.
"부대 총인원 1024명. 남자가 168명, 여자가 856명이라.... 남자가 조금 적은데?"
"다들 작은 가문 출신이라 그렇습니다. 큰 가문이면 남자 기사도 많아지니까요."
"흐음."
그런 것치고는 백합 기사단에는 남자 기사가 거의 없다. 내가 데려온 녀석들은 죄다 여자였고.
참고로 내가뽑은 거 아니다.
난 책상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남자 168명.... 이중에서 외적으로 괜찮은 녀석은 몇 명이야?"
"없습니다."
너무 단호한 대답. 에델을 노려보다 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스님을 매일 봐서 그런지 눈에 차질 않습니다."
"뭐, 뭔..... 고백이야?"
그리 말하자 에델이 재빨리 몸을 돌린다. 부끄러워하는 건가? 요즘 부려먹기만 하고 너무 신경을 안 쓰긴 했다.
오랜만에 에델을.....? 아니다. 너무 오랜만이라 도리어 어색할 지경이다. 난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물었다.
"에델, 네 기준 말고 평범한 기준에서 말이야. 조금 애매해도 전부 집어넣어봐.여자들도 취향은 다양하니까."
"알겠습니다."
에델은 눈을 감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그새 얼굴을 다 파악한 모양이다. 난 나눴던 대화도 가물가물한 지경인데.
에델의 손가락이 전부 접혔다가 차례로 펴진다. 그녀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일단 제스님과 비교하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로 시작하겠습니다."
"본론만."
"정말, 정말 관대하게 꼽자면 18명은 됩니다."
대충 10% 좀 넘는 비율이었다. 그쯤이면 나쁘지 않은 외모일 것이다.
난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그놈들 뭐 잘못한 거 없어? 최근에 기율을 어겼다거나 말이야."
"그것까지는 아직......"
"징계받았던 게 있으면 전부 가져와. 또 다른 부대에도 캐물어서 녀석들 샅샅이 털어."
"혼자서는 힘듭니다."
"가문 사병 있잖아. 말해둘 테니까 우리 가문 사병도 동원하라고."
"예!!"
에델은 힘차게 답했다. 괜히 기합이 들어간 게..... 따지자면 조금 후련한 표정이다.
'고백 비슷한 걸 했다, 이거야? 귀엽기는.'
난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나가봐. 이틀 안에 전부 털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러고는 천막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18명을 희생양으로 삼는 건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군. 내가 대체 언제 책임질 위치를 맡아봤다고......'
피곤하다. 가문에서 데려온 식사 보조를 불러 한동안 주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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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난 헤르파를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먼저 왔다는 사실 하나로 활짝 웃었다.
"오빠가 날 찾아왔어요......!!"
"그래,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야."
"뭔데요?"
난 손등을 살짝 뜯어 피를 냈다. 평소의 세 배는 되는 양을 헤르파의 입에 들이댄다.
헤르파는 자그만 손으로 손등을 낚아채더니 할짝였다.
스릅-스릅-
피가 거의 멈출 때까지 먹은 헤르파는 눈을 반짝였다.
"오늘은 만찬!!"
"내 피로?"
"오빠 피로 만찬!! 최고급 피!!"
아이고.... 나중에 오크 피도 먹을 계획이었는데, 맛없다고 안 먹으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잠시 접어뒀다.
더 급한 일이 있다.
"너 권속 만들 수 있지? 뱀파이어 권속 말이야."
"으으음..... 해본 적 없어요오..."
"본 적도 없어?"
헤르파는 얼굴을 갸웃거렸다. 축 처진 눈매에 갇힌 눈동자도 굴러간다.
"있다! 피 많이 빨아먹고, 침 뱉어주면 권속 만들어요!!"
"그치? 당연히 된다니까."
만족스럽게 헤르파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꼬리가 옅게 휘어진다.
'뱀파이어의 권속은 여러모로 유용하지. 세뇌 마법보다 쉽고 빨라. 게다가 권속이 된 후로도 평소처럼 행동하니까.'
마법적인 지배와 피로 지배하는 것의 차이였다.
마법적인 지배는 인위적이지만, 권속으로 만드는 건 그렇지 않다. 종족 자체의 기술인 만큼 세월에 걸쳐 발전되었다.
난 헤르파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가자, 네 부하를 만들어줄게."
"부하? 오빠가 내 부하면 좋겠다!!"
"......그건 좀."
헤르파의 손을 붙잡고 내 전용 천막으로 돌아왔다. 거기엔 하루 사이 에델이 정리해놓은 서류가 있었다.
서류엔 내가 선정한 18명의 잘못이 빼곡히 적혀 있다. 아주 작은 것도 찾아내라고 했으니 양이 많을 수밖에.
