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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화 〉제국의 0군단 (14/111)



〈 14화 〉제국의 0군단

"포로?"

난 리리나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지금 같은 제국민을 포로로 삼는다고 말한 거냐? 대체 무슨 목적으로?"

포로는 전쟁 중인 국가에서나 쓰는 말이다. 이를테면 오크 제국의 포로를 잡았다거나.
제국민끼리의 포로는 말이 되질 않았다.

내 말에 리리나는 붉은 눈동자를 더욱 빛냈다.

"당연히 영지전의 포로입니다. 홀란트 가문과 싸우려는 거지요."
"영지전이라...... 너무 말이 쉽게 나오는데?"

물론 영지전도 살짝 걱정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꺼낼 단어는 아니었다.

'뭣보다 여기는 황제의 입김이 강한 곳이잖아. 관리까지 파견될 정도로.'

제국이 전쟁 중인데, 국력을 갉아먹을 짓을 거리낌 없이 벌인다? 자연스럽진 않았다.

"참고로 죽은 경비병은 없다. 우리가 데리고 있을 뿐이야."
"뭐 어떻습니까. 그 아이들이 죽은 게 아니라도 전 참을  없어요."
"경비병이 네 자식이라도 되는 모양이야?"

단순히 가문 사이가 틀어지거나, 나한테 수모를 주는 정도가 아니다.
날 포로로 삼고 홀란트 가문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생각.
이건......

"너 첩자였나?"

내 말에 리리나 근처의 기사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성주님은 어디까지나 여성의 권리를 지키시는 거다!! 모함하지 마라!!"
"흠...... 하기야 부하들한테 말하진 않았겠지."
"홀란트의 패륜아 주제에 성주님을 깎아내리는 거냐!!"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씨발, 근데 니 성주도 나한테 존댓말 쓰는데 왜 니가 반말이냐?"
"그....."

순간 말문이 막힌 기사. 리리나는 앉은 채로 기사를 톡톡 건드렸다.

"잘했어. 하등한 남자는 원래 상대하는 게 아니야."
"감사합니다!!"

그녀의 칭찬을 받은 기사는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저놈들이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번뜩이는 생각이 스쳤다.

'잠깐, 오크 놈들은 모계 사회잖아? 그럼 여성주의자의 사상하고 정확히 일치하는 거 아닌가?'

모계사회를 이루는 오크와 여성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여성주의자.  생각하니 서로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다시 의심의 눈초리를 불태우며 리리나를 노려본다. 난 한나 누나를 쿡 찔렀다.

"누나, 이 성주에 대해서  아는  없어?"
"딱히.....? 들은 건 없어."

분명 구린  있을 거다.  마주한 채로 리리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으윽, 역겨운 패륜아가....."
"근데 말이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건 황제폐하 아닌가?"
"물론이지요. 설마 뭐 황졔 폐하가 남자인데, 경멸하냐고 물을 건가요?"

수준 떨어지는군요. 하고 작게 속삭인 리리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답했다.

"황제 폐하는 다른 인간과 다릅니다. 홀로 우뚝 서신 분이지요."
"그럼 태후 전하는? 두 분 중엔 누가 더 훌륭하시지?"
"그거야......"

리리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뭇거렸다.
당연히 황제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차마 뱉지 못하는 모습.
마치 신을 부정하려는 종교인 같았다.

'그야 여성주의자 입장에선 어쩔 수 없지. 어머니와 아들 중에서 어떻게 아들이 더 대단하다고 어떻게 말하겠어."

"두, 두  다 고귀하신 분이지요."
"크큭. 그게 반역인 건 알아?"

반역이 어디 황실의 바깥에서만 일어났던가. 황비에 의해서도, 자식에 의해서도 일어나는 게 반역이다.
황제와 다른 인물을 비교하면, 황제는 무조건 우위에 있어야만 했다.

물론 말 한마디로 반역을 논하기엔 좀 이르긴 하다. 이걸 권력있는 누군가 앞에서 뱉었다면 모를까, 내 앞에서 말한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뭣보다 나를 포박하면 땡이잖아. 제길, 괜찮은 꼬투리를 잡았는데.....'

역시나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리리나.

"말도 안 되는 궤변 늘어놓기는!! 다들 저 침입자를 생포해라!! 내일부터 홀란트 가문과 영지전에 들어갈 거다!!"
"예!!"

하지만 기사와 병사들이 움직이려는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어디선가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멈추시오."

마력이 적절히 담긴 울림.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에 다들 동작을 멈췄다.

뚜벅뚜벅-

저 멀리 성벽에서 누군가 걸어온다. 복장은 일반 평민과 다를 게 없었는데, 느껴지는 힘은 아버지 수준이었다.

'십존급 강자.....? 그런 존재가 갑자기 튀어나온다고?'

십존. 그 정도면 제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자들이었다. 즉, 귀족인 나는 대강 얼굴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하다못해 인상이라도.

하지만 저렇게 평범하게 생긴 사내는 듣질 못했다.
앨리스도 미간을 잔뜩 찌푸릴 뿐.

"대체 누구......“

검은 머리칼에 무난하게 투박한 피부. 보통의 체격을 지닌 남자는 무심하게 말했다.

"황군, 제 0군단이다."
"0군단......!!"

