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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뱀파이어 진화 (21/111)



〈 21화 〉뱀파이어 진화

다음 날.
나는 누군가 손가락을 잡는 감각에 눈을 떴다.

"으으음, 누구야?"
"아, 깨어나셨다....!!"

활짝 웃는 주인공은 헤르파. 이곳 평균에  미치는 얼굴이었지만, 막상 웃으니 귀엽긴 했다.
그나저나 내가 귀족가 자식이라 그런가, 이런 식으로 깨는 건 처음이었다. 내 허락도 없이 몸을 만지다니....

'역시 교육을  받긴 했어. 이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겠지.'

뭐 새벽에 깬 것도 아니니 괜찮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헤르파는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저기...."
"응?"
"뭐라고 불러야 해요....?"

호칭이라. 이것도 신선했다. 하기야 이때까지 이름도 없던 녀석인데 적절한 호칭을 알 리가 없다.
평범하게 도련님 따위를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연기하기도 했는데, 훨씬 친숙한 호칭으로 가자.'

친숙한 거? 머나먼 한국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연히 최고봉은 오빠였다.

"오빠라고 불러."
"오....빠?"

그리 말하며 갸웃거리는 헤르파. 생각보다 훨씬 귀여워서 당황하고 말았다.

'씨발, 한국에서는 이 단어 거의  들었는데..... 이걸 다른 세계에 와서 듣는구나.'

"에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근데 헤르파는  의미를 오해한 듯했다.

"자, 잘못한 거예요? 그럼 주, 주...."
"아니, 오빠 쪽이 좋지."

그리 말하며 머리를 슥슥 비볐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몇 살일까?

"넌 나이가 어떻게 되냐?"
"저 스무 살은 넘어요!! 스물하나...? 둘...?"

손가락을 접는 헤르파. 본인도 확실하진 않은 모양이다.
하나인지 둘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중요한 게 있었다.

"네가 성인이라고?"
"키, 키는 조금 작아도 확실히 맞아요!! 잘 못 먹어서....."

단숨에 쭈그러든다. 컴플렉스를 건드리기라도 했나.
괜히 미안해져서 에델을 불렀다.

"아침 좀 가져다줘."
"예."

그때, 헤르파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 오빠. 피는 없어요....?"
"피?"

존나 가지가지 한다. 먹여주고 재워줬더니 이젠 피까지 달란다.
잠시 울컥했으나  가라앉혔다.
휴우, 진정해야지.

"동물 피 같은 거? 가는 길에 사냥할 수는....."
"오, 오빠 피 조금만 먹고 싶은데...."

말을 끊은 것도 어이가 없는데, 내용은 더 가관이다. 내 피를 달라니.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아는 걸까.

'하기야 고급 음식이긴 하겠다. 음식으로 치면 진짜 최상등품일 테니까.'

내 피에 담긴 기운을 생각하면 특히 그랬다. 단호하게 거절하려는 찰나, 헤르파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두세 방울이라도...."
"아, 그거면 괜찮은 거야?"
"그냥 오빠 피는 맛있을 거 같아요!!"

맛. 순전히 미식을 위한 건가. 그래도 두세방울은 허용 범위였다.
그 정도 기운은 나가도 매일 채워지기 때문이다.

말이 나온김에 난 손가락 끝을 살짝 뜯어 헤르파에게 물려줬다.

"알아서 조금만 빨아 먹어."
"네에엡!! 핥짝...."

피를 핥아먹는데 야한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이가 성인이라고 해도 몸집이 좀 그렇다.
그런데 피를 먹는 헤르파의 반응이 좀 특이했다.

"핫!!"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눈을 감는 헤르파. 무슨 일인가 싶어 어깨를 잡자, 헤르파가 활짝 웃으며 번쩍 뜬다.

"오빠 맛있어요!!"
"피,피 말이지? 다른 거면 큰일나....."
"당연하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뭐지? 헤르파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본다.

"너.... 변하는 느낌 없었어?"
"으음, 뭐가요? 그냥 오빠 꺼 맛있었는데....."
"아니."

피부가  좋아졌나? 묘하게 탄력이 생긴 것도 같았다.
난 잘못 봤나 싶어서 고개를 저었다.

'하루 본 녀석인데 착각할 수도 있지.'

"자, 다들 짐 챙겼으면 출발하자!!"

아직 집결지까지는 며칠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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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헤르파는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조금씩 자라면서 예뻐진다고 봐야 하리라.
특히  피를 먹을 때마다 변화가 생겼다. 고작 며칠 사이에 앳된 티를  벗어 던졌다.

'혼혈은 원래 좀 못생겼다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였나.마침 옆에는 잡지식이 풍부한 한나 누나가 있다.