난 하나씩 죄목을 체크했다.
"다른 가문이랑 싸움.... 이건 폭행으로 처리하고. 근무 태만이라, 이건 조금만 과장하면 되겠어. 이 녀석은 비품 절도? 아주 적절해."
선정된 남자 병사들의 죄목을 부풀리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헤르파는 옆에서 갸웃거리며 물었다.
"원래 성추행이랑 성폭행이 같은 거예요.....?"
"같게 만들면 같아지는 법이란다."
깔끔한 작업이 끝난다. 다시금 에델을 불러서 내가 수정한 항목을 보여줬다.
황당한 눈빛을 보내는 에델.
"제스님...... 이게 뭡니까?"
"네가 찾은 죄목이잖아. 다들 죽일 놈이던데?"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질이 나쁜 놈도 있었는데, 대다수는 평범한 일탈......."
"쉬이잇!! 대충 비슷한 죄목이잖아? 그치?"
에델은 표정을 굳히더니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잡아오면 됩니까?"
"증거까지 확보해야지. 증인이 필요하면 적당히 쥐여주고 증언시키고, 물증이 필요하면 알잖아? 유용한 마법 많이 배웠을 텐데."
에델은 백작가의 전속 하녀였다. 전투 계열 마법도 당연히 익혔지만, 잡일에 필요한 것도 잘 알았다.
이를테면, 조금 깊숙한 곳에 상처를 만들어 예전에 다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마법 말이다.
없는 증거를 만들긴 충분했다.
에델은 각오한 듯한 얼굴로 천막을 나섰다.
5시간 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난 부대의 모든 인원을 불러모았다.
근처의 평지로 집합시켰는데, 고작 천 명인 주제에 수십 개의 덩어리로 나누어져 있다.
'에휴, 진짜 이대로 전쟁 나가면 다 뒤진다고...... 어쩔 수 없잖아.'
내 뒤에는 백합 기사단 절반과 가문의 사병이 절도 있게 서 있다. 이곳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전력.
게다가 천인장 직함을 달았으니, 다들 나만 보고 있었다.
큼큼, 난 일부러 목소리를 살짝 깔며 입을 열었다.
"본 천인장은 아주 실망했다."
"......"
어쩌라는 눈빛을 보내는 부대원들. 군기가 빠져도 제대로 빠졌다.
난 앨리스에게 눈짓했다.
"앨리스 경, 우리 부대에 아주 흉악한 범죄자가 무려 18명이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
"목록은 아까 전달했으니 전부 잡아 오도록."
"알겠습니다."
흉악한 범죄자라는 말에 부대가 술렁인다. 다들 주변을 살피며 무슨 잘못을 했냐고 묻거나, 찔리는 듯 눈치를 슬금슬금 살핀다.
"비켜라."
앨리스를 위시한 백합기사단은 거칠게 부대를 헤집었다. 기세에서 밀려 아무 말도 못 하는 귀족의 사병들.
앨리스는 한 명씩 집어내며 죄목을 읊었다.
"한스 스멜가. 군비 횡령과 근무 태만."
"자, 잠시만요!! 횡령이라니, 그냥 비품 몇 개 더 챙긴 것밖에......"
"닥쳐라. 증인이 있다."
앨리스가 지시하자 기사단원들이 남자를 포박한다. 항변은 계속되었으나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같은 식으로 18명을 전부 포박.
이쯤 되자, 부대원들 사이에서 '기강 잡기'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아예 틀린 예상이다.
'기강 잡기라..... 달라. 나는 채찍이 아니라 당근을 주는 거라고.'
밧줄에 꽁꽁 묶여 무릎 꿇은 남자 18명. 다들 상판대기는 괜찮은 편이었다.
"자, 너희 중에 군사재판을 받고 싶은 이가 있나? 물론 증거는 보다시피 넘쳐난다."
죄인들의 얼굴은 창백했다. 실제로 잘못한지 어쩐지는 몰라도 죄목을 고려할 때, 일단 재판에 회부되면 무사히 나오기는 힘들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이들.
"그래? 군사재판은 싫다는 거지?"
죄인들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난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제안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지. 너희들, 보직 변경은 어떠냐?"
의문의 눈길을 보내는 죄인들에게 말을 덧붙인다.
"이제부터 나와 같은 부대에 속하는 거다. 내가 하는 일과 아주 똑같은 일을 할 거야. 괜찮지?"
뭔지는 몰라도 천인장과 같은 일을 하면 괜찮을 거다. 죄인들의 표정은 딱 그거였다.
전부 수긍하는 분위기. 난 재빨리 에델에게 눈짓했다.
"전부 도장 찍으라 그래. 취소못 하게."
"네."
나와 같은 보직? 당연히 상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