앨리스의 신음이 들린다.
나는 한나 누나에게 슬쩍 기대며 속삭였다.

"0군단이면   명만 있다는 그거 맞지?"
"응..... 그보다 이 대화 다 들릴걸?"

아차. 십존급 강자였지. 멋쩍게 입을 다무는데, 0군단 소속의 남자는 날 향해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제스 공자, 고맙소."
"아..... 예."

말투   고대사람 같네. 목소리랑 조합되니까 진짜 옛것이야.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데, 리리나가 눈에 들어왔다.
아까까지의 오만한 얼굴 대신에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움튼의 성주이자...... 아니, 성주 리리나입니다."

항상 덧붙였던 소개 문구, 그레이트우먼 상단의 주인이란 말은  빼놓은 인사말이었다.
0군단 사내는 입꼬리에 미동도 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래. 근데 앞으로는  소개말을 바꿔야  거다."
"......?"
"이제부터 올톰의 성주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 말이 끝남과 동시였다. 0군단 사내가 사라진 것은.
다시 나타난 장소는 리리나의 코앞.

채애앵-

여기사둘이 사내의 일격을 간신히 막는 모양새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 쳤다.

"0군단의 행사를 방해하는 거냐."
"우리는 성주님께 충성을......"
"모든 충성은 폐하를 앞서지 못한다!!"

이어서 불꽃이 연속적으로 튀긴다. 앨리스와 한나누나는 흥미로운지 무기를 꽉 쥐고 구경했지만,  솔직히 지루했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불꽃만 까앙- 까앙- 스타워즈도 아니고.'

광선검끼리 충돌하는 것마냥 주위가 번쩍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리리나를 지키던 기사의 목이 날아간다.

뎅겅-

다른 한 명도 곧이어 반으로 잘려 죽었다.

"끄아아악!!"

반갈죽. 실제로 보니  나왔다.
가장 강한 호위기사 둘이 처참히 죽은 상황. 리리나는 부들거리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가냘픈 다리로 뒷걸음질 친다.

"대, 대체 나한테  이러는 겁니까!! 그깟 말 한마디 잘못했다고......"
"내가 고작 말 따위로 이러는  같나?"

0군단 사내는 검에 묻은 피를 뿌렸다. 촤악-. 땅에 흩뿌려지는 핏방울.

"얼마 전에 죽은 올톰 시의 행정관. 누구 짓이지?"
"나, 나는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새로 들어간 행정관은 하필 여성주의자였지. 로비 꽤나 했더군."

순간 한나 누나의 말이 머리를 스친다.

'관리가 얼마 전에 교체됐다고 했지...... 이런 내막이 있었나.'

0군단 사내는 처음으로 소리 내서 웃었다,

"크큭, 황제 폐하가 임명한 관리를 입맛대로 갈아치워? 그래 뭐 여기까지는 봐줄 수도 있어.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도 있지......."
"증거가 없잖아!! 증거....."

발악하듯 외치는 리리나. 0군단 사내는 품에서 무언갈 꺼내 던졌다.

타악-. 음침한 장식의 목걸이가 땅에 떨어진다. 해골 두 개가 합쳐진 듯한 장식이었다.

"이, 이건....."
"익숙하지? 올톰시의 블랙 용병 길드장한테 저승길 선물로 받은 거다."
"......"

리리나의 얼굴에 핏기가 싹 빠졌다. 아예 모든 걸 놔버린 듯, 반항도 하지 않는다.
0군단 사내는 짤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블랙 용병 출신이라 그런지 입이  가벼웠어. 네 모든 걸 털어놓을 만큼 말이야."
"어쩐지 요근래 연락이......."

푸욱-

리리나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0군단 사내는 아주 간단한 손짓으로 리리나의 배를 꿰뚫었다.

"아..... 아."

죽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무력화되었다.
신음을 흘리는 리리나를 뒤로 하고 사내가 걸어온다. 정확히  앞에 멈춰 섰다.

"적극적인 협조 고맙소, 제스 공자."
"......"

적극적인 협조?  개소리지?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0군단 사내는 아주 만족스러운지 설명을 줄줄이 이었다. 분위기와 달리 설명충 기질이 다분하다.

"증거는 확실했는데...... 이곳 성주가 틀어박히면  혼자 잡기는 곤란해서 말이오. 그대 가문에 협조 공문을 보냈잖소?"
"하하, 그랬지요."

씨발, 난  몰랐지.

"직접 오지 않고, 아들을 보낸다길래 조금 불안했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성주를 유인하다니!! 정말 감탄했소!!"

아들?
순간 나를 배웅나올 때, 첫째 형이 없었던  떠올랐다.  맡았다고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더랬다.

씨발, 임무를 맡은 아들은 따로 있는것 같은데요?

아무튼 0군단 사내는 이후로도 나를 계속 칭찬하다가 리리나 쪽을 가리켰다.

"그래서 협조에 대한 보상을 줘야 하는데, 어떻소?"
".....?"
"순혈 여성주의자 리리나. 한번 먹어보고 싶지 않소? 여성 편력이 대단하다고 들었소만."

내가 멍하니 있자, 0군단 사내는 중요한 걸 빠뜨렸다는 듯 다시 속삭였다.

"당연히 처녀요. 임신은 남자를 쫓아내기 위한 구실일 뿐이지."

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녀는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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