"누나."

헤르파의 위치를 확인한다. 그녀가 보지 못할 각도에서 입모양으로 물었다.

'혼혈은 원래 못생긴 거 아니었어?'

무슨 말이냐는 듯 보다가 탄성을 뱉는 한나 누나.

"아! 그게 말이지....."

한나 누나도 헤르파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입을 뻐끔댔다.

'유전자빨 아닐까? 공작이 반할 정도면 어지간히예쁜 뱀파이어였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네......'

헤르파는 따지자면 공작의 딸. 그녀의 어머니는 공작을 반하게 만든 여자였다.
혼혈이라 못생겨졌다고 해도 평균 이상이라는 거다.

'그럼 이때까지 못 먹어서  모양이었다가.....'
'네 피를 먹고 살아나는 거겠지. 그 피가 어디 보통 피냐?'
'어마어마하지.'

솔직히 기운의 양만 보면 확실히 대단했다.아직 음양의 조화를 이루지도 못했는데, 육체 능력은 황실 기사급이었으니.
한창 입모양으로 떠드는데, 헤르파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오빠!!뭐해요?"
"응?"
"저 빼놓고 둘이서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조금 자신감없는 태도로 물어보는 헤르파. 그녀의 손이 내 소매 끝자락을 잡는다.
행동은 비슷하지만 며칠 전보다 훨씬 귀엽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끌린다.....'

난 적당히 얼버무렸고, 제대로  대답을 듣지 못한 헤르파는 툴툴거리며 돌아갔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그날 오후.
우리는 드디어 집결지인 반프레 시에 도착할  있었다.
정확히는 도시에서 모이는 게 아니라, 근처의 진지에서 모인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진지는 꽤 대단했다.

아직 어렴풋이 보일 뿐인데, 기운이 느껴진다.

"으음, 대단하네. 이렇게 진한 기운은 처음이야."

내 말을 들은 앨리스가 살며시 고개를 젓는다.

"숫자는 확실히 많다는 뜻이지만.....  좀 아쉽습니다."
"왜?"
"만일 저와 같이 기세를 갈무리할 수 있는 고수가 모였다면 기운이 이렇게 퍼지진 않았겠지요."
"아....."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앨리스 경보다 약한 놈들이 주축이라 기세가 사방으로 뻗친다,  말이지?"
"크흐음, 정확합니다."

하여간 무력에 있어서는 은근히 자존심이 강하다. 앨리스가 강한 건 사실이었기에 적당히 넘겨줬다.
조금  가니, 목책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온다.

그들은 말을 몰고 달려왔는데, 기마술이 상당했다.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티가  난다.
가까이 접근해서 크게 외치는 기병.

"정지!! 정지!! 홀란트 가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그래. 깃발 보면 모르나?"

기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 알지만,사칭꾼도 있어서 말입니다. 신분 증명이 되십니까?"

보통은 신분패 따위를 내밀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을 계획이었다.

앨리스의 기를 살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녀의 어깨를 살짝 짚으며 말했다.

"혹시 제국의 장미라고 들어봤나?"
"제국의 장미.... 모르겠습니다."

녀석의 자신의 동료를 돌아봤다. 넌 장미 아냐? 전혀 모르겠는데. 따위의 대화가 오간다.

'이게 아닌데.... 왜 모르지?'

내가 당황하는 찰나, 앨리스의 깊은 한숨이 들렸다.

"하아아, 도련님. 혹시 가문 제일의 기사단 이름을 아십니까?"
"알지! 백합기사단.....아!!"
"전 제국의 백합입니다. 장미가 아니라....."

앨리스의 얼굴은 수치심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처음 나서는 자리인데, 이런 실수가 있었으니.....
백합이라는 이름을 듣자 기병들도 눈을 크게 떴다.

"들어봤습니다!! 제국의 백합, 앨리스 경..... 혹시 그분이십니까?"

앨리스는 괜히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끄덕였다.

"맞노라."
"오오,확실히!"

기병들은 서로 수군거렸다. 앨리스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워낙 미녀라서 퍼진 이야기가 좀 있는 모양이다.

'저놈들도 여자인데 왜 여자 얼굴로 소문이 퍼지지?'

레즈인가. 아무튼 앨리스는 그 명성 자체로 신분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기병들이 훨씬 밝아진 얼굴로 우리를 안내한다.

"유명하신 분이 직접 오실줄은 몰랐습니다! 다른 가문에서는....."
"숫자만 채운 머저리를 보냈겠지."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뻔하잖아."

사실 우리 가문도 방계만 있었으면 당연히 그랬을 거다. 애석하게도 방계가 없어서 내가 왔지만.

우리는 느긋하게 진지